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6일(일)
7시.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선다.
간밤에 내리던 비는 다행히 아침이 되니 그쳤지만,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 뒤덮였다. 매서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운영진에서 겨울(11월~내년 2월)에는 접근 거리가 가까운 구간을 먼저 이어가기로 하여 오늘부터는 접근거리가 비교적 가깝고 풍광이 좋은 39코스부터 시작한다.
서해랑길 코스 중 36~40코스가 영광군을 지나가는데 그중 39코스는 영광군 백수읍 백암리 답동마을 입구에서 출발해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에 이르는 16.3km의 도보 길로 노을이 환상적인 백수해안도로를 걷고 영광 대교를 지나 백제불교 최초도래지를 거쳐 숲쟁이공원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로 영광의 주요 관광지를 지나는 서해랑길의 대표 코스이다.
8시. 진잠체육관 앞에서 마지막 일행을 태운 버스는 오랜만에 좌석을 가득 채우고 호남고속도로 서대전 요금소로 진입하여 남쪽으로 힘차게 달린다. 1시간 늦게 출발하는 대신 아침 식사가 제공되지 않는다.
영광군으로 들어서자 곳곳에 모시송편 간판이 엄청 많다. 영광은 예전부터 ‘영광굴비’가 대표적인 특산품이지만 서해 해풍을 맞고 자란 모싯잎으로 만든 모시송편도 웰빙 시대를 맞아 해를 더할수록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지역 특산품이라고 한다.
조기 말린 것을 ‘굴비(屈非)’라고 하는데, 일설에는 고려 중기, 영광 법성포로 유배 온 문신 이자겸(李資謙)이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굴비를 왕에게 진상하면서 ‘비굴’의 글자를 바꾸어 ‘굴비’라 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0시 40분. 서해랑길 39코스 시작점인 백수해안도로 표지판에서 하차하여 단체 기념사진을 남기고 길을 걷는다.
‘백수’는 읍소재지 지명. 실업자를 뜻하는 ‘백수(白手)’는 아니다. 백수(白岫)읍에 산봉우리가 100여 개를 헤아린다 해서 ‘흰 백(白)’ 자에 ‘산봉우리 수(岫)’ 자를 쓴다. 산봉우리가 일백 개에서 하나가 모자란 아흔아홉이라 해서 ‘일백 백’ 자에서 ‘한 일(一)’ 자의 획을 지워 ‘흰 백’ 자를 썼다는 이야기.
영광의 1경 백수해안도로는 부산 중구에서 경기 파주 문산읍까지 한반도 남서해안을 L자형으로 잇는 국내 최장 국도인 77호선 가운데 백수읍 길용마을에서 백암리 석구미마을까지 이어지는 16.8km 구간을 말한다.
한국의 아름다운 도로 우수상, 대한민국 자연경관 최우수상의 수상 이력과 환상의 국도 드라이브 코스 베스트10에도 선정된 아름다운 길이다.
도로를 따라 약 5분 정도 걷고 가파른 숲길을 오른다. 구수산(九岫山, 339m)능선이다. 구수산은 ‘백수(白岫)’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100개의 봉우리에서 한 개가 부족하다’고 표현할 만큼 올망졸망한 봉우리가 많은 산이다.
능선 나무전망대에 서면 영광풍력발전단지에 서해의 바닷바람을 이용한 수십개의 풍차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날씨가 흐려 조망이 조금 아쉽다.
산을 내려오면 도로 건너편에 열부순절지와 만난다.
열부순절지는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세워진 비각과 사당이다. 정유재란 때 동래 정씨와 진주 정씨 문중의 9명 부녀자들이 왜란을 피해 현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묵방포까지 피신하였다가 적선을 만나 굴욕을 당하기보다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의롭게 죽을 것을 결심하고 모두 묵방포 앞 칠산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한 것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영광에서 자주 등장하는 칠산이라는 지명은 영광 앞바다에 떠 있는 일곱 개의 섬을 가리킨다.
여기부터는 바다 가까이 해안풍경을 감상하며 해안로 나무 테크길을 따라 걷는다. 바닷바람과 눈 앞에 펼쳐지는 탁 트인 바다를 감상하며 걸으니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동해안 못지않은 절벽으로 이뤄진 곳으로 굽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다가선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노을전시관, 스카이워크 등이 걸음을 멈춘다. 최근 설치한 스카이워크에는 끝에다 갈매기 날개를 형상화한 괭이갈매기 포토존을 만들어 놓아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기 딱 좋은 포토존이다. 풍광에 취하고 곳곳에서 뜻하지 않게 얻은 소중한 추억을 사진에 담다보니 진행속도가 느리다.
