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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맥 길따라

금북정맥15(윗갈치-강실고개)

산행일시 : 2009년 1월 18일(일)-19명

산행코스 : 윗갈치-비룡산-금강산-장군산-물래산-오석산-강실고개


복되고 즐거운 일이 많은 조짐(상서로운)의 땅 서산은 태초부터 좋은 이름을 지녔다. 1천2백 년 전 마한의 56개 속국 중 하나인 치리국으로 탄생한 서산은 미리부터 오늘의 서해안시대를 예견한 느낌이 짙다.


풍수지리상 옥녀탄금형(선녀가 비파를 타는 형상), 금학 포란형(금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길지에 속하는 서산은 주산 옥녀봉의 그늘 아래 나래를 펼쳤다. 옥녀봉이란 선녀가 산다는 선경을 의미한다. 즉 속세를 떠난 청정한 곳을 말하며 우리나라에는 강원도 고성군, 경남 함양군, 전북 진안군 등 7∼8곳 뿐인 명당이다.


서산의 터전이 된 옥녀봉은 예로부터 유택길지의 명당을 지녔으며 이 자리에 묘를 쓰면 입신양명하여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전해왔다. 그러나 옥녀봉에 묘를 쓰면 개인은 잘 될지 모르지만 서산주민 모두에게 화가 닥친다고 하여 서로 감시하여 왔다. -서산시청 홈페이지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들어서자 굵어지는 빗줄기가 마음을 누른다. 행남도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하였다가 산행들머리인 윗갈치로 향한다. 윗갈치에 도착하자 다행히 비가 그친다.

 

9시30분. 하차하여 도로를 건너가면 ‘瑞寧亭’ 이라 적힌 커다란 표석이 있다. 서녕정은 서산궁도장이다. 단체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서녕정 표석 뒤편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서산시사격장’이라 쓰인 건물 뒤 산으로 들어선다.


 




이번 구간은 해발 316.1m 금강산이 가장 높다. 그 만큼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은 순탄한 능선길이다. 팔봉산은 정맥에서 3km 정도 벗어나 있으나 산경표에는 이를 포함했다.






유순한 산길이 이어지고 20분 정도 진행하면 뭉개진 삼각점이 박혀 있는 169.9봉을 지난다. 분위기는 호젓한데 오른쪽 채석장에서 돌을 깨는 요란한 소음이 한동안 계속된다.


개념도상 솔개재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그냥 지나쳤다. 산책로 같은 부드러운 길이 이어진다.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끌더니 갑자기 숲이 터지면서 잔자갈이 깔린 임도에 내려선다.




임도(202m)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임도에서 올라서면 대산지맥이 갈라지고 임도에서 10분 정도면 ‘비룡산(飛龍山)’에 닿는다. 가지치기 작업으로 표지판이 쓰러져 있어 한림정님이 다른 나뭇가지에 옮겨단다.








마전과 용암을 잇는 시멘트 포장된 넓은 고갯길로 내려선다. 집뿌리재 (171m)다. 건너편 절개지 비탈위에 큰 정자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금강산을 오르다보면 커다란 바위를 뚫고 나온 벚나무가 강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벚꽃 피는 계절에는 멋진 그림이 될 것 같다.


넓게 열린 수레 길을 따라 느긋하게 능선에 올라서니 찌그러진 양은냄비가 걸린 봉우리에 굵은 삼각점 (△서산27)이 박혀있다. 이번 구간의 최고봉 금강산(316.1m)이다. 서산문화원의 설명은 지형도상 금강산과 장군산은 이름이 서로 뒤바뀌어 있단다. 지형도상 금강산이 실제 장군산이고, 장군산은 금강산이란다.




팔봉지맥은 여기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산경표에는 금북정맥에 팔봉산을 포함시켰으나, 정맥 마루금에서는 3km정도 벗어나 있다. 빼어난 자태를 외면할 수 없어 팔봉산을 산경표에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갈비 푹신하게 밟히는 안부를 지나 오르면  장군산이다. 장군산 (210m)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바위들이 눈길을 끌 뿐 조망도 없고 별다른 표지도 없다. 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한다.




200봉을 지나면 쏟아질 듯한 급경사 내리막길이다.  길을 보고 내려가면 예비군 훈련장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수량재 (70m)에는 32번 국도로는 차들이 질주한다. 건너갈 일이 난감하다. 차가 없는 틈을 타 중앙분리대를 넘는다. 비탈을 올라서면 널찍한 밭 터이고 숲으로 들어서면 솔밭공원 같은 분위기다.



△도로를 무단횡단하여 산비탈에서 뒤돌아보면 금강산이 눈에 들어온다.
 

농가에서 오른쪽 숲길로 들어서 버섯재배지를 지나 무슨 건물을 짓기 위한 기초 공사가 진행 중인 어수선한 비탈을 잠시 오르면 삼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바로 물래산(145m) 이다.


우측으로 꺾어 내려간다. 울창한 숲속에 비교적 길은 뚜렷하다. 숲길인데 차소리가 그리 멀지않게 들린다.








이곳에서 부석지맥이 갈라진다.




비탈을 다 내려서고 밭 갓길을 따라 걷다보니 32번 국도 지하차도를 지난다. 수량재에서 차로 5분 거리를 한 시간 정도 걸었다. 오른쪽으로 팔봉산이 우람한 자태를 드러낸다.




