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 2008년 12월 21일(일) -20명
산행코스 : 금북정맥13구간 나본들고개(45국도)~뒷산~한티고개~470봉~가야봉(677.6m)~석문봉(653m)~일락산(521.4m)~육각정~목장초지~상왕봉(307.2m)~206봉~삼화목장 3거리(정문)~가루고개(647지방도)
충남 10대 명산을 높이 순으로 열거하면, 서대산(西大山·903.7m), 대둔산(大屯山·878m), 계룡산(鷄龍山·845m), 오서산(烏棲山·790.7m), 진악산(進樂山·732.3m), 광덕산(廣德山·699.3m), 성주산(聖住山·680.4m), 가야산(伽倻山·677.6m), 식장산(食欌山·623.6m), 칠갑산(七甲山·560.6m)이 된다. 가야산은 예산군과 서산시의 경계에 있고, 경남 합천 가야산과 이름이 같다.
아침식사를 위해 차동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한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8시 45분. 금북정맥 개념도상 나본들 고개(고려 한식 뷔페 간판) 가야산 한방 장수마을 식당주차장에서 하차한다.
나본들 고개 지명의 유래를 검색했지만 찾을 수 없다. 혹 금북정맥 후기를 처음 남긴 사람이 남은들 고개를 잘못 쓰고 이후로는 별다른 생각 없이 사용하면서 굳어지는 듯하다.
광돌리와 사천리 그리고 현내면의 대티리 일부를 병합하여 광돌과 사천의 이름을 따서 광천리(廣川里)라 하였는데, 남은들은 광천리의 옛 이름이다. 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연천 남송정에서 덕산 가야산으로 옮길 때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그 지방 주민으로 상여를 메게 하여 릴레이식으로 500리를 운구하고, 마지막 ‘남은’ 구간은 덕산 광천리 주민들로 하여금 메도록 하였는데 주민들이 극진히 모셨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운구한 상여를 광천리 마을에 주었다. 이후 마을 이름을 ‘남은들’이라 부르고 그 상여를 ‘남은들상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8시 50분. 가야봉과 원효봉을 배경으로 단체기념 사진을 찍고 막 바로 절개지를 치고 오른다. 예쁜 펜션을 지나 밭 가장자리로 진행하다 잡목지대로 들어간다. 급경사를 헉헉거리며 오른다.
능선으로 오르면 길이 갈라진다. 지도상 뒷산이라는 표시된 곳으로 올랐다가 20m정도 되돌아와 오른쪽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잡목 숲으로 내려간다. 서산 괜찬뉴님이 갈산지맥과 뒷산 표지판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았다.
건너편 채석장의 흉한 모습을 목표 삼아 한티고개로 내려선다. '한티'라는 이름은 순수한 한글이다. 한자로 쓰면 큰 고개라는 뜻인 '대치(大峙)'가 된다. 고개가 있는 지역의 마을에 붙는 흔한 이름이다. 지금도 한티재, 한티고개 등의 이름이 있는 지역이 전국적으로 많다.
이 곳 한티고개는 1790년부터 1880년까지 내포지방에서 주님을 배교하기보다는 기꺼이 죽음을 택한 3000여 무명 순교자들이 매질과 압박 속에서도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며 넘던 고개다.
너른 공터에 원두막형태의 쉼터와 나무 십자가 보인다. 제1처 사형선고 받으심 또 한 개는 좌측 내려가는 길에 제2처 십자가 지심이라고 쓰여 있고 해미순교성지 팻말이 보이며 성지로 오르는 길이 잘 나 있다.
채석장으로 산의 반쪽이 나가버린 412봉을 오른다. 벼랑 위로 진행해도 되지만 안전을 위해 오른쪽 산허리를 돌아 능선으로 올라 진행한다. 너른 묘가 잘 가꾸어져 있고, 내포평야의 너른 들이 시원스럽게 펼쳐지며 그 너머로 서해바다가 아스라이 조망된다.
412봉부터는 능선이 확실하게 잘 발달되어 있다. 상당히 긴 능선이 온통 키 작은 잡목 숲이며 타고남은 소나무와 참나무 잡목들이 산불지역임을 알려주고 있다. 왼쪽 산 아래에 한서대학이 있다.
바위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보면 해미읍의 전경과 나본들 고개에서 덕산으로 이어지는 45번 국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급경사를 오르면 활공장이 나온다. 시원스런 조망이 펼쳐진다. 오서산과 덕숭산 등 지나온 정맥길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백두대간 속리산 천황봉에서 경기도 안성까지 흘러 온 한남금북정맥이 칠현산에서 한남정맥(漢南正脈)과 금북정맥(錦北正脈)이 갈라진다. 한남정맥과 결별한 금북정맥은 서남으로 흘러와 청양, 보령, 홍성 지경에 제 1봉 오서산(烏棲山, 791m)을 솟구치고, 북서로 치달으면서 종착점 태안반도 끝 안흥진(安興鎭)에 이르기 전 정맥의 끝자락에 ‘내포(內浦)들판의 우뚝한 전망대’로 솟구친 산이 가야산이다.
