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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26. 피아골-용수골

산행일시 : 2007년 7월 22일(일)

산행코스  : 직전마을 - 피아골대피소- 용수골 - 반야봉4거리 - 임걸령 - 1424봉- 서산대 - 피아골대피소 - 직전마을 (9시간 소요)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탄다. 6시 15분 아침 식사를 위해 덕유산 휴게소에서 15분간 정차한다. 안개비가 내린다.

▲아침 이른 시간에 어디론가 이동 중인 스님들

 

휴게소 앞에는 엔젤트럼펫(일명 천사의 나팔꽃)이 고운 자태로 눈길을 끈다. 20-30cm 정도 되는 원통형 나팔 모양의 미백색 꽃을 피우는 다년생 관목으로 샤넬향이 나며, 성경에 나오는 하늘을 나는 천사가 긴 나팔을 입에 물고 소식을 전하는 모습이 연상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함양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로 갈아 타고 진행하다 남원요금소로 빠져나가 바로 만나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구례 방향으로 달린다. 계속 직진하여 구례에서 칸님이 합류하고 19번 국도와 17번 국도가 갈라지는 곳에서 화엄사 이정표를 따라 내려간다. 밑으로 빠져 화엄사 입구를 지나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향으로 약 9km 정도 가면 길 왼쪽에 외곡리 검문소가 보이고 피아골로 가는 865번 지방도로가 갈라진다. 이 길을 따라 7.8km 를 가면 연곡사매표소가 나오고 이 매표소를 지나 0.4km 더 가면 연곡사 일주문이 보인다.


풍수지상 제비가 날아가는 형국의 명당에 자리 잡은 연곡사(燕谷寺)에서 2km정도 오르면 조그마한 마을이 나오는데 직전(稷田)마을이다. 식용 피(稷)를 가꾸는 밭, 즉 피밭이 있던 마을이란 뜻이다. 

 

실제 피아골이란 지명은 예부터 고대 오곡(중국에서는 참깨 ·보리 ·피 ·수수 ·콩이거나 참깨 ·보리 ·피 ·쌀 ·콩의 5종, 또는 수수 ·피 ·콩 ·보리 ·쌀의 5종을 5곡이라고 하였다.  한국에서는 쌀 ·보리 ·조 ·콩 ·기장을 5곡이라고 한다.) 중 하나인 피를 많이 가꾸던 곳이라 하여 피밭골로 부르던 것이 피아골로 변한 것이다.

 

임진왜란, 조선말 격동기, 여순반란사건, 6·25 등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8시 40분 “피아골 자연탐방로”를 들어선다. 넓은 산책로를 따라 표고막터까지 약 1km 진행하면 탐방지원센터가 보인다. 표고막터는 일제 강점기 때 이곳에서 표고버섯을 재배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9시 정각.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출렁다리(선유교)를 건너면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으로 옛길이 나 있으나 출입통제 팻말이 붙어있다.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조선 시대 유학자 조식 선생이 한 말이다. 핏빛보다 붉다고 하는 지리10경 중 하나로 꼽히는 직전단풍은 피아골 입구 직전부락 일대의 단풍 절경을 일컫는다.  표고막터에서 삼홍소까지 약 1km의 빼어난 풍광은 피아골 산행의 진수를 보여준다.


삼홍교를 건너면 삼홍소 이정표가 서 있다. 삼홍(三紅)이란 가을 단풍으로 산이 붉게 불타 산홍(山紅), 붉은 단풍이 맑은 담소에 비쳐 수홍(水紅), 사람도 붉게 물드는 인홍(人紅)을 일컫는다.

 

삼홍소에서 10여분 오르면 구계포교가 나오고 여기서 바라보는 피아골의 경치는 마음속까지 시원함이 전해진다.


바위 턱이 아홉 개의 계단모양으로 펼쳐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구계포폭포는 육중하면서도 신비로운 풍광과 더불어 완만한 암반위로 옥계수가 층층 계단을 타고 쏟아지는 장관은 탄성을 절로 나게 만들고, 이끼 낀 바위절벽은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구계포교에서 대피소까지 1.5km 구간은 98년 수해로 피해가 컸던 지역으로, 99년 새로 다듬은 등산로는 사면을 타고 이어진다.


