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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27. 허공달골-두류능선

산행일 : 2007년 8월 26일(일)-지리산 30번째 산행


산행코스 : 추성리(광점동)~어름터~허공다리골~청이당재~국골사거리~영랑대 (1618m)~향운대~두류봉~추성리(7시간 30분소요)

 

동행 : 재넘이, 뫼오름, 신샘, 솔개, 강건너덕배, 별땅이, 시간여행

 

 

시산제 이후 반년 만에 산장나눔터 식구들과의 산행이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 4시 20분 버스에 오르자 재넘이님을 비롯한 산장나눔터 식구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버스는 남대전요금소에 진입하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린다.

아침 6시 함양휴게소에서 정차하여 아침식사를 하고 추성동으로 향한다. 일본북알프스 산행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88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지리산톨게이트를 빠져나간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마을의 유래에 대해선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편 ‘천왕봉 고성’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산속에 옛 성이 있는데 일명 추성(楸城) 또는 박회성(朴回城)이라 한다. 의탄에서 5~6리 떨어졌는데 우마가 갈 수 없는 곳이다. 안에는 창고가 있고 세상에 전해오기를 신라가 백제를 방비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 외 함양군 자료에 따르면 ‘추성리는 지리산 천왕봉의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가락국 양왕(구형왕)이 이곳에 와서 성을 쌓고 추성이라 하였으며, 또 박회성이란 성도 있는 곳으로 두 개의 산성지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혹은 ‘추성이라고 하는 길조의 별이 이 마을에서 볼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또 ‘추자나무’라고도 불리는 호두나무가 많아서 추성리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전해진다. 지금도 추성마을에는 호두나무가 많다.

 

추성 삼거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됐던 벽송사 방향으로 급경사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광점동이란 마을이 나온다. 예전에는 광주리점이라 했는데 현재는 광점동이라 부른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광점동 마을 끝부분까지 되어 있어 차로 손쉽게 오를 수 있다.

 


 

7시 광주리농원 앞 주차장에서 하차하여 간단한 산행 준비를 마치고 마을사이의 등산로를 따라 지리산에 든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산을 '오른다(登山)' 하지 않고 '든다(入山)'라고 했다. 산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그 산에 깃들어 사는 생명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든 밤에는 결코 산에 들지 않았단다.


산행 들머리는 광점동 광주리농원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열린다. 오른쪽 길은 옛 성안마을과 이어진 임도로, 두류봉 자락을 감싸고 있다.


갈림길에 누군가가 화살표로 허공달골 표시와 비지정등산임 위반시 벌금 50만원 이라고 적힌 나무판이 땅에 뒹군다.

▲별땅이님 촬영

 


 

허공달골은 골짜기가 넓어, 허공에 걸린 달이 아름답게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골은 허공다리 골로도 불리는데 이는 계곡이 마치 하늘에 걸려 다리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허공달골(일명 얼음골)은 하봉과 두류봉을 잇는 하봉능선과 쑥밭재에서 흘러내리는 Y자형 계곡이다. 광점동 마을을 지나면 오래전 삼국시대부터 "어름터"란 지명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름터의 어원은 국(國골), 추성산성터 등 함께 가락국 마지막 왕인 양왕이 이 일대를 요새화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즉 추성동에서 칠선계곡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두지터(뒤주터)는 쌀을 저장하던 곳이고, 어름터는 석빙고 같은 역할을 한 것 같다.


계곡이 둘로 나누어진다. 왼쪽 골이 쑥밭재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며 오른쪽은 하봉과 두류봉 사이의 계곡이다.


옛날 옛적 함양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쑥밭재를 넘어 산청(대원사 유평계곡)으로 오고 갔다.


그리고 5백 년 전 김종직 일행이 함양관가에서 출발, 의탄 마을과 추성동을 거쳐 이곳에 이르렀다가 잠시 쉬며 풍류를 노래했다. 당시 김종직 일행은 이곳 어름터를 거쳐 두류봉을 따라 하봉 능선으로 등반, 천왕봉에 오른 것으로 기록이 전해진다.


이 길은 지금은 거의 이용되지 않고 있으며 대신 추성동 뒷산인 영리봉(추성산성지)에서 두류봉∼하봉으로 오를 수 있는 등산로가 개설돼 있다.


7시 35분 어름터의 유일한 민가 임대봉씨의 집 마당에서 계곡을 건너 5분간 휴식을 취한다.


