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17일 (화)
정저우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소림사다. 정저우를 찾는 여행객들의 필수 코스인 소림사는 동양인들뿐만 아니라 신비로운 중국 무술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서양인들도 많이 찾는다. 아침식사 후 곧바로 소림사로 향한다.
잘 뻗은 중국의 고속도로는 통행하는 차량이 많지 않아 텅텅 비었는데도 아주 일정하게 시속 80km로만 주행한다.
▲고속도로 휴게소(服務區)- 중국은 고속도로 휴게소가 드물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중국어로는 복무구(服務區)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우리나라 고속도로휴게소에 비하면 구멍가게 수준의 상점에 주유소와 화장실 정도가 있다. 화장실(洗手間) 변기 앞엔 "上前一小步 文明一大步" 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인데 중국관광객들은 한국에 여행 오면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들르려고 한단다.
하남성 황하 연변의 등봉(登封)현에 위치한 숭산(嵩山)은 정주 시내에서 1시간 거리에 있다. 주봉의 해발이 1492미터다. 숭산에는 봉우리도 많거니와 절도 매우 많아 "우에는 72개 봉우리, 아래는 72개 절(上有七十二峰, 下有七十二寺)"이라는 말이 있다.
숭산은 명산답게 고적이 매우 많은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중악묘(中岳廟)이다. 중악묘는 진(秦)조때 세워졌는데 그 후 역대의 수복 건설을 통해 점차 웅장한 사묘로 발전했다. 중악묘의 건축은 청고종(淸高宗) 홍력(弘歷)이 북경자금성의 형식을 본 따 설계하고 건설한 것이다.
현재 전(殿), 각(閣), 궁(宮), 루(樓), 정(亭), 대(臺) 등 400여개 건축과 백여 개 돌조각, 비석이 보존됐으며 부지면적이 37만 평방미터, 길이가 600여 미터에 달하는 유명한 고대건축군의 하나이다.
중국정부가 특별히 지정한 전국 44개의 풍경명승구(風景名勝區) 가운데 한 곳으로 중국 3대 사찰 중 하나로 선종(禪宗)의 발원지며 소림무술의 본산인 천하제일의 명찰 소림사(少林寺)를 바로 산 아래 품고 있다.
숭산은 중국 사람들이 상고시대 때부터 섬겨오는 천신(天神)의 산이자 황하 하신(河神)의 산이다. 숭산은 동서남북 오악 중 중심이 되는 중악이며, 흔히 역사가들은 중화(中華)사상, 천명(天命)사상의 발원지라고 말한다.
황산은 아름다움이 빼어난 산이라면, 태산은 문화역사의 산이고, 숭산은 온몸으로 산의 기를 느낄 수 있는 신비스러운 설화의 산이다. 또한 숭산은 지각변화 과정을 한눈으로 체험할 수 있는 연천대협곡과, 달마가 면벽 9년간 인고수행(忍苦修行)을 했다는 달마동, 그리고 팔을 자르고 달마의 제자가 된 혜가가 머물던 1,500년 된 이조암이 있다. 한 마디로 숭산 전체가 자연사박물관이자 불교역사박물관이다.
소림사 주차장에서 내리면 소림사를 알리는 석패방(石牌坊)이 눈에 들어온다. 세계적인 관광지답게 주변 환경과 시설이 잘 조성되어 있고,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주차장에서 경내 입구까지는 1㎞ 남짓한 거리인데 전동차를 타고 들어간다. 소림사 입구에서 본 사찰은 의외로 규모가 작다. 하지만 수령이 수백 년 넘은 고목들이 소림사의 오랜 역사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소림사 경내를 운행하는 전동차
[관광4] 탑림(塔林)
탑림은 소림사에서 가장 유명한 경관으로서 소림사에서 서쪽으로 약 250 미터 떨어져 있으며 면적이 1만4천여 평방미터에 달한다. 역대 고승들의 부도군으로, 243개 탑이 숲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탑림이라 한다.
당나라 고승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약 천 년 동안 소림사에서 수행, 포교한 이름 높은 스님들의 부도가 243개나 서 있다. 탑 모양은 시대마다 달라 육각, 사각, 원통형을 이루고 있다. 탑의 아래에 역대 고승들의 시체가 묻혀 있는데 무덤주인의 지혜 및 덕망에 따라 1층에서 7층까지 높이도 다르다. 탑신은 천 년의 역사를 침묵으로 말하며 이국에서 찾아온 나그네를 맞는다.