절경을 뒤로 하고 다시 10여분 정도 오르면 남매폭포가 기다린다. 3∼4m의 아담한 쌍폭이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앞서간 일행을 따라가기 위해 서두르다 이끼에 미끄러져 오른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청산님의 도움으로 응급처지를 하고 피아골산장으로 향한다.


절벽에 매달린 듯 한 철계단을 지나 조금 더 오르자 와폭이 있고 기다리던 피아골 산장이 나타난다.    


▲피아골산장

 


정형외과 전문의인 김원장님이 부상 부위를 다시 치료하고 항생제와 진통제를 주어 다행히 산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달래고 10분 정도 오르니 불로교(철다리)가 나온다. 이곳을 막 건너면 삼거리다. 왼쪽은 주등산로로 임걸령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용수골로 들어서는 길로 비지정 등산로여서 금줄로 막아놓았다.  금줄을 넘어 용수골로 접어든다. 용수골은 피아골의 상류로, 삼도봉 옆 소금장수 무덤이 있는 용수골5거리까지 이어진다.


화개재에 얽힌 설화 중 "운봉무더미"란 얘기가 있다. 운봉사람 소금장수 3대의 조상이 일흔살 나이에 화개에서 소금을 지고 운봉으로 넘어가다 화개재에 이르러 힘에 지쳐 소금을 진채 쓰러져 죽었는데 손자가 할아버지를 그 자리에 묻고 정성을 다해 큰 묘를 만들었다 한다. 화개재 언저리의 큰 무덤을 두고 그 소금장수의 무덤이라 해 '운봉무더미'라 부르고 있다.


크고 작은 폭포와 수많은 담과 소들이 시선을 빼앗고 곳곳에 쓰러진 나무와 숲을 가리는 안개로 더욱 신비스럽다. 산이 높고 골이 깊으니 계곡 또한 깊고 흐르는 물의 양도 풍부하다.


울창한 수림이 뒤엉켜 넘어지면 넘어진 대로 그대로 원시와 태고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진다. 아직은 사람의 때를 덜 탄 때문이다. 진초록의 청류와 수림은 정적의 운치를 더해 신비감을 준다.


12시 10분. 걸음을 멈추고 세 그룹으로 나누어 계곡 바위에 점심 식탁을 차린다.

20분간의 짧은 식사를 마치고 계속해서 1시간 정도 계곡을 치고 오른다.

드디어 물줄기가 사라지고 부드러운 흙길을 10분 정도 치고 오르자 반야봉 4거리에 닿는다.  용수골 5거리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즉 반야봉을 거치지 않고 그냥 노고단으로 가는 길, 반야봉으로 오르는 길, 묘향대 가는 길, 삼도봉 가는 길, 용수골로 내려서는 길 등 5갈래의 길이 갈라지는 곳이다.  오른쪽으로 10m 정도 이동하면 묘향대 들머리가 보인다. 산행을 시작한 지 5시간이 소요되었다.


10분 정도 간식을 나누며 휴식을 취하고 10분 정도 진행하여 노루목에 도착한다.

노루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란 의미도 되지만 그보다는 반야봉의 지세가 피아골 방향으로 가파르게 흘러내리다 이곳에서 잠시 멈춰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암두(岩頭)를 이루고 있어서 노루목이라 부른다고 한다. 노루목은 왼쪽으로 반야봉을 오르는 길이 갈라진다.


임걸령 샘터에 닿는다. 이곳은 옛날에 의적이나 도적들의 은거지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특히 의적  임걸년(林傑年) 의 본거지였다 하여 임걸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임걸년에 관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지만 이곳에 진을 치고 군사와 말을 길렀다고 하는데 실제로 임걸령 부근에서는 마구와 활촉 등이 발견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임걸령 샘터에서 피아골 쪽 암벽 밑에는 황호랑이 막터라는 곳이 있다. 옛날 약초꾼 황장사가 겨울에 이곳에서 자다가 기발한 지용(智勇) 을 발휘하여 큰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해발 1,320m의 높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우뚝 솟은 반야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노고단의 능선이 동남풍을 가려주어 산 속 깊이 자리한 아늑하고 조용한 천혜의 요지이며 샘에서는 언제나 차가운 물이 솟고 물 맛 또한 좋기로 유명하다. 목을 축이고 수통에 가득 채운다.

