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식사 후 서안으로 이동한다.
역사의 도시, 서안(西安 : 시안)
서안은 섬서성(陝西省)의 성도로 관중분지(關中盆地)의 중앙부에 있다. 서안은 동서 문물의 교역로였던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자 종착지이다. 문화가 번성하고 교역이 활발했던 당나라의 도읍지로서 동서 문화가 잘 조화를 이룬 역사고도로 우리에게는 서안 보다는 장안으로 익숙하다.
서안은 아테네,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古都)로 꼽히는 도시로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 중 하나이다.
흔히 북경, 서경(지금의 서안), 남경을 중국의 대표적인 고도로서 3경이라 일컫는데 그 중에서도 3천년의 역사를 지닌 서안은 고대의 유적들이 많아 중세의 유적을 대표하는 북경과 더불어 중국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기원전 11세기부터 서기 10세기까지 13개의 왕조나 정권이 서안에 도읍을 정하거나 정권을 세웠다. 서안 1100여년의 역사 속에서 서주(西周), 진(秦), 서한(西漢), 당(唐)이 가장 흥성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과거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기점이었던 서안에서는 수많은 역사인문경관을 볼 수 있다. 서안의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고성벽과 돌로 된 서고(書庫)라 불리는 비림, 대안탑, 소안탑 등의 건축물은 물론이려니와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세계 8대 기적' 중 하나인 진시황 병마용갱 그리고 중화민족의 발상지 중 하나로 반파(半坡)유적, 모계사회부터 부계씨족까지의 변천을 볼 수 있는 앙소(仰韶)문화와 용산(龍山)문화의 유적지 등 중화고대문명의 진귀한 유적들이 보존되어 있으니 "오천년의 중국역사를 서안에서 볼 수 있다"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중국을 여행 할 때 서안을 필수 코스로 잡는 것도 당연하다.
진시황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애틋한 양귀비의 사랑이 넘실대는 서안은 한민족뿐 아니라 옛 실크로드의 후손인 회교도(터키 유목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문화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서안의 인구는 약 650만~700만 명이며, 중국의 신흥 내륙 공업 지역 가운데 하나로 20여 개의 대학과 연구소들을 갖춘 교육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은 중국의 군수 공장, 우주연구센터 등 핵심적인 산업체가 있다.
'장안'
장안은 당(唐)나라 때의 서안을 부르던 이름으로 우리에게도 친근한 명칭이다. 당 태종 때까지만 해도 장안의 재정이 궁핍했는데, 당 고종 때부터 조금씩 사정이 나아지다가 현종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며 로마와 함께 세계의 중심지로 등장했다. 당시 장안은 동서 10Km, 남북 8Km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데다가, 인구는 150만 명이었다. 이 중 외국 사신들의 수는 약 4천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고속도로 주유소에서 주유 차례를 기다리는 화물차량의 행렬
[관광11]진시황릉(秦始皇凌)과 병마용갱(兵馬俑坑)
서안에서 진용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에 낮은 야산이 하나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인 진나라 황제 진시황릉이다.
진시황릉
진시황릉은 37년간에 걸쳐 완공되었는데,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만리장성축조, 문자통일, 도량형통일을 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긴 황제답게 무덤의 둘레가 6킬로미터, 높이는 50미터에 달하여 황제의 능이라기보다 그냥 하나의 야산으로 보인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황릉을 만들 당시 그 높이가 자그마치 120미터, 부지 둘레의 길이가 2167미터나 되었고,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기원전 246년에 건축되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200년 풍화에 현재 51.7m로 낮아져 있지만 여전히 그 위엄 있고 신비스런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1987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최근 조사 결과 병마용갱 부근의 리산의 토양이 많은 수은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이것이 바로 진시황릉이라 추정되고 있다. 리산에 대한 발굴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7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원격 탐지 장치를 이용하여 내부에 벽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병마용갱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진시황릉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는 유적지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사, 말 등의 모형이 있는 갱도이다.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진 병사와 말로 진시황의 명령의 의해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실물크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병마용은 살아있는 듯한 모습의 등신대로 제작되었으며 얼굴 부위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다. 병마용의 존재는 진시황제의 권력을 상징한다.