[관광5]소림사(少林寺, 샤오린스)
숭산은 태실봉과 소실봉으로 나뉘는데 소림사는 소실봉(少室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사찰이 소실산의 숲속에 있다고 하여 소림사라고 했다. 많은 이들에게 달마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소림사는 실제로는 1500년 전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의 명을 받아 태화(太和) 20년(496)에 인도(天竺)에서 온 발타(佛陀)선사가 창건한 것이다. 발타선사는 창건한 이후에도 30년간 소림사에 머물면서 불법을 설파하고 사찰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 후 AD 527년에 남천축(南天竺)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들어와서 소림사에서 면벽구년(面壁九年)을 하고 깨달음을 전하여 불교선종(佛敎禪宗)의 초조(初祖)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소림사는 중국 선종의 본산으로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산문(山門)을 들어가자 비석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거대한 나무에는 작은 홈들이 파여 있다. 스님들이 무술을 연마하면서 손가락으로 낸 구멍들이라고 한다. 천왕전(天王殿)에는 사대천왕(四大天王)이 눈을 부라린 채 서 있다. 그 표정과 동작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천왕전을 지나자 4층 종루(鐘樓)가 하늘을 향해 날아갈 듯이 앉아 있다.
대웅보전 옆에는 당태종(唐太宗) 이세민의 어서(御書)를 새긴 거대한 비석이 있다. 이세민이 직접 썼다는 ‘세민(世民)’이라는 수결(手決)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대웅보전 뒤에는 장경각(藏經閣)이 있다. 스님들이 불경을 쌓아놓고 강학하는 곳이다. 장경각 마당에는 명(明) 나라 만력(明萬历) 연간에 주조한 철종(铁钟)이 있다. 장경각 동남쪽의 건물은 스님들이 참선하는 선방(禪房)이다. 방장(方丈)의 거처인 방장실(方丈室)을 지나자, 불(佛)의 절대 진리를 나타내는 석가모니의 법신상(法身像), 비로자나불이 나온다.
대웅보전(大雄寶殿)에는 석가모니, 아미타불, 약사불이 있고 십팔나한상이 시립(侍立)하고 있다.
△대웅보전(大雄宝殿)
대웅보전은 소림사의 핵심적인 건축물로서 승인들이 불교활동을 진행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대웅보전은 1928년, 전쟁에서 불타버려 1985년에 다시 재건하였는데 내부에 3개의 불상을 모시고 있으며 불상의 곁에 달모(达摩)의 상이 서있다. 대웅보전의 중앙에 있는 2개의 기둥 아래에는 기린(麒麟,중국 전설에서 나오는 신격화된 동물) 조각상이 누워있어 선종 불교가 이미 옛적부터 중국화 되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된다.
△장경각(藏经阁)
장경각은 불교의 경전을 보관하는 장소로서 일명 법당이라고도 부르는데 명나라 때에 세워진 옛 건물은 1928년의 전쟁에서 회멸되었고 현재 보이는 건물은 1994년에 다시 세워진 복원 건축물이다. 장경각 내에는 명나라 만력황제 (万历皇帝) 때에 제조한 대형 철 가마가 걸려 있으며 1996년에 미얀마의 불교신도가 기증한 한맥옥(汉白玉)으로 된 와불(卧佛)이 모셔져 있어 볼만하다.
△달마정(达摩亭)
달마정은 일명 입설정(立雪亭)이라고 부르는데 내부에 소림사의 시조인 달마(达摩) 및 소림사 초기의 역대 주지(住持,절간의 최고 관리자)의 동상이 모셔져 있다. 달마정 내에 청나라의 건륭(乾隆)황제가 ‘설인심주’(雪印心珠) 라고 친필 한 현판(匾额,간판 모양인데 뛰어난 서법으로 공적이나 덕망을 적어 실내에 걸어둔다)이 걸려 있으며 벽에 달마에 관한 이야기가 기재되었다.
△천불전(千佛殿)
천불전은 명나라 때에 세워진 건물로서 소림사에서 가장 큰 불당이며 역대의 무승(武僧)들이 무예를 익히던 장소이다.
천불전은 높이가 20여 미터, 면적이 300여 평방미터에 달하며 내부의 벽에 500여 개의 나한(罗汉)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바닥에 4 줄로 총 48개의 움푹한 구덩이가 파여 있다. 놀라운 것은 이 48개의 구덩이가 역대의 무승(武僧)들이 무술을 연마하면서 남긴 발자국이라는 사실이다.
