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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여숫골성지와 해미읍성(서해랑길 64-2코스에서)

2024. 12. 22(일)

커다란 변화에는 희생이 뒤따른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종교의 자유는 처음부터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왕조는 새로운 종교의 등장을 국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목숨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됐다.

 

해미천이 지나는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일부와 조산리 일대는 천주교 박해기 천주교도들의 생매장 처형지로 알려져 왔다. 1935년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이루어진 발굴 작업에서는 상당수의 유골이 발견되어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순교하여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천주교 당국에 의해 수습·보존되다가, 자신들이 목숨을 바친 순교의 현장에 다시 안장되어 있다.

 

해미순교성지(여숫골 성지)

1866년부터 1882년 병인박해 때 신자 1,000여 명을 정식 재판도 없이 처형을 당했고, 묘지도 없이 이곳 해미성지에 묻혔다고 한다. 해미천 옆에 생매장당한 이름 없는 순교자의 묘, 유해 발굴지에 조성된 노천성당, 서문 밖 순교지에 있던 자리개돌 원석이 보존돼 있다.

 

해미성지는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보다 무명 순교자가 더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집단적으로 생매장된 순교자 유해가 확인된 유일한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발굴된 유해와 그들이 안장된 무덤은 병인박해기 가장 처참했던 내포 및 해미 지역의 순교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여숫골성지는 교황청이 이곳을 해미순교자국제성지로 인정했다. 한국교회 최초이자 유일의 국제성지다. 천주교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성지가 ‘국제성지’로 인정받는데, 전 세계적으로도 국제성지는 30여 곳에 불과하다.

 

해미천을 따라 2만8400여㎡의 부지에 조성된 성지에는 대성당과 소성당, 진둠벙과 자리개돌, 무명순교자 묘와 순교탑, 복자상 등이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의 무덤을 형상화한 원형 모양의 성지 기념관에는 순교 당시 모습을 담은 조각과 판화, 성지에서 발굴된 순교자 유해가 안치돼 있다.

 

천주교에서는 순교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생매장터인 여숫골에 해미순교탑을 세워 신앙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탑의 형태는 하단부에 지름 약 12m의 둥근 무덤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봉우리 위에 약 16m 높이로 콘크리트 구조에 흰색 페인트가 입혀져 있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3개의 날개 형상이 십자가를 떠받치는 모습을 하고 있다. 탑의 앞쪽으로는 미사를 봉헌하는 제대가 있는데, 제대 앞면에는 교회사가인 신부 최석우가 짓고, 심응섭이 쓴 ‘순교자 탑문’이 새겨져 있다.

 

여숫골 무명 생매장 순교자 묘는 1975년에 건립된 해미순교탑 전면에 있다둥근 모양의 분묘는 아랫부분에 화강암으로 둘레석을 둘렀고주변 바닥은 화강석을 깔아 놓았다일반적으로 분묘 앞에 상석(床石)이 있지만이 묘에는 상석이 없고 대신에 미사를 드리는 제단이 분묘 뒤쪽에 마련되어 있다묘 앞에는 묘비가 있고앞쪽의 양옆으로 한 쌍의 문관석이 설치되어 있다.

해미에서 순교한 인언민, 이보현, 김진후 순교 복자의 동상.

 

둠벙에 수장되거나, 산 채로 매장을 당하면서도 순교자들이 하나같이 외치던 이름이 ‘예수-마리아’였다. 현세의 생을 마감하고 예수를 통해 천국으로 옮아가리라는 희망과 이제껏 지켜온 예수를 저버릴까 두려워 마리아의 도움에 의지하던 순교자들의 신앙 고백이 담긴 유언이다.

이들의 신앙을 알 길 없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순교자의 낯선 절규가 마치 ‘여수-머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그렇지, 필시 저들은 여수(여우의 충청도 사투리)에게 홀렸으니 저렇게 죽는 게지. 멀쩡한 사람으로 그토록 어리석게 죽을 수는 없는 게지.” 절체절명의 순간에 울부짖던 신앙의 절규 ‘예수-마리아’는 그렇게 ‘여수-머리’로 변형되었고 그래서 여숫골이 되었다.

 

‘진둠벙’이라 불리는 둘레 90m의 자그마한 연못에 성모상과 한복을 입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순교자를 형상화한 여성 석상이 물에 반쯤 잠겨 있다. 이 연못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당시 교인들을 빠뜨려 죽게 한 아픔이 깃든 곳이다.

 

죄인들이 빠져 죽던 이 둠벙 (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을 사람들은 ‘죄인둠벙’이라 불렀고,. 오늘날 ‘죄인둠벙’은 그 말이 줄어 ‘진둠벙’이라 불리게 되었다. 

