2025. 4. 13(일)
서해랑길 67구간(17.7km) : 도황1리 다목적회관-(5.4km)-도황경로당-(3.8km)-안흥염전-(6km)-법산어촌계-(2.5km)-송현1리 버스정류장
비가 그친 아침,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든다. 버스는 빈 좌석 하나없이 만차다.
4월 중순인데 전날 밤 내린 눈은 서해안의 산야를 하얗게 물들이며,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만든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피부를 파고드는 싸늘한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든다.
계절의 속임수처럼 찾아온 찬바람은 몸을 잔뜩 움츠리게 하여 단체 사진촬영도 없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잔뜩 찌푸린 하늘아래 서해안의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에 잡힐 듯 무겁고 차갑다. 여기에 강풍까지 더해지니 걷는다는 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자신과의 작은 싸움이 되었다.
거리 17.7km 난이도 보통인 서해랑길 태안 67코스는 안흥만을 돌아가는 코스로 안내판에는 마도, 안흥진성,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 나래교가 소개되어 있는데 코스 중에 방문할 수 있는 장소는 없다.
옷깃을 여미고 혼자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생각도 말도 잦아든다. 그냥 '걷는 나'만 남는다.
자연은 어떤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트레킹의 진짜 매력 아닐까.
도황2리 들판을 돌아보며 마을을 벗어나면 연포감리교회가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코끝이 시리고, 손끝이 얼어붙을 듯했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바람은 마치 등 뒤에서 채찍처럼 밀어붙였고, 눈앞의 길은 쉼 없이 이어진다.
서해랑 트레킹을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바다를 따라 걷고 싶었고, 그저 걷는 것만으로 마음이 정리될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길 위에 서자, 모든 감각이 깨어났다. 흙을 밟는 소리, 눈이 부신 햇살, 입술을 파고드는 찬 공기. 그리고 등 뒤에서 거세게 밀어붙이는 바닷바람. 마치 나를 재촉하듯, 혹은 등에 손을 얹고 '계속 나아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금북정맥 산길로 들어선다.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492m)에서 남하하여 충남 태안반도 안흥진(安興鎭)까지, 295㎞에 이르는 금북정맥(錦北正脈) 표찰이 보인다.
입구에 풍차가 있는 아가페 유스호스텔을 지난다.
시점 8.7km 지점에서 근흥면 마금리 들판을 지나 방조제길로 들어선다.
서해랑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문득,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들이 있다. 안흥면 마금리, 방조제 저수지 끝자락에서 작은 수문을 지나 방조제 아래로 내려섰을 때도 그랬다. 고요한 수면과 묵직한 침묵이 깔린 그 길은, 누군가 오래도록 지켜온 공간처럼 느껴진다.
방조제 오른편, 간척지 너머로 펼쳐진 넓은 염전이 눈에 들어온다. 계절이 아직 덜 무르익어, 소금이 하얗게 빛나는 풍경은 아니지만, 그곳엔 분명히 생명이 있다. 몇몇 사람들이 소금밭을 돌보고 있다. 염전의 물길을 정리하는 그들의 모습은 꽃샘 추위 속에서도 한없이 느긋해 보인다.
이 조용한 풍경은 묘하게 따뜻하다. 바닷바람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땅을 다듬는 사람들과 그 곁을 걷는 나 사이엔 같은 리듬이 흐르고 있다.
정자같은 지붕아래에 소금물을 퍼올리는 수차와 바닷물을 끓이는 아궁이가 보인다. 갯벌에서 바닷물을 증발시킨 후 바닷물을 끓여서 자염을 생산하는 시설인 모양이다.
반도의 역사 마금리 '소금마을' 안내석이 보인다.
마금리는 금을 간다는 뜻의 지명이다. 일제시대 마금리 산에 금광이 있어 마을 사람들은 사금을 채취하였으며 현재도 금광의 형태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풍부한 갯벌을 보유한 마금리는 과거에는 사염(국가 전매품 인 소금을 개인이 허가없이 파는 소금) 의 주요 생산지였으며 현재는 천일염을 생산하는 마을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태안문화원에서 다시 화염이라고 불리는 자염을 재현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소금역사로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마을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마금리 갯벌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자염 생산이 가능한 조건을 갖추고 보존하는 갯벌이다.

시점에서 10.6km 지점의 마금리 낭금(종점)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등 뒤에서 부는 바람에 밀려 그냥 고개를 넘어간다.
길가에 표시석이 세워져 있는데, 앞면에는 '신의궁전'이고 뒷면에는 '삼신궁'이라 새겨져 있다. 연못과 집이 있고 정원에는 돌로 조각한 석조 조형물들이 많이 보인다. 석조물 제작업체인지, 종교단체인지 알 수 없는 궁전이다.
시점에서 13.7km지점 두루누비 안내 주의구간인 우회 갈림길이 나온다.
「노을지는 갯마을 해안길 만조 시, 마을길 우회노선으로 이용 부탁드립니다」
우회로와 합류하는 소원면 법산리에서 노을지는 갯마을 방향 도로변을 걷는다. 노을지는 갯마을이 지척이다. 67코스 종점까지는 3.3km다.
소원면 법산리 법산어촌계 건물을 지나간다.
안흥만의 넓은 갯벌을 보며 법산리 방조제길로 들어선다. 몸이 휘청일 정도로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친다.
방조제 오른쪽으로 소원면 신덕리 간척지에 시설을 제대로 갖춘 넓은 염전이 있다.
방조제 중간에서 사이길로 내려가니 왼쪽으로 보이는 또 다른 넓은 염전에는 소금창고외에는 시설이 별로 없고 관리도 엉망이다.
해가 구름 사이로 간간히 얼굴을 내민다. 서해랑 위에서 맞은 꽃샘 취위는 매서웠지만, 그 속엔 따뜻한 봄이 숨어 있었다. 눈으로 뒤덮인 풍경도, 매서운 바람도, 그 모든 것이 나를 껴안아 주는 듯한 순간이다. 걸으며 느낀 이 감정은 아마 오래도록 내 기억속에 남을 것이다.
송현1 교차로 송현리 버스정류장 옆에 서해랑길 68코스 안내판이 나타난다. 67코스 종점이다.
완주라는 단어는 단순한 끝맺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믿고 걸어온 시간에 대한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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