카페거리 작은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각자 집에서 싸 온 음식으로 점심 식사를 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노을전시관으로 접근하자 국민들의 애창곡인 '바다가 육지라면' 등 히트가요로 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가수 조미미(본명 조미자)를 기리는 노래비가 잠시 걸음을 멈춘다. 머리속에 '단골손님', '서산 갯마을', 등의 노랫말이 떠오른다.
▲▼정유재란 때 의절한 9명 부녀자의 영혼을 달래는 열부순절지의 비각.
▲카페거리
▲노을 전시관
▲국민들의 애창곡인 '바다가 육지라면' 등 히트가요로 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가수 조미미(본명 조미자)를 기리는 노래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노을종이 있다. 노을종(鐘)은 어머니 곁을 맴도는 아들의 효심을 담아 영광군에서 명명했다고 한다. 한 번 치면 웃을 일이 생기고, 두 번 치면 사랑의 감정이 찾아들고, 세 번 치면 행복한 일이 생긴다는 스토리를 입혔다.
멀리 영광 원자력발전소의 모습과 영광대교도 시야에 들어온다.
모래미 해변을 지나 백수읍과 홍농읍을 이어주고 있는 영광대교를 건너면 길은 대교 아래 굴다리를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순천만을 연상시키는 남도 갯길을 따라 풍광에 취해 걷다보면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에 도착한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파키스탄 북부지역 간다라 양식의 탑과 불상 등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주변 건축물도 매우 이국적이다. ‘법성포(法聖浦)’라는 지명도 이곳을 통해 백제에 들어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전파한 불교의 ‘법法’과 마라난타를 의미하는 ‘성聖’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숲쟁이 꽃동산을 지난다. 이곳은 지금 가을이 절정이다. 꽃과 나무 사이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고운 색동옷을 입은 단풍나무들이 자꾸만 발걸음을 잡는다.
안내판 덕분에 생각지 않은 법성 진성을 발견한다.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
예로부터 법성포는 국방상 중요한 포구로 인식돼왔다. 이 때문에 조선 개국 초기부터 해상 방어에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선 중종 9년(1514년) 마침내 방어시설인 진(鎭)을 설치하게 된다. 이때 포구 뒤 인의산에 법성진성을 처음 쌓게 되었다. 초기 북쪽 성벽이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무너지자 남쪽 해변까지 연장해 쌓은 것이다. 이후 법성진성은 구한말까지 국방상 중요한 일익을 담당해오다가 근대 이후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비각거리’로 내려선다. 보은의 두꺼비 전설이 있는 ‘철비’와 더불어 조선시대 진량면(현 법성면)을 관장했던 고을 수령의 선정비 11기가 자리하고 있다.
홍대항(洪大恒) 첨사가 세운 보은(報恩)의 두꺼비 전설이 있는 이 철비(鐵碑)는 영험하여 “이 비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하면 하리거리(열병)가 낫는다.”는 속설이 있어 고을 사람들이 외경심을 가지고 정성껏 관리하였다고 한다.
칠산 앞바다에서 잡힌 조기는 거의 법성포에서 팔려나갔다. 조기철마다 어선들이 항구를 메워 ‘파시’를 이루었다. 조기 파시는 말 그대로 돈이 넘치는 어물 시장이다.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사진도 찍고,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 먹고 숲길도 걷고, 해안길도 걷고, 꽃길도 걷고, 아름다운 풍광에 취하고 생각지도 못한 명소를 만나고 마치 어릴적 종합선물세트는 받은 기분의 하루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같은 곳을 보며 걷는다는 것, 그 자체가 축복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법성포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실크로드의 둔황과 장안(현재의 시안)을 거쳐 백제 침류왕 원년(384) 상하이에서 바다를 건너와 발을 디딘 곳이다. 인도 간다라의 2~5세기 불상·불전도·부조·불두 진품을 전시한 간다라유물관과 이재순 석장이 석가모니 일대기를 23면에 조각한 부용루가 볼만하다. 존자정에서 보는 영광대교와 바다 풍경 또한 환상적이다.
▲숲쟁이 꽃동산
▲절제사 홍후대항 청덕선정비(節制使 洪侯大恒 淸德善政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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