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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40-41구간(24km 법성포~동호항)

2022년 11월 27일(일)

40구간(13.7km 법성리 버스정류장~구시포해수욕장)

 

소설(小雪)이 지났다.

가을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벌써 계절은 또 이렇게 지나가나 보다.

11월도 끄트머리를 향해 달려간다. 가을이 문을 닫고 본격적으로 겨울이 열리고 있다.

 

아침 공기가 차갑다.

여산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에는 마지막 가을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타고 온 차량으로 넘쳐난다.

 

휴게소에서 쉬는 시간이 늘어지고, 버스 기사님이 길을 헤매는 바람에

예정보다 많이 늦게 법성포에 도착하여 법성리 버스 정류장에 일행들을 내려놓는다.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서해랑 40구간 이정표를 시작으로 법성포 굴비거리를 향해 걷는다.

따스한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아 대지를 포근하게 어루만지고  살살 부는 바람과 상쾌한 공기가 걷기에 아주 좋은 날씨다.

 

일반적으로 여행과 관광은 통용해서 사용하는 단어이지만, 엄연히 다른 단어라고 한다.

여행이란 '이동'과 '걸음'에 초점이 맞춰진 단어다. 무언가 소비하고 교류하는 관광과는 거리감이 있다.

서해랑길은 여행길이다. 관광을 목적으로 하면 다소 실망할 수 있는 길이다.

 

굴비 거리를 지난다. 전국적으로 굴비 한정식집으로 소문난 법성포 '일번지 식당'을 지나면

왼쪽으로 굴비를 형상화한 다리가 눈에 띈다.

조기 말린 것을 ‘굴비(屈非)’라고 하는데, 일설에는 고려 중기, 영광 법성포로 유배 온 문신 이자겸(李資謙)이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굴비를 왕에게 진상하면서 ‘비굴’의 글자를 바꾸어 ‘굴비’라 했다고 한다. 

 

코리아 둘레길은 있던 길을 연결한 길이다.

즉, 걷는 사람의 입맛에 맞는 길이 아니라, 그 길에 나를 맞추어야 하는 길이다.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즐기고, 그곳의 삶과 생활을 존중하며 걷는 '소확행의 길'이다.

 

한 달 전만 해도 행복한 가을 향기 출렁이며 익어가던 황금 들판이 걷는 내내 마음을 풍요롭게 했는데

지금 가을걷이를 끝낸 황량한 들판은 이제 내 삶의 부질없는 욕심을 조금씩 비워내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

 

하늘도 구름도 햇살도 바람도 모두 동행이 되며 행복이란 단어가 어우러지는 시간이다.

 

12시. 홍농버스터미널을 지나 편의점(세븐일레븐)에서 컵라면을 사서 준비해 간 약밥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한다.

 

마을로 다가설수록 낯선 이를 경계하는 개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집집마다 개를 키우는지 도미노처럼 개 짖는 소리가 작아졌다 커지기를 반복한다.

 

점심 식사를 하는 사이에 지나간 일행들이 저 멀리 아스라히 보인다.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갯벌을 바라보며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진다.

 

달리면서 스쳐 지나던 풍경 속에선 절대 알지 못했을 소중한 감성과 깨달음을

천천히 걸으면서 보게 되고 알게 되고 느끼게 된다.

천천히 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갯벌 끄트머리에서 길은 고리포와 구시포로 갈라진다. 

조선시대 고리포는 봉화를 올렸던 고리포 봉수대가 있었던 포구로 유명하며 

봉수군들이 머물렀던 마을로 추정된다고 한다.

 

오른쪽 구시포 방향으로 향한다. 오르막이다. 생태통로 사이로 구시포가 눈에 들어온다.

구시포(九市浦)의 원래 이름은 새나리불영(새 바닷가의 불같이 일어날 마을)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구시포로 바뀌었다.

세상이 달라지면 능히 아홉 곳의 시장과 어장을 거느릴 큰 항포의 뜻이 서려 있는 이름이다.

 

1800년부터 소금을 생산하던 포구라고 한다.

염전을 일구기 위해 수문(水門)을 설치했는데, 수문이 소여물을 담는 구시(구유의 방언)같이 생겨서

구시포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고운 모래와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구시포항은 명사십리로 이어지는 해안선과 송림이 일품이다.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도 자아낸다.

 

노을이 아름다운 구시포해수욕장에는 휴일 나들이 나온 가족들과 캠핑족들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예전에 유럽 여행을 하면서 유럽의 작은 소도시에서 느꼈던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풍광이다.

 

서해랑 40구간은 구시포해수욕장까지다.

해수욕장 앞 이마트 편의점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 들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41구간(10.4km 구시포해수욕장~동호항)

 

 서해랑길  41구간은 구시포해수욕장에서 동호해수욕장, 서해안바람공원, 심원면사무소를 잇는 19.7km로

처음부터 바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다.

 

그 중 오늘은 동호항까지 10.4km만 걷는다.

 

앞서간 일행들이 정자와 벤치에 자리를 잡고 삼삼오오 늦은 점심을 먹는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스쳐 지나간다.

먼저 점심을 먹느라 맨 후미에 쳐진 나와 갑장 친구는 둘이 자연스럽게 선두가 된다.

 

하늘 위에서 보면 포도주잔처럼 보인다는 아름다운 구시포항에서 시작해 동해 못지않은 파도 너울과 해송길이 이어지는 모래사장 길까지 서해랑길 41코스는 그동안 알고 있던 서쪽 바다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다시 보게 되는 길이다.

 

고창 해변은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약 8.5km 거리의 직선형 해안이다.

특히 장호에서 구시포해수욕장까지 이어진 모래밭은 '고창 명사십리'라고도 불린다.

 

해안가 모래 사장으로 내려선다.

오후 햇살이 보석처럼 바다 위에 쏟아진다.

걷다가 멈춰서 새삼 깨닫게 되는 서해바다의 잊지 못할 매력에 빠져본다.

 

구시포 해변에 모래밭을 걷다 뛰다하는데 한국 토종 돌고래인 상괭이의 폐사체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도 두 마리나.

상괭이는 한반도 남서해안에 사는 작은 돌고래로 멸종 보호종이라고 한다.

반들반들 몸이 빛난다는 뜻의 상광어(尙光魚)가 상괭이의 어원으로,

지역마다 물돼지, 살쾡이, 삭괭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친숙한 별명은 웃는 돌고래 미소 천사라도 한다.

얼굴 생김새가 천진난만하게 웃는 사람 얼굴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고창 핀란체 팬션과 명사십리 해양파크가 보이는 곳에서 굴다리를 지나 도로로 올라선다.

2009년에 완공 목표였던 명사십리 해양파크는 아직도 미완공 상태로 녹슨채 방치되고 있는 듯하다.

 

남북 길이 1km의 아담한 동호해수욕장은 해변을 따라 해송이 도열하듯 서 있다.

친구와 둘이 노을 미항 동호항에 다녀오는 사이 밀물이 순식간에 동호해변 드넓은 백사장을 삼켜 버렸다.

멋진 노을을 기대했지만 구름에 가려 노을을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 일행이 도착하고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갈증을 풀고 5시 조금 넘어 귀갓길에 오른다.

 

해 질 무렵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힘들 때 의지할 가족이 있다는 것은 더욱 큰 행복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