[관광6]소림사 무술쇼 관람
소림사의 쿵푸는 수행승들이 장시간 결가부좌 자세에서 오는 피로를 풀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무술을 단련한 데서 비롯됐다. 소림쿵푸는 5가지 동물의 움직임을 본떠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오늘날 중국 무술의 대명사로 통한다.
소림쿵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당나라 초기 소림사의 승려 혜장, 담종, 지견 등 13명이 이세민을 도와 왕세충을 토벌하면서부터다. 이후 당 태종 이세민은 담종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소림사에 승병을 교육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승병들에게는 불살계(不殺戒), 불음주계(不飮酒戒)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며 파계를 인정했다.
소림사는 선학, 승병, 무술로 명성을 얻으며 ‘천하제일명찰(天下第一名刹)’이라 칭해졌다. 송나라 때에는 승려수가 2000여명에 달할 정도로 번성했다. 명대에는 소림사의 무술 승려들이 중국 동남해안에 파견돼 왜구를 섬멸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소림사는 20세기 초반 국공내전, 군벌들의 싸움을 거치며 급격히 쇠락했다. 소림사 승려들도 뿔뿔이 흩어져 소림쿵푸는 속세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1970년대 이후 소림사의 쿵푸는 <소림사> <소림화상> <소림무공> 등 영화로 소개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2006년에는 태극권과 함께 중국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관광7]백마사 (白馬寺)
백마사는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최초의 불교 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계에서는 백마사를 ‘석원(釋源)’과 ‘조정(祖庭)’이라고 존칭했는데, 전자는 불교의 발상지라는 뜻이며, 후자는 조사(祖師)의 정원(庭院)이라는 뜻이다. 평야에 자리 잡은 백마사는 장방형(長方形)이며 총면적이 6만㎡나 되는 큰 사원이다.
동한(東漢) 영평(永平) 7년(64) 어느 날 밤, 명제(明帝) 유장(劉壯)이 키가 크고 머리에서 광채가 나는 한 금인(金人)이 서쪽에서 궁궐로 오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다음 날 아침 명제가 대신들을 소집하여 꿈 이야기를 해 주자, 박사(博士) 부의(傅毅)가 이렇게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서방에는 신(神)이 있다고 하옵니다. 사람들은 그를 부처님이라고 부릅니다. 폐하께서 아마 부처님을 보신 게 아닌지요.”
명제는 그의 말을 믿고 대신(大臣) 채음(蔡愔), 진경(秦景) 등을 서역에 파견하여 불경과 불법을 구해 가져오게 했다. 황제의 명을 받은 채음 등의 사절단은 ‘서천취경(西天取經)’의 만리 여정에 올랐다. 그들은 대월씨국(大月氏國: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천축의 고승,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을 만나 불경과 불상을 얻을 수 있었다. 영평 10년(67)에 사절단과 두 스님은 백마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낙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명제는 크게 기뻐하여 두 고승을 정중히 모시고 불법을 들었으며, 영평 11년(68)에 백마사를 지은 것이다. 백마가 불경을 싣고 왔다고 하여 사원의 이름을 백마사라고 지었다. 중국 불교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중국 전역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 서기 68년 중국 최초로 세워진 절로서 후한의 명제가 인도에 파견한 채석, 진경이라는 승려가 인도 고승 두 사람과 함께 백마를 타고 낙양에 돌아왔다는 전설이 있는 사찰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2마리의 백마상이 세워져 있다.
역사와 문화의 도시 - 낙양(洛陽 : 뤄양)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무덤은 절세가인이 몇몇이냐 우리내 인생 한번가면 저모양이 될터인데 ······ "
낙수(洛水)의 양지(陽)에 자리 잡고 있다하여 이름 붙여진 낙양은 화하문명(華夏文明)의 주요 발상지 중 하나로 하남성(河南省) 서부의 황하 중류에 위치해 있으며 중·서부지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기원전 770년 주평왕(周平王)이 이곳으로 도읍지를 정한 이후 역사상 동주, 동한, 조위, 서진, 북위, 수, 당, 수양, 수당 등의 13개의 왕조가 이곳에서 수도를 삼았었다.
