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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28. 도장골-거림옛길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산으로 꼽히는 지리산은 언제나 산꾼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다.


이름도 다양해

지리(智異: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뜻),

지리(地利: 지혜로운 문수보살이 불법 도량을 열어 중생을 계도한 곳이란 데서 유래),

두류(頭流: 백두산이 흘러와 멈추었다는 뜻, 또는 널리라는 뜻의 우리말 두루가 변하여 됨),

방장(方丈: 삼신산의 하나),

반역 또는 불복(조선 태조 이성계의 개창을 반대했다는 뜻),

적구(赤拘: 빨치산의 주무대에서 나옴)산 등으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인월 덕두봉부터 노고단까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5.5㎞의 주능선, 그리고 천왕봉에서 웅석봉까지 이어지는 능선길은 “지리산태극종주”라는 이름으로 준족의 산꾼들을 유혹한다.

 

산행일시 : 2007년 9월 9일 (일)

산행코스 : 거림-도장골-와룡폭포-촛대봉능선-시루(장군)봉-청학연못-음양수-거림옛길-거림

        

솟아오르는 태양과 덕유산 산줄기를 덮은 구름이 협연을 하며 하루를 연다.


8시가 조금 지나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단성톨게이트를 빠져나간다. 거림마을 까지는 약 30분 거리.


거림마을은 산청군 시천면사무소 소재지인 덕산을 지나 중산리 5km 못 미친 곡점에서 왼쪽 청학동 이정표를 보고 7km 정도 거슬러 오른 해발 600여m 의 깊은 산중에 있다.

 

'거림(巨林)'이란 이름은 오래 전 아름드리 거목들이 이 골짜기를 빼곡히 메우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거의 다 복구됐지만 일제 강점기는 군수용으로, 8·15광복 후에는 땔감으로 마구 베어져 한때 벌거숭이 계곡이 되기도 했다. 또한 한국전쟁 때는 토벌대와 빨치산과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대거 훼손됐었다.


거림골과 남부능선은 분단의 아픈 현실을 간직한 우리 근대사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1952년 1월 토벌대인 수도사단이 빨치산을 대성골에 몰아넣고 10여 일 동안 엄청난 화력공세를 폈음에도 불구하고 망실공비(亡失共匪) 정순덕이 산비탈을 넘어가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최후의 빨치산으로 남게 된 계기가 된 곳이 거림골이다.


8시 40분. 주차장에서 시멘트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세석대피소 6.0km>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길이다. 오른쪽에는 길상선사를 지나 1999년 신축한 거찰 <지리산 도장골 길상암>이 자리하고 있다.


 

왼쪽으로 틀면 솔바구식당 마당에 닿는다. 계곡 왼쪽 산길로 조용히 들어선다.  지리산은 도장골 , 목통골, 장당골, 조개골, 한신지계곡, 와운골, 국골, 단천골,  빗점골, 용수골, 중봉골, 세 개골, 통신골…. 등 수많은 계곡을 품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다수의 계곡은 법정 등산로가 아니라는 이유로 산행이 금지되어 있다.


 

1951년 이전까지 빨치산들에게 안전지대나 다름없었던 도장골(옛 이름 도량골 ; 수행처를 가리키는 불교용어)과 자빠진골(일명 엎어진뜰)은 모두 거림골에서 가지를 벌린 골짜기들이다.


도장골 이름의 유래에 좀 더 깊이를 더하면

고대어에서 [산]을 나타내는 말 중에 [달]이 있으며 [달]을 뿌리로 하는 말 중에 지역에 따라 모음이 변하면서 [닫] 혹은 [돋]이 있다.

돋 + 안쪽 골 > 돋의 안골 > 도�골 > 도잔골 > 도장골

결국 도장골은 산의 안쪽에 있는 골이라는 보통명사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도장골은 촛대봉과 멀리 연하봉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크고 작은 골짜기의 물줄기가 모여 거림마을까지 이어지는 계곡이다.