금북정맥 마루금 위의 산으로는 오서산(791m) 다음 제 2봉이고, 예로부터 호서지방(湖西地方) 제일의 명산이요 명승지로 꼽던 곳이다.
백제 때는 중국 강남지방에서 바다를 건너 온 불교가 제일 먼저 정착한 곳이다. 서기 475년 백제가 한강변의 수도를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공주로 천도한 이후 중국과 교류하는 통로가 태안반도로 바뀌게 되었다. 이 때 태안-서산-덕산-공주-부여로 통하는 길을 ‘백제고로(百濟古路)’ 라 하는데 가야산은 백제고로의 첫 기착지다.
가야산(伽倻山)의 최고봉은 ‘가사봉(袈裟峯)’이다. 가사는 스님이 입는 옷이다. 경남 합천에 해인사를 안고 있는 가야산과 한글, 한자 표기가 같은 것은 양자 모두 불교와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주봉인 가야봉(677.6m)을 중심으로 원효봉(677m), 옥양봉(621.4m), 일락산(521.4m), 수정봉(453m), 상왕산(307.2m)등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다.
주변에 시야를 막을 만한 높은 산이 없어 조망이 뛰어나고 일몰 경치 또한 멋지다. 최고봉인 가사봉은 현재 여러 통신시설물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대신 가사봉에서 북쪽으로 1.6km 떨어진 능선에 솟은 석문봉(石門峰·653m) 정상이 서해 낙조 조망대 역할을 한다.
열려 있는 철조망 문으로 들어선다. 조금 이른 점심식사를 위해 바람을 피해 자리를 편다.
식사 후 아이젠을 착용하고 진행한다. 최근에는 체인 아이젠이 대세다. 돌아서 암능을 넘는다. 능선에 서면 가야봉 0.42km 석문봉 1.23km 이정목이서 있다.
높이는 700m가 못 되지만 예당평야 한가운데 있어 그 위용이 더욱 돋보인다. 석문봉에서 가야산 정상까지 5리 능선 길을 걸으면서 동쪽으로는 드넓은 예당평야가, 서쪽으로는 천수만과 태안, 서산, 해미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통나무 계단길을 내려가 너덜 계단을 오르면 조그만 바위 위에 커다란 바위가 덩그렇게 올라앉아 곧 굴러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바위가 나온다.
아슬바위를 지나면 또 까만 이정목이 서 있다. 쉼터를 지나면 곧 바로 석문봉 릿지길이 시작된다. 그 다지 위험하지 않다. 석문봉까지는 왼쪽으로 서해바다를 감상하며 걷는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석문봉 정상은 너른 암반이다. 1998. 9. 6. 예산산악회에서 세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앞면에 가야산 석문봉 653m 뒷면엔 내포의 정기가 이곳에서 발원한다고 쓰여 있다.
그 옆으로 돌탑이 하나 있다. 석문봉을 내려서면 갈림길이다. 왼쪽 일락산과 옥양봉 능선이 V자를 그리며 쭉쭉 시원하게 뻗으며 그 사이에 있는 계곡이 길고 긴 용현계곡이다. 오른쪽은 석문지맥길이다. 정맥길은 왼쪽 능선 일락사쪽으로 향한다.
조금 진행하면 또 대곡리 석문봉 일락사 갈림길 이정표가 보인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는 오른쪽으로 우회해서 내려가면 좌우로 도로가 내려다보이며 파고라 밑에 탁자가 있다. 앉아서 쉬기 좋다.
일락사로 내려가는 임도가 갈라지는 넓은 공터에서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른다. 쉼터가 있는 일락산 정상을 지나 약 1km정도 진행하면 보원사지터 이정표가 보인다.
가야산 북쪽 끝자락,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보원사지는 중국에서 서해를 건너오면서 항해에 지친 승려들의 휴식처나 기도처로서 그 역할을 하였으며, 절은 없어졌지만 유적 석조(石槽), 당간지주, 5층 석탑, 법인국사보승탑, 법인국사보승탑비 등 5개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육각정 정자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넓은 임도를 따라 빠르게 진행한다. 개심사방향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에는 표지가 되어 있다.
가야산을 이야기 하면서 남연군묘(南延君墓)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연군은 흥선군(興선君) 이하응(李夏應)의 아버지 이구(李球)이다. 원래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 땅 남송정에 있었는데 흥선군은 남연군의 묘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헌종 10년, 남연군이 죽은지 9년 째, 흥선군 나이 25세 되는 해에 흥선군은 지사(地師: 풍수) 정만인에게 간청해서 ‘이 곳이 2대가 왕 위에 오를 수 있는 명당’이라는 것을 듣고 현장에 와 보니 1400년 고찰 가야사가 앉아 있었고, 정만인이 지적한 자리는 가야사 마당으로 5층석탑인 금탑(金塔) 자리였다. 금탑도 금탑이려니와 이를 지키듯이 내려다 보고 있는 가야사 보웅전(普雄殿) 때문에도 묘를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일대 땅 주인이자 고을 최고 부자인 윤석문(尹石門) 집안 종손에게 간청해서 금탑 서북쪽 400m 떨어진 구광(舊壙)이라는 곳에 부친 남연군의 묘를 쓰도록 허락 받았다. 당시 흥선군은 정2품의 종친 귀공자에다가 궁중 살림을 총관장하는 도제조(都提調)였으니 윤씨 집안에서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구광터로 남연군 묘소를 이장한 흥선군은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에게 압력을 넣어 덕산현감으로 하여금 가야사에 승려들이 살지 못하도록 하여 폐사를 만들어버린다. 그 다음해에는 보웅전에 불을 질러버리고, 또 한 해가 지나 금탑마저 허물어 버리고, 구광터에 있는 남연군 묘를 금탑 자리로 옮긴다.