▲ 임씨는 현재 추성리 입구 의탄교 옆에서 '어름터 사랑채'란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다. 집 앞에(맞은 편 계곡쪽)는 청수당[聽水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쉼터가 있다.

 

 

애써 출입통제 경고판을 무시하고 시원스런 물줄기가 흐르는 왼쪽 계곡을 따라 20분 정도 오르자 합수점이다. 계곡을 건너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른다. 계곡물에 얼굴을 씻어보지만 그때 뿐 몇 걸음은 옮기면 금세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굵은 땀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 뚝뚝 떨어진다.


▲뫼오름님 촬영

 

10분 정도 진행하자 길 왼쪽에 의병장 석상용(石祥龍) 송공비가 보이고 10여분 더 진행하자 노송과 반석의 쉼터를 만난다. 초와 간식을 나누며 10분간 쉬어간다.


 

5분 정도 진행하자 두류암터로 추정되는 절터에 닿는다. 부도만이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인적 없는 고요한 숲속 나뭇가지 사이로 파고든 아침햇살이 신비로움을 더한다.


 

산행이 거의 끝날 때까지 곳곳에 며느리밥풀꽃 군락이 산길을 아름답게 수놓고 나그네들을 반긴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등산로가 마지막으로 계곡과 마주친다.


 

길은 고도가 더해지면서 점점 가팔라진다. 이곳부터가 얼음골 코스의 마지막 난코스에 해당된다. 하봉과 쑥밭재를 잇는 동부능선까지 가파른 길이 계속된다. 그러나 힘들다고 느낄 무렵이면 등산로는 오른쪽으로 꺾인다.  지리산 태극종주 길이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 진행하자 청이당 고개에 닿는다. 어름터에서 약 2시간소요.

 

청이당은 500년 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옛 당집이다. 청이당이 있던 이곳은 당시 산음(산청)과 마천을 잇는 가장 가까운 거리의 고갯마루 부근으로 제법 너른 공간과 마실 물이 확보돼 있어 마천사람들이 산음의 덕산장을 오가며 하룻밤을 묵었던 곳이다.

 

  이윽고 판자로 지은 청이당에 도착하였다. 네 사람이 각각 당 앞에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  여기서부터 영랑점(令郞岾)까지는 길이 극히 위험하였다. 이곳이 바로 『봉선의기』에서 "뒷사람은 앞 사람의 발밑만 보이고 앞 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만 보인다"고 한 곳이다. 나무뿌리를 휘어잡고서야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김종직의 두류기에서-

 

김종직은 당시 함양에서 오도재를 넘어 촉동-등구-의탄-얼음터-쑥밭재-하봉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고 한다.


왼쪽으로 1분 정도 내려서 계곡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땀에 찌든 런닝을 빨아 입는다. 이곳에서 비박을 하고 늦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네댓 명의 산꾼들이 주위를 어지럽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산을 사랑하는 산꾼이라면 부디 주위를 청결하게 하고 하산했기를.. 

 

20분간 휴식을 취하고 훨씬 가벼워진 발걸음을 이어간다. 조갯골로 올라 하봉에서 하루 비박하고 새재로 향한다는 도솔산인님 일행과 반가운 조우를 한다. 인사만 나누고 헤어져 각자의 길을 걷는다.


▲별땅이님 촬영

 

점점 가파른 오르막길을 30분 정도 올라서자 낯익은 국골 사거리의 팻말이 반갑다. ‘지리산 동부능선’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는 이곳까지의 소요 시간은 약 3시간 30분 정도.


국골 사거리에서 진행방향 정면, 즉 고개를 넘어가는 길은 국골로 이어지고, 왼쪽 오름길은 하봉을 거쳐 중봉,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 주능선이다.


 

15분 정도 휴식을 취하고 국골에서 진행방향의 오른쪽 바위봉우리를 올라 두류능선으로 들어선다.  두류능선 코스는 길이 뚜렷하고 산죽이 괴롭히지 않으며 가끔씩 바위지대를 지나야 하는 아기자기한 코스로, 향운대를 탐방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산길이다.


3분 정도 오르면 두류봉(1530m) 영랑대(永郞臺 일명 말봉)에 닿는다. 시야가 탁 트이는 바위지대로 멀리 만복대까지 조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두류(頭流)는 지리의 다른 이름으로 백두산이 흘러와 멈추었다는 뜻이다.