 

하동에서 화개장을 오가던 장꾼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밤늦은 장꾼들의 길을 밝혀주느라 도장골 대숲에선 등불이 훤히 비쳤다고 한다, 고마워서 낮에 가 보면 바위들이 옹기종이 앉아 있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도장골 하류의 두 명소라면 밀금폭포와 아랫용소다. 오른쪽 계곡으로 내려서면 밀금폭포가 있는데 길상사 스님이 워낙 까칠하다고 소문이 나서 빨리 벗어나고자 계곡으로 내려서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계곡을 건너며 식수를 취수하기 위해 설치한 호스를 잘 정돈하는 손길에는 남을 배려하는 따뜻함이 배어 있다.


밀금폭포 위 약 200m 지점에 있는 아랫용소는 등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계곡으로 가야 볼 수 있다. 소 위쪽에 작은 폭포가 있고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풍광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앞에 진행한 일행들은 대부분 그냥 지나친 듯하다.


 

1O분 진행하면 <이영회 부대 아지트(초소/은둔지)>안내판과 만난다.

안내판은 남부군 부사령관이었던 이영회 부대가 이곳을 중심으로 공비활동을 했다는 내용이며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남편을 찾아 입산하여 공비활동을 했던 곳이라 한다.


이영회는 1951년 5월 인민유격대가 남부군으로 재편될 때 부사령관을 맡은 인물로서 이영회가 직접 지휘한 부대는 여순사건 당시에 입산했던 구빨치산을 주축으로 산청군인민유격대, 진양군인민유격대를 통합하여 재편성한 빨치산부대이다. 이들은 거창이나 합천까지 활동범위를 넓히면서 가회지서, 대병지서 등에 대한 야간 기습공격을 하기도 하였다.


돌담을 쌓은 초소의 흔적이며, 그 위에 은둔지의 돌 흔적들은 우리의 쓰라린 역사이다.


 

도장골은 길상사 위 약 1.2km 지점에서 둘로 갈라지는데 왼쪽 지류를 흰돌골이라 부른다. 이 흰돌골 초입을 지나자마자 커다란 반석이 펼쳐진다.

 

산행을 시작한 지 50분. 반석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계곡을 건너 뚜렷한 산길로 안내하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반석 오른쪽 길로 진행한다.


맨 뒤에서 청산님과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엊그제까지 12일 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려 수량이 풍부한 계곡에는 곳곳에 그림같이 걸려있는 작은 폭포들이 향연을 펼친다. 조금이라도 높낮이가 있으면 폭포를 만들어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일행은 계곡을 건너 왼쪽 길로 붙는다. 계곡을 건너지 않고 계곡 오른쪽 뚜렷한 능선 길로 붙어 진행하다 혼자가 되었다. 벌초하러 온 주민이 페쇄된 등산로인데 “어디가요” 묻는다. “와룡폭포 갑니다”대답하니 조금만 더 가면 된다며 조심해서 가라고 한다.


 

길은 자연스레 계곡으로 이어진다. 커다란 바위 뒤쪽에 숨어있는 폭포 아래 반석에서 휴식을 취하고 일어서는데 뒤에서 일행들의 모습이 보인다.

♣청계님의 산행을 돕기 위한 손길에는 귀연 가족의 정이 듬뿍 묻어난다.

 

계곡 왼쪽 산사면 길을 따라 약 10분 정도 진행하자 수많은 세월동안 깎이고 닦여 반질반질하고 둥근 커다란 바위들을 타고 넘은 맑은 물줄기가 바위 아래로 떨어져 짙푸른 소(沼)를 이루었다. 지도상 표시된 윗용소로 짐작된다.


 

계곡으로 들어서자 눈앞에 장관이 펼쳐진다. 도장골의 명물 와룡폭포다. 들머리에서 약 2시간소요.


 

마치 다듬어 놓은 듯 한 암벽에서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는 도장골의 명물임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최근에 내린 비로 유량이 많아 물소리가 엄청나다. 지리산의 어떤 폭포에도 뒤지 않는 당당함이 느껴진다.


 

20여분 휴식을 취하고 와룡폭포 오른쪽 암반을 타고 오르면 도장골 원류와 촛대봉골이 갈라지는 지점에 이른다. 촛대봉골 갈림 지점은 뚜렷하다.



 

도장골의 모습은 점차 왜소해지기 시작하고 도장골 상류와 촛대봉골이 갈라지면서 촛대봉골로 등로는 이어진다.