낙양이 가장 번영했던 것은 장안(지금의 서안)이 도읍이었던 당나라 때이다. 서안이 정치의 도시라면 낙양은 예술의 도시로 전국시대의 노자, 당대의 두보, 이백, 백거이 등 많은 문인과 예술가가 이곳에서 활약했던 곳이다.
이곳은 중국 정부가 맨 처음으로 지정한 역사문화의 도시이자 7대 고도(七大古都)중의 하나로서 풍부한 인문경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찬란한 문화유산들이 낙양을 역사도시로서 더욱 빛나게 해주고 있다.
또한, 그 역사만큼 수공업제품의 수준 역시 매우 뛰어난데 당삼채(唐三彩), 궁등(宮燈), 방청동(傍靑銅) 등의 제품이 매우 유명하다.
▲점심식사 -메뉴 중에 자장면이 있다.
[관광8]용문석굴(龙门石窟)
뤄양하면 역시 용문석굴이다. 용문석굴과 감숙(甘肃) 돈황막고굴(敦煌莫高窟), 산서(山西)의 대동(大同) 운강석굴(云冈石窟)은 <중국 3 대 석각예술 보물고>라고 불린다.
2000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룽먼석굴은 뤄양(洛陽) 남쪽 13km 지점에 있다. 석굴이 있는 이췌산[伊闕山]은 이하강을 사이에 두고 서산(西山)과 동산(東山)으로 갈라진다. 입구에서 석굴 쪽을 바라보면 서산과 동산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와 이하강이 흐르는 모습이 마치 하나의 문처럼 생겼다. 수나라 때부터 이를 ‘용문(龍門)’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용문(龙门)은 교통 요충지에 위치하고 산 좋고 물 맑고 기후가 적합해 문인 묵객들이 즐겨 나드는 명승지이다. 또한 바위의 석질이 좋고 조각에 알맞아 옛사람들은 이곳을 선택해 석굴을 파기 시작했다.
석굴과 불상을 만들어 놓은 솜씨는 조각예술의 정점이다. 석굴과 주변 경관이 어울려 중화민족의 발원지라는 허난성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 준다.
용문석굴은 북위(北魏) 효문제가 493년 대동으로부터 낙양으로 천도한 다음부터 석굴을 만들기 시작하여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隨), 당(唐)으로 이어졌고 송(宋)나라에서 마쳤다. 400년에 걸쳐 완성했는데, 주요 부분들은 5세기 말에서 7세기 말에 이르는 불교미술의 전성기에 만들어졌다. 석굴의 약 30%는 북위시대에, 60% 정도는 당나라 때에 조각됐다.
▲향산으로 이어지는 용문대교 - 이하(伊河) 강 건너 동산(東山)에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무덤 ‘백원’과 그가 18년간 살았다는 ‘향산사’가 고즈넉하다.
이하(伊河)의 양안에 있는 용문산(龍門山)과 향산(香山)의 암벽에는 1천3백52개의 석굴이 1km나 뻗어 있고, 불상 10만여 개, 비문 30만자나 남았다. 그 중 빈양(宾阳)의 중동(中洞), 봉선사와 고양동(古陽洞)이 가장 대표적이다.
△빈양북동(宾阳北洞)
△빈양중동(宾阳中洞)
△빈양남동(宾阳南洞)
작은 석굴 속 벽 전면에 빽빽하게 새겨져 있는 불상들이 나타난다. 만불동은 만개나 되는 불상이 석굴의 삼면에 바둑판 모양으로 나열되어있는데 저마다 치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불과 수cm의 작은 크기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모습의 불상들이 상하 좌우할 것 없이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새겨져 있다.
룽먼석굴에서 아쉬운 것은 곳곳에서 많은 불상들의 목이 잘려나갔다는 것이다. 도굴꾼들에 의해 해외로 팔려 나간 것도 있고,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혁명 시기에 훼손된 것도 있다. 인간의 욕심이 최고 경지의 예술에 큰 흠집을 내고 말았다.
2cm가량의 작은 불상부터 10m가 훨씬 넘는 불상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섬세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봉선사(奉先寺)동에 이른다.
용문석굴은 주로 북위시기와 당대 측천무후(武則天)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규모가 가장 크고, 유명한 굴이 측천무후시기에 만들어진 봉선사 석굴이다. 봉선사는 용문석굴 중에 가장 큰 동굴로서 길이, 너비가 30여m 당나라(기원 618∼904년)의 석각의 예술을 대표한다.