영랑은 3천여 명의 화랑을 거느린 신라 화랑의 우루머리로,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다하여 이렇게 부른다. 김종직은 영랑재(岾), 김선신은 영랑참(站), 유몽인은 영랑대(臺), 양대박은 영랑봉(峯)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오가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점에 올랐다. 함양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고 험준하였는데, 여기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이 올려다 보였다.


  이곳을 영랑점이라 부르는 것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인 영랑이 삼천 명의 문도를 거느리고 산수를 유람하다가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옆에는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는 소년대(少年臺)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혹시 그 소년은 영랑의 문도가 아니었을까. 나는 바위 귀퉁이를 감싸 안고 그 밑을 내려다보니 꼭 떨어질 것만 같았다. 따라온 사람들에게 그 곁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하였다. -김종직의 두류기에서-

 

 

3-4분 정도 진행하면 험한 바위 내리막길이 있고 다시 10여분 진행하면 밧줄이 매달린 바위 오르막길을 만난다. 밧줄을 잡고 올라서자 독바위와 새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7-8분 진행하면 오른쪽으로 갈림길이 보인다. 향운대 가는 길이다. 10분 정도 내려서면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약초꾼들이 기거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석굴이 보이고 그 옆에 빌딩 같은 바위가 버티고 있다. 향운대다.


 

향운은 구름향기란 뜻이니 즉 부처님의 말씀을 뜻한다. 지나가는 산꾼이 스님에게 “여기가 어디요” 물으니 스님이 자기 호인 “향운대 입니다” 해서 향운대가 되었단다. 믿거나 말거나...

 

정면으로 독바위가 눈에 들어오고 시야가 시원하다. 샘터 앞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한다음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온다. 왕복 30분 정도 소요.


 

갈림길에서 10분 정도면 해발 1432m 시루봉 (또는 도리봉으로 불린다.)에 닿는다. 아쉽게도 사방을 운무가 하얗게 덮어 시야를 흐트러지지 않는다.


 

등산화를 벗고 점심도시락을 펼친다. 20분간의 달콤한 점심식사가 끝날 무렵 운무가 벗겨지기 시작하고  발아래 짙푸른 국골, 칠선계곡은 숲의 바다로 출렁이고  초암능선과 창암능선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중봉과 천왕봉은 여전히 운무에 가려 위용을 감추고 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15분 정도 내려서자 석문 오른쪽으로 산길이 나 있다. 5분 정도 진행하면 껍질이 붉으면서도 미끈하고 단단하다 하여 적송(赤松)으로 불리는 낙랑장송 여러 그루가 시선을 잡아끈다.


 

적송사이로 난 등로는 칼을 들고 열병하는 사관생도들 사이로 지나가는 느낌이다. 산죽과 낙엽이 쌓인 호젓한 산길은 푹신푹신해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하고 계란버섯이 곳곳에서 시선을 잡아끈다.


 

바람 한 점 묻어나지 않는 조용한 숲길에는 매미의 울음소리 가득하고, 쑥부쟁이, 모싯대 등 들꽃만이 미소를 건넨다.


매미, 여름 한철을 아름답게 노래(실은 짝짓기를 위해 수컷매미가 암컷을 유인하는 울음소리)하기 위하여 무려 칠년 이라는 긴 인고의 세월을 애벌레로 땅속에서 묵묵히 죽은 듯이 지낸다. 천적인 기생충 때문이다. 수컷은 암컷과 짝짓기를 하고 죽고, 암컷은 알을 낳고 죽는다.


 

조망 좋은 쉼터에서 단체 기념사진도 찰칵. 별땅이님 애쓴다.

 

두류봉에서 1시간 30분 정도 내려서자 대나무를 엮어 출입통제 벽을 만들어 놓았다.

 

무슨 이유인지 튼실한 나무들의 나무껍질을 벗겨내고 약품을 발라놓았다. 나무껍질은 산 아래 민가 옥상에서 말려지고 있었다.

 

두 마리 검은 개가 마구 짖어대는 민가를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1분 정도 진행하다 길모퉁이에서 시멘트 포장 임도를 버리고 왼쪽 숲길로 접어들어 희미한 흔적을 찾아 20분 정도 내려서자 추성 주차장 위 정자에 닿는다.


 

계곡은 이미 수많은 피서객들 차지가 되어 알탕을 할 수 없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여 의탄교 밑에서 시원한 알탕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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