 

오르막길은 아주 가파르다. 나뭇가지 사이로 시루봉(장군봉)이 보이고 그 뒤로 천왕봉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산죽군락을 지나면 길은 완만해지고 편안한 숲길이 이어지고 가파른 바위를 네발로 기어오르면 곧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시루봉(장군봉)에 닿는다. 산행 들머리에서 약 4시간 소요.


 

7월에 이곳에 올랐을 때는 농무로 전혀 조망을 할 수 없었는데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아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일망무제의 조망이 그야말로 감동이다.


팔을 뻗으면 촛대봉이 손에 잡힐 듯하고 뒤로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천왕봉도 멀지 않다, 남부능선 뒤로 산 그리메가 펼쳐지며 멀리 반야봉과 노고단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시루봉부터는 시야가 툭 트이고 시원한 바위전망대와 작은 암봉들이 연달아 이어진다.


 

잠시 내려가 촛대봉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청학연못을 찾아가는 길잡이가 되는 커다란 크랙 바위와 만나고 왼쪽에 오솔길을 따라 3-4분 내려서면 청학연못이다. 시루봉에서 약 30분 거리.


해발 1500m도 넘는 곳에 있는 청학연못은 자연 상태의 연못이 아니고 옛 선인들이 의도적으로 청학동의 이상향을 완성시키려는 의도에서 지형을 갖추려고 인공으로 조성한 연못이라고 한다.


 

청학(靑鶴)은 날개가 여덟이고 다리가 하나이며 얼굴이 사람같이 생겼다는 상상의 길조(吉鳥)로서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전설의 새로 전해진다. 이 새가 울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하여 옛 사람들은 청학이 사는 청학동을 신선의 고장이라 여겼다.


청학 연못의 길이는 대략 10-15m, 넓이는 대략 6-7m 정도 되며 깊이는 대략 1m내외로 짐작되는 타원형의 연못이로 대슬랩이 앞 물을 막아주고 또한 빗물을 모아두는 역할을 한다.


1879년 8월에 지리산을 다녀와서  [두류산기]를 남긴 <송병선>은  당시에 [청학연못]을 보고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중략....녹나무 상수리나무들이 고사해서 만들어진 마루의 대들보 같은 곳을 지나가니 와암(臥巖) 벼랑에 [鶴洞壬(학동임)] 3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근세에 설을 좋아하는 자의 일이다.


바위 아래는 작은 못이 축조되어 있다. 못 아래로는 샘이 있어 연수대(延壽臺)라 한다. 못 뒤로는 촉봉(燭峯)이 솟아있다. ]


학동임(鶴洞壬)이라는 각자는 연못에 뿌리박은 대슬랩 형태의 바위 오른쪽 상단 작은 소나무 아래에 새겨져 있다.


위의 [두류산기] 자료가 아니면 마지막 각자 [壬] 字 외 나머지 [鶴] 과 [洞]은 식별이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鶴] 字는 바위 부분이 깨어져서 파자가 된 상태이다.


 

회자되는 얘기에 의하면 연못에서는 심심찮게 용오름 현상이 일기도하고 연못 풍경을 찍을라치면 여태 문제없던 카메라가 갑자기 작동을 멈추는가 하면 갔던 길을 따라 다시 찾아오면 어디로 사라졌는지 연못이 보이지가 않았다고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하나 전해온다.

연못 주변에서 감자만 심어먹고 공부한 여감자란 사람이 연못을 팠다고 한다. 그곳에 청학동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고 믿고 치열히 수도하고 명상했지만, 결국 청학동엔 들어 못가고 죽어 연못 위에 무덤만 남았다 한다.


연못 위 바위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점심도시락을 펼친다. 각자의 배낭에서 꺼내 놓은 도시락에서부터 떡, 과일, 커피 등 후식까지 푸짐하다.


 

30분간의 점심식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데 뜻밖에 머털님 일행과 반가운 조우를 한다. 청내골을 들머리로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음양수샘을 거쳐 남부능선에서 자빠진골로 하산한다고 한다. 원래 우리 일행의 하산코스였으나 우리 일행은 음양수샘을 거쳐 거림옛길로 하산코스를 변경하였다. 단체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걸음을 옮긴다.