봉선사의 구조는 부처 하나, 제자 둘, 보살 둘, 천왕 둘 등 10m가 넘는 거대한 불상 9개로 이루어져 있다.
9개의 불상 가운데 특히 빛나는 것은 역시 중앙의 본존불인 ‘노사나대불(盧舍那大佛)’이다. 높이 17m, 머리 4m, 귀가 1.9m인 대불은 은은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얼굴은 동그랗고 눈은 아래를 내려다봐 대불을 만나러 온 관광객들을 굽어 살피는 듯하다.
이 불상의 공사를 언제 시작했는지 자세한 역사기록은 없지만 당나라 측천무후가 공사를 열성적으로 지원해 675년 완공됐다. 이 때문에 대불이 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의 모습을 모델로 조각됐다는 설도 있다.
로사나 불상은 풍만하고 우아하여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다. 그녀의 두 눈길은 참배자가 올려다보는 눈길과 마주치는데 사람들에게 마음의 움직임이 생기도록 하는 무궁한 예술 매력을 가진다. 좌우에는 제자인 아난(阿难), 가예(迦叶) 보살과 금강(金刚)과 신왕(神王)의 조각상이 엄숙한 표정으로 서있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 높은 벼랑에 이와 같은 엄청난 조각을 새겨놓은 고대 중국인들의 노력과 기술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관광9]관림당(關林堂)
관림은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의 의형제 관우장군의 머리가 묻힌 곳이다. 중국의 무덤은 일반인은 ‘묘’, 왕은 ‘능’으로, 성인은 ‘림’으로 써왔다. 관우는 공자의 무덤이 공림으로 불리듯 같은 성인의 반열로 대접받고 있는 것이다.
219년 겨울 촉(蜀)의 장군이었던 관우는 오(吳)나라 손권(孫權)과 싸워 손권의 부하 장수 여몽에게 후베이성(湖北省)의 쉬안창(宣昌) 근처의 탕량(唐陽)에서 패했고, 손권(孫權)은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환심을 사기 위해 관우의 목을 잘라 보냈다. 이에 조조는 관우를 의사(義士)라 하여 제후의 예를 갖추어 이곳에다 극진히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뒤에 이곳에 후삼전(後三殿)이 세워졌다.
관림당에는 장대한 관우상 외에 역대 묘지의 비석 등이 전시되어 있고, 건물의 벽면에는 삼국지의 명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관우가 사용하였다고 하는 3m 정도 되는 칼도 있다.
△소원나무
후삼전의 뒤에는 팔각의 붉은 담으로 둘러싸인, 관우의 머리를 묻었다는 무덤이 아직도 남아 있고, 이곳에는 뤄양오대석각예술관(洛陽五代石刻藝術館)이 있다.
△간식-중국 호떡(1元/개)
이동하는 버스 안은 입담 좋은 유선생에 의해 웃음꽃이 핀다. 만만디. 중국 여행에 조금씩 익숙해진다.
화산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짙은 안개로 톨게이트 통행을 막는다. 국도를 타고 이동하다 안개가 옅어져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삼문협(三門峽 싼먼씨아)
삼문협은 황하 중류의 협곡으로, 황하가 섬서성과 산서성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 남행길을 막고 선 진령산맥(秦嶺山脈) 때문에 오른쪽으로 갑자기 꺾여 서에서 동으로 물길을 90도 바꿔 흐르는데 'ㄴ'자 꺾이는 부분이 삼문협이다.
삼문협은 전설의 치우 황제가 황하를 가로막고 있던 산을 몇 조각으로 나누어 지류를 만들었는데, 산 사이의 흐르는 물이 마치 세 개의 문을 지나는 것과 같다하여 삼문(三門)이라 부르게 되었다. 삼문은 각기 귀문(鬼門), 신문(神門), 인문(人門)이라 불렀다.
△예정 시간보다 늦어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일행 중에는 현지식 대신 컵라면으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화산 숙소
'여행스케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대륙을 가다 8탄(4)-역사의 도시 서안 (0) | 2009.03.03 |
---|---|
중국대륙을 가다 8탄(3)-중국 오악중 서악 (0) | 2009.03.02 |
중국대륙을 가다 8탄(1)-하남성의 성도 정주 (0) | 2009.02.24 |
중국여행 기초자료 (0) | 2009.02.11 |
제주도 1박 2일 (0) | 2009.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