남연군 묘를 옮긴 지 7년 후 차남 이명복(李命福)을 낳았는데 그가 열 두 살 되는 해에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오른 고종(高宗)이다.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묘를 도굴했는데 관에는 손을 못 댄 채 돌아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쓰게 되고,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처님의 자취가 서려 있는 중인도 지방에 지금 가야라고 부르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붓다가야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가야산이 있는데 이 가야산을 상두산이라 하였으니 산꼭대기가 코끼리 머리와 비슷한 형상이어서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가야산, 상왕산에 자리 잡은 개심사는 불타의 정각을 따라 깨달음의 마음을 열라는 뜻에서 지은 절 이름이다.
(월간산 2005년 04월호에서 발췌)
서산마애삼존불로 내려서는 갈림길에는 선답자들의 표지리본이 주렁주렁 매달려 바람에 펄럭인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돈다. 능선을 따라 진행하다보면 오른쪽 멀리 서산마애삼존불이 보인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국보제84호)’은 서기 600년 경 백제 말기(법왕-무왕)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래입상(如來立像)을 가운데로 하고, 왼쪽에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의 보살좌상(菩薩座像), 오른쪽에 보살입상(菩薩立像)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마애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통일신라 때는 나라의 서쪽을 지키는 요새 서진(西鎭)으로 매년 이 산에 특사를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한다. 불교가 한창 융성할 때 가야산 동쪽 기슭 지금의 남연군묘가 있는 자리에 99개의 암자를 거느린 가야사(伽倻寺)가 있었다.
서산마애삼존불 남쪽 보원사지 주변에 있었다는 백암사지는 가야사 예하의 100번째 절인데 ‘이 골 안에 100개 절을 채우지 말라’는 계시를 어기고 절을 지었기 때문에 모두 망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가야산 가사봉 동남쪽 연봉의 하나인 원효봉 중턱에는 원효대라는 전망대가 있고 절터가 있는데 신라 원효대사가 이 절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쓴 원효결(元曉訣)에는 ‘오성지간(烏聖之間: 오서산과 성주산 일대)는 산 모습과 물줄기가 가장 뛰어나 나라의 내장부(內腸部)와 같다 하여 내포(內浦)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효대사가 ‘내포(內浦)’라고 한 곳을 살펴보면 금북정맥 서북쪽 아산만과 천수만 사이로 아산, 당진, 예산, 서산, 홍성, 보령과 청양의 일부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내포들을 굽어보는 세 개의 산이 가운데 오서산, 남쪽에 성주산 그리고 북쪽에 가야산이다. 지금도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 영역을 ‘내포문화권(內浦文化圈)’이라 부르고 있다.
이렇게 가야산은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지만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가 융성하던 조선조에도 춘추로 나라에서 제를 올린 산이기도 하다. (월간산 2005년 04월호에서 발췌)
이국적인 풍경의 넓은 초지가 시원스럽다. 개심사의 주산은 상왕산이다. 지금은 개심사 뒤편 그러니까 북쪽으로 십리 남짓한 거리에 솟은 봉우리를 상왕산이라 하고 개심사 남쪽으로 석문봉과 이어져 가야사 옛 터를 안은 주봉을 가야산이라 하지만, 사실 가야산과 상왕산은 같은 뜻이다.
목장 철조망에 매달아 놓은 선답자들의 리본은 천태산 들머리에서 본 모습을 연상시킨다. 또 다시 넓은 초지가 펼쳐진다. 개념도상 206봉은 과거 김종필씨 소유지였던 삼화목장으로 커다란 왕릉을 연상시킨다. 파란 초지가 한겨울에 색다른 풍광을 만든다.
오후 4시 30분 가루고개로 내려서면서 약 7시간 30분간의 산행은 끝이 난다.
서산시 운산면 소중 1리 마을 표석이 보인다. ‘가루고개’라고 하는 우리말 이름의 한자지명은 갈현(葛峴)이다. 지명유래를 찾아보면 모두 칡과 관련된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자로 지명을 표기하는 과정에서 ‘가루’나 ‘갈’을 갈(葛)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또, 가루고개(갈우고개)는 ‘가로 넘어가는 고개’ 라는 뜻이며, 가로→가루→갈우 로 변화된 것으로 어느 특정한 위치에서 볼 때 능선이나 계곡과 나란히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으로 생각된다.
먼저 산행 종료한 청계고문님이 준비한 김치찌개는 정맥꾼들의 배고픔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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