 

하늘 담은 청학연못을 뒤로하고 숲길을 가로 질러 진행한다. 청학연못 주변에는 옛 마을터의 흔적이 보인다. 20분 정도 진행하여 거림마을로 이어지는 정규등산로와 만나고 거림마을과 의신마을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향해 10분 정도 거슬러 올라간다.


 

<거림 5.5km 의신 8.6km 세석대피소 0.5km>이정표가 서 있는 삼거리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대성골의 들머리인 의신쪽으로 향한다. 음양수는 여기서 0.7㎞.


 

여기부터 영신봉에서 시작되는 남부 능선길이자 낙남정맥길이다. 길은 오솔길이다. 10분 뒤 기도터 제단이 있는 너른 암반에 선다. 멀리 왕시루봉과 황장산, 광양 백운산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너른 암반 바로 아래가 바로 음양수(陰陽水)샘. 바위 아래 신기하게도 양지 음지 두 곳에서 샘물이 흘러나온다. 예부터 자식 없는 여성들이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전해온다.


<음양수 1450m 세석대피소 1.2km 청학동 8.8km  의신 7.9km 쌍계사 15.3km> 이정표가 서 있다.

 

음양수 유래


옛날 대성골에 호야와 연진이라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자유롭고 평화스럽게 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무 부러울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오직 자식이 없다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어느 날 곰이 찾아와 연진에게 세석고원에 음양수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이 물을 마시며 산신령께 기도하면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연진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홀로 이 샘터에 와서 물을 실컷 마셨는데 호랑이의 밀고로 노한 산신령이 음양수 샘의 신비를 인간에게 알려준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연진에게는 세석 돌밭에서 평생 철쭉을 가꿔야 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연진은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를 빌다가 돌로 굳어져 버렸고, 아내를 찾아 헤매던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달려가다 산신령의 저지로 만날 수 없게 되자 가파른 절벽 위의 바위에서 목메어 연진여인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세석고원의 철쭉은 연진의 애처로운 모습처럼 애련한 꽃을 피운다고 하며 촛대봉의 바위는 바로 연진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음양수를 지나면 곧 왼쪽으로 소로가 있는데 우천선생 움막터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3분 정도 더 내려가 갈림길에서 남부능선 길을 버리고 왼쪽 거림옛길로 들어선다. 길은 비교적 뚜렷하다. 3분 정도 진행하면 등로 왼쪽 바위위에 기도터 제단이 있다. 바위에 올라서  조망을 즐긴다. 돌로 쌓은 제단 앞에 무리를 지어 핀 구절초가 환한 모습으로 하얀 미소를 건넨다.


 

청산님이 발견한 잣을 따서 배낭에 나눠 넣는다. 술 담그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전수받아 집에 와서 술을 담가 놓았다.


 

산죽나무를 헤치고 계곡을 건너다니며 내려간다. 경상남도에서 만들어 나무에 설치한 옛날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거림 6km, 세석 4km” 라고 쓰여 있는데 거림에서 세석까지 6km라고 적힌 오늘날의 이정표와는 차이가 많다.


 

음양수를 출발한지 약 1시간. 북해도교에서 정규 등산로와 만난다. 이곳을 기점으로 한겨울에도 아래쪽은 기온이 따뜻한데 비해 위쪽은 춥고 눈도 녹지 않는 것이 북해도(일본의 홋가이도)를 닮았다하여 북해도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한다. 거림까지는 약 1시간 소요된다.


 

조금 더 내려서면 천팔교를 건넌다. 해발 1008m 지점에 위치하여 천팔교라고 부르는데 계곡에는 커다란 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낸다.

 

거림골은 온통 바위길이라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바위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커다란 소나무 가지 사이로 거림매표소와 거림마을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피서철도 지나고 추석이 다가와 조상묘 벌초때문인지 산행객이 거의 없어 거림마을 식당들은 한산하다.


버스에 오르면서 약 9시간의 산행은 끝이 난다. 버스에 배낭을 내려놓고 갈아입을 옷가방을 들고 사모교 아래 계곡에서 바지와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알탕을 즐긴다. 땀 흘린 산행 뒤 계곡에서 알탕하는 맛은 여름산행의 특별한 보너스이자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그 맛을 알 수 없다.


파전과 묵무침을 안주삼아 중국술과 맥주로 간단한 뒤풀이를 하고 대전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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