1974년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지금까지 4개의 갱도가 발견되었다. 1호 갱에만 6,000여 병마가 실물크기로 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병용은 키가 184cm에서 197cm로 큰 편이며 장군이 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다. 병마용은 전사, 전차, 말, 장교, 곡예사, 역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발굴된 4개의 갱도 중 3곳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와 130개의 전차, 520점의 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직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다.
▽1호갱
▽3호갱
▽2호갱
▽청동마차 박물관
▲진시황릉사진
▲노태우 전대통령이 기증한 방문 기념품
병마용갱 관람을 끝내고 나오면 떠돌이 잡상인들이 석고로 만든 병마용 모형 5개가 들어있는 1세트를 15위엔이라고 외친다. 현혹되지 말 것. 실제 사려고 하면 그 중에서 한 개만 빼준다. 사려면 먼저 흥정을 하고 돈을 주기 전에 물건을 먼저 받아 잘 챙기고 그 다음에 돈을 줘야한다. 돈을 먼저 주면 바가지를 쓴다. 우리 돈으로 1-2천원 차이이지만 속았다는 것에 기분이 상하고 다른 일행들보다 조금이라도 비싸게 샀다는 것에 왠지 경쟁에서 졌다는 기분이 들어 속이 상한다.
[관광12]화청지(華淸地)
화청지는 시안(西安)에 있던 황제들에게는 추운 겨울을 나던 피한(避寒)별장으로, 서안에서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관중 여산 북쪽 기슭, 진시황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못이 화청궁 안에 있기 때문에 화청지라고 명명하였다. 양귀비와 현종의 로맨스로 더 유명한 화청지에 들어서면 막 목욕을 마친 것 같은 양귀비의 석고조각상이 반나로 관광객을 맞이한다.
황제의 욕탕인 구룡전(九龍殿) 연화탕과 양귀비에게 하사한 욕탕인 해당탕(海棠湯) 등이 있다. 화청궁의 전체 구조는 6문(門), 10전(殿), 4루(樓), 3각(閣), 5탕(湯)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천은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수온 43℃로 쾌적할 뿐 아니라, 석회 등 여러 가지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어, 관절염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하화지(荷花池) 연못가로 석류가 멋들어지게 가지를 드리우고 탐스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한 무제 때 장건(張騫)이 실크로드를 통해 들여온 석류가 린퉁(臨潼)의 3가지 보물 중의 하나고 석류씨가 위장병에 좋으며 양귀비도 이곳에서 석류를 직접 재배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호수 위로 오간청(五間廳)이 있는데 바로 시안사변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1936년 12월 12일 새벽, 장쉬에리앙(張學良)은 1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직접 장지에스(蔣介石) 체포 작전에 나섰고 장지에스는 부상을 입고 정자에 숨어 있다가 아침에 발각되어 구금되었다.
자신의 상관을 구금하고 내전정지(內戰停止)와 일치항일(一致抗日)을 간청한 장쉬에리앙의 이 시안사변은 일본에 대한 항일보다 공산당 토벌에만 몰두하던 국민당의 노선을 수정하게 만들면서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내 중국현대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당시의 총탄흔적이 남아 있는 벽과 깨진 유리 창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장지에스의 사진이 걸린 사무실 등이 역사적 현장감을 더해 준다.
연못을 돌다 보면 리산으로 올라가는 동그란 문이 있는데 그 위로 장지에스가 도망가다 체포된 정자가 있다. 원래 이름은 착장정(捉蔣亭, 장지에스를 잡은 정자)였으나 대만과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하여 병간정(兵諫亭, 무력으로 간언한 정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양귀비가 목욕을 했던 곳이라 하여 귀비지(貴妃池)라고 이름 부쳐진 누각에 들어서면 해당탕(海棠湯)이라는 꽃모양의 작은 욕탕이 있다. 부용탕(芙蓉湯)이라고도 불리는데 물이 들어오는 곳과 나가는 배수구에 동전을 넣으면 복이 온다는 믿음에 많은 동전이 꽃잎처럼 흩어져 있다.