진둠벙에 몸을 반쯤 담근 채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바라보는 순교자상. 생매장마저 번거롭다 여긴 포졸들이 개울 한가운데 둠벙에 빠뜨려 신자들을 죽였다. 죄인둠벙이라는 단어가 변해 진둠벙이 됐다.

 

생명의 나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늘 기념하는 조형물로 방문기간 동안 교황이 남긴 사랑과 평화의 메세지를 새겼다.

 

서산 9경은 우리나라 3대 읍성 중 하나인 해미읍성을 비롯해 개심사와 간월암마애여래삼존상 등 불교 유적과 팔봉산가야산황금산삼길포항 등 자연 유산그리고 드넓은 초지가 장관인 서산한우목장 등 9개 절경을 말한다.

 

아라메길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고유어인 [메]를 합쳐 만든 명칭으로 아라메길은 '서산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산시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산책, 트래킹할 수 있도록 아라메길 8개 노선을 선정했다.

 

2구간은 해미국제성지순례길(11㎞)로, 조선 시대 말 천주교 박해 때 천주교인이 압송됐던 해미순교성지∼한티고개 구간이다. 해미순교성지가 교황청으로부터 국제성지로 지정된 것을 반영했다.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로 불리는 내포 천주교 순례길이다. 9개 구간 140.5㎞에 이른다. 아산 공세리성당에서 시작해 당진 합덕성당·솔뫼성지(김대건 신부 탄생지), 초창기 천주교를 정착시킨 예산 ‘내포의 사도’ 이존창(1759~1801) 생가터, 홍성 홍주성을 거쳐 종점인 서산 해미국제성지로 이어진다. 2026년까지 완공한다. 

 

서산 9경 중 제1경인 해미읍성

읍성이라는 것은 산성이 아니라 평지에 높은 담을 세워서 읍 자체를 보호하는, 어떻게 보면 서양의 성 같은 개념이다.

현재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조선시대 3대 읍성은 순천의 낙안읍성, 고창의 고창읍성(모양성), 서산의 해미읍성이다.

 

'해미(海美)'라는 지명은 ‘바다가 아름답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곳에서는 바다가 보이지는 않지만, 간척되기 이전에는 서해와 접한 군사,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충남 서산 해미읍성. 매년 10월이면 축제로 들썩이는 관광지이지만 한편으로 조선 박해시기 내포 지역의 수많은 신자가 잡혀 와 고통받은 자리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1000여 명의 믿는 이가 목숨을 잃었다. 그때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읍성 남문을 지나 마주한 성안은 평온하다. 저 멀리 다른 나무보다 몇 배 키 큰 나무가 보인다. 학명으로는 회화나무, 충청도 사투리로 ‘호야나무’다.

 

서산 해미읍성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읍성 중 하나로 서해에 출몰하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충청권 서해안 방어를 위해 조선시대 세워진 해미읍성은 600년간 서산의 역사를 지켜봤다

 

성곽의 고즈넉함이 그대로 남아있는 해미면의 해미읍성도 빼놓을 수 없는 서산의 볼거리. 조선 성종 22년인 1491년에 완성한 석성이다. 둘레 1.8㎞, 높이 5m, 총면적 6만여 평의 거대한 성으로 최근 복원 및 정화 사업을 통해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또한, 해미읍성은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왔던 곳이기도 하며, 이순신 장군이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약 10개월간 근무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성벽 밖에는 2m 깊이의 해자가 있으며, 성의 구조는 평지에 타원형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며, 대략 달걀 모양과 비슷하다. 해미읍성의 내부에는 관아문, 동헌, 객사 등의 건물이 복원되어 조선시대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끌려와 옥고를 치르던 천주교인들의 아픔이 남아있는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천주교 박해 당시 해미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해 관아와 객사 등이 꽉 들어차 있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1579년(선조 12)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도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해미에서 유배 생활하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충청도 각 지역에서 잡혀 온 신자들이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특히 1866년에는 한 해에 1,000여 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성내 광장에는 당시 천주교도들이 갇혀있던 둥그런 감옥 터가 새로 복원됐다.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충청도 사투리 호야나무)

1790~1880년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 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철삿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삿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가지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동쪽 가지는 폭풍으로 부러졌다고 한다. 

 

해미읍성 광장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들어가면 동헌 오른쪽으로 108계단이 나온다. 돌계단을 하나씩 세면서 오르면 정확히 108번째 계단 위에 있는 정자 '청허정'과 만난다. 청허는 '잡된 생각이 없이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다. 오른편에는 자연스럽게 조성된 대나무밭이 운치를 더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