팔봉중학교정문 == 팔봉중후문(우회전) == 공동묘지 == SK텔레콤 통신탑 == 10m직진후우회전(삼원조경안내판) == 시멘트 농로 따라 100m진행하면 좌측==1Km전방에 굴포 운하 안내판, 구세군교회 등이 보임 == 과수원5m전에서 우회전 == 비포장농로10m 내려서면서 좌회전 == 대나무밭 아래 통과 == 굴포 운하지 (동절기에는 건널 수 있지만 하절기엔 저지대 늪지역으로 통과 곤란) == 좌회전으로 운하타고 약 100m진행하다 묘목과 과수원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좌회전하면(비닐하우스) 도로가 나옴 == 대형 굴포운하 안내표지판==소형안내표지판(원칙적으로는 여기서 우회전하여 능선을 찾아 붙어야 하지만 거의 불가능하므로 그냥 도로 따라 진행) == 구세군진장영문 == 인평3리 마을회관 == 마을 앰프탑 == 도루째 정류소5거리 == 파란색 기와집의 우측으로 진행(대상사료기가 보임) == 시멘트 도로 따라 계속 진행하다 마을이 끝나는 지점의 도로 곡각지점에서 좌회전(비닐하우스 있음) == 10m지점에서 우회전하여 밭고랑 사이로 진행 == 밭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회전 밭뚝을 타고 건너섬 ==시멘트 도로에서 좌회전 10m진행하다 바로 우회전(갈매기교통표지판) == 도로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 건너편에 볼록거울이 보임 == 볼록거울(교통안전시설)== 삼거리에서 좌회전 사거리 이정표 보임 == 북창사거리(슈퍼) == 오른쪽 도로로 진행== 개간지를 타고 올라서면 정상적 산행이 시작됨

-서산 괜차뉴님의 안내-


 

팔봉중학교 뒷문을 나서면 금북정맥의 마지막 행정구역인 태안군으로 들어간다. 학교 뒷문으로 나가 밭 뒤쪽 능선이 마루금이지만 그냥 시멘트 포장 길을 따르기로 한다. 


공동묘지를 지난다.








이동통신 철탑까지 진행하고 계속 길을 따르면 [삼원조경] 간판이 걸린 삼거리다. 길이 너무 아래로 꺼지는 듯 하지만 별수 없다. 그 답은 곧 나온다.


길가 저장 창고에 문이 열려있고 잘 익은 사과가 걸음을 멈추고 유혹한다. 시식용 배와 사과를 맛보니 꿀맛이다. 적혀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하니 바로 옆집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나오신다. 4만원에 20킬로그램을 사서 4명이 나누어 배낭에 담으니 무겁다. 곧 후회가 밀려온다.


굴포의 유래와 안내도가 있다. 마루금은 바로 우측(북)에 보이는 나지막한 능선이다. 그 곳은 운하를 파낸 곳이라 마루금이 끊겨있다.



굴포운하지(堀捕運河址) 


우리나라 운하사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명되는 굴포운하는 천수만으로 유입하는 흥인천과 가로림만과의 약 3km에 달하는 지역을 착통하는 운하를 말한다.


굴포운하를 개착하게 된 요인은 삼남지방의 세곡미를 서울로 조운함에 있어 조운선단이 태안반도의 안흥량 관장항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안흥량은 서해안상에 돌출한 장봉으로 해중에 암초가 있고, 또한 급격한 조류로 인해 빈번히 조운선이 전복되고 파선으로 인하여 국가적인 재정손실이 컸다. 그리하여 세곡미의 안전수송과 조운에 따른 지리적, 시간적 거리를 단축시키려고 지금의 굴포운하 개착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려 인종 때(1123~1146)부터 굴포를 개착하여 조선중기 임진왜란 직전까지 비록 단속적이기는 하였지만 실로 400여년간 수천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운하공사를 계속하였으나 개착지의 지질이 화강암층이라 당시의 기술로는 암석을 뚫지 못한 사회적 사정과 높은 간조의 차를 극복하지 못한 자연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성공치 못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재원이 세곡미라는 당시의 사회적 사정으로 말미암아 조선 현종때에는 굴포개착지 주변에 많은 조창(漕倉)들을 설치하여 조운의 편의를 도모하였으나 조운행정에서 야기된 문제들로 인해 폐창하고 말았다. 비록 설창육운안(設倉陸運案)의 실행은 실패로 끝났지만 조세창고지와의 관련으로 인해 천수만과 가로림만의 해로를 따라 많은 창촌락이 발생, 발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펌]











밭에 수확을 포기한 배추와 무가 얼어 그냥 버려져있다. 이럴 수밖에 없는 농부의 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계속해 마을길을 따라가면 북창 버스정류장 사거리에 작은 구멍가게가 있다. 현재도 남아있는 주변의 하창, 상창, 북창이란 마을이름 역시 예전의 굴포운하지와 관련된 창고마을이다.






사거리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오석산을 바라보면서 붉은재로 향한다. 팔봉중학교에서 4km 가량을 산길이 아닌 마을길로 걷는다.


시멘트 길에서 벗어나 비로소 본격적인 산길로 들어서 숲속 길로 올라간다. 그리 높아 보이지 않던 오석산도 전위봉이 있다.


오석산(烏石山 △169m)은 잡목에 덮인 봉우리다. 삼각점도 다 뭉그러졌고, 산불감시초소마저 숲속에 버려 놓은 듯 아무런 역할도 못한다.




그대로 지나쳐 20여분을 내려오면 강실고개 (79m)에 닿는다. 원산후와 고일간을 잇는 시멘트 고갯길인데 오른쪽 마을의 이름을 따라 강실고개라 한다. 약 6시간 30분 소요


뒤풀이 : 바지락 칼국수(새벽안개+남실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