연화탕(蓮花湯)은 현종의 독탕인데 궁녀들과 함께 목욕을 했기 때문에 규모가 크다. 그곳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는데 두 물줄기가 분수처럼 솟아올라 한 송이 연꽃처럼 합쳐진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뜻하고 있다.
북두칠성 모양으로 생긴 성신탕(星辰湯)은 야간에 목욕을 하던 곳으로 지붕이 없어 하늘의 별을 보며 목욕을 하던, 일종의 노천탕이었던 셈이다. 그 물길 위로 황제 전용 탈의실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목욕한 온천수로 난방을 하는 과학적인 지혜가 돋보인다.
황제가 목욕을 한 그 물을 재활용해서 관리들이 또 목욕을 하는 곳으로 상식탕(尙食湯)이다.
목욕탕을 빠져 나오면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듯한 반라의 양귀비 석고조각상이 구룡호(九龍湖)에 요염하게 서 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양귀비가 불어오는 바람에 그 긴 머리를 말리던 아름다운 정자 비하각(飛霞閣)이 담쟁이 넝쿨에 감싸여 있는데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며느리였던 27살의 양귀비를 사랑한 62세의 현종! 35년의 세월을 극복한 그들의 애틋한 '왕니엔리엔(忘年戀)'이었기에 이처럼 세심한 배려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전용 헤어드라이 누각을 마련해 준 현종의 사랑은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 잘 묘사되어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홍안화수(紅顔禍水, 미인은 화근이 된다)라고 양귀비의 아름다움은 곧 재앙을 불러오는 화근이 되니 바로 안사의 난(安史亂, 755~763년)이다. 현종과 함께 촉 땅으로 도망가던 중 반란군에 의해 양귀비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비익조, 연리지를 꿈꾸던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도 막을 내리게 되며 융성하던 당나라도 슬슬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중국에서 4대 미인을 표현 하는 말이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이다.
"침어(沈魚)"-서시(西施)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낙안(落雁)"-왕소군(王昭君)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갯짓 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
"폐월(閉月)"-초선(貂嬋)
"초선의 미모에 달도 부끄러워서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다."
"수화(羞花)"-양귀비(楊貴妃)
"양귀비의 미모에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시안 성벽 야경-중국에서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완전한 고성(古城) 중의 하나로, 명 태조 홍무제 3년부터 11년에 걸쳐 건설되어 그 역사가 600년에 이른다. 전체 길이가 13.6킬로미터, 높이가 12미터, 폭이 15미터로, 높고 두꺼운 벽이 이 성의 가장 큰 특징이며 넓은 성을 둘러보게 하기 위해 모형 전동차도 운행한다.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구정)을 맞아 20억 인구의 대이동으로 대도시 기차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인데 서안역도 마찬가지다.
중국 춘절휴가는 공식적으로는 음력12월 31일 부터 음력1월 2일까지 3일이지만 일반 기업 중에는(특히나 국영기업) 춘절 휴가를 한 달까지 주는 회사가 많기 때문에 3월까지 업무가 안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승차권이 없으면 역내로 들어갈 수 없다.
△지정 좌석이 없는 표를 가진 사람들은 커다란 짐보따리를 메고 선착순한다.
△1등석 침대칸(4인실) 내부 모습
△정주 역앞 길바닥에서 자자는 노숙자들-추위에 동사가 걱정된다.
'여행스케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대륙을 가다 8탄(6)-쇼핑일정 / 귀국 (0) | 2009.03.03 |
---|---|
중국대륙을 가다 8탄(5)-유네스코지정 지질공원 운대산 (0) | 2009.03.03 |
중국대륙을 가다 8탄(3)-중국 오악중 서악 (0) | 2009.03.02 |
중국대륙을 가다 8탄(2)-소림사와 용문석굴 (0) | 2009.02.27 |
중국대륙을 가다 8탄(1)-하남성의 성도 정주 (0) | 2009.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