 

주능선 등반구간 중에서 노고단에서 임걸령까지 4km가 가장 편한 코스에 속하는데 옛날 화랑들이 말을 타고 달려 화살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는 과장된 전설이 있을 만큼 순탄한 편이다.


피아골 3거리에서 기다리던 호준님이 합류하여 돼지평전으로 향한다.


싱그러운 초원지대인 잘록한 능선안부를 지나면서 원타이정님이 미역줄기라는 잡목을 비롯하여 참나리, 원추리, 둥근이질풀, 비비추, 지리털이풀(단풍털이), 노루오줌 등 야생화의 이름을 줄줄이 알려주어 산행의 재미를 더한다.

▲둥근 이질 풀

▲동자꽃


▲참나리-나리의 꽃말은 "불타는 정열"이란다.

▲비비추

'돼지평전'이란 어원은 마늘모양의 원추리 뿌리를 멧돼지들이 종종 파먹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1424봉에서 후미 일행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고 인원점검을 한다. 반야봉4거리에서 2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숲을 헤치며 능선을 따라 20분간 내려서자 지리산 옛 수도처의 하나인 서산대에 닿는다. 서산대라는 이름은 피아골 산장지기인 함태식옹이 서산대사가 이곳에서 기도했다는 화엄사의 기록을 토대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서산대(西山臺)는 반야봉의 7대(문수대, 묘향대, 종석대, 만복대, 금강대, 무착대, 서산대) 중의 하나로 지리산 심층 산행을 하는 지리산꾼들이 찾는 곳이다.


앞서 찾았던 묘향대, 영신대처럼 커다란 바위가 병풍처럼 쳐져 있고 주위의 풍광은 수도처로써 어떤 기(氣)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런데 이곳에는 관리공단에서 암자를 철거를 하면서 각종 생활도구들을 그대로 어지럽게 방치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10분 정도 살펴보고 능선 길을 따라 30여분 내려서 왼쪽으로 돌아 피아골 산장으로 내려선다.


▲피아골 산장지기 함태식옹 -관련기사는 왼쪽 메뉴 산행자료집 참고

 

가뿐 호흡을 가다듬고 약수로 얼굴에 땀을 씻어내고 아침에 올라올 때는 부상으로 그냥 지나쳤던 주변 풍광을 눈에 넣으며 천천히 하산한다.

왼편 능선상에 독불 장군처럼 솟아있는 작은 봉우리는 흰무덤을 닮았다하여 흰덤봉이라 불리는 봉우리다.


삼홍교를 건너기 직전 왼쪽으로 금줄을 넘어 표교막터까지 이어지는 부드러운 옛길을 따라 15분을 진행하자 표고막터에 닿는다.

나뭇잎 사이로 파고든 햇빛이 그늘 짙게 드리운 산책로를 밝힌다. 빠른 걸음으로 10분을 걸어 산행을 시작한 피아골탐방로 입구에 다다른다.

계곡으로 내려서 등산화와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탁족을 하며 산행을 마무리한다. 직전마을에 주차되어 있는 버스에 오르면서 9시간의 산행은 끝을 맺는다.


 

연곡사 탐방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절로 알려지고 있는 연곡사는 현대사의 질곡을 간직한 사연 많은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직전리 조금 못 미처 자리 잡고 있다.


연곡사는 543년(백제 성왕 21년)에 화엄사종주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유적들로 보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된 절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5년(1627년)에 소요대사 태릉(1562-1649)이 복구하였다.


영조 21년(1745년) 무렵의 연곡사는 왕가에 신주목(神主木:위패를 만드는 나무)으로 쓰이는 밤나무를 내는 율목봉산지소(栗木封山之所)로 지정되어 있었다. 1895년 쯤에도 여전히 왕가에 신주목을 봉납하였는데, 밤나무의 남용으로 문제가 생겨 망할 지경에 이르자 승려들이 절을 떠나 결국 절이 폐쇄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구한말과 한국전쟁 때 다시 파괴되었다가 근래 들어 중창불사가 크게 이루어졌다.

 

연곡사라는 사찰명은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지리를 보고 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 가운데서 물이 소용돌이치더니 제비 한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고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건축했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경내 뒤쪽 산등성이에 있는 세 점의 부도와 두 점의 부도비, 그리고 경내 앞쪽에 있는 삼층석탑이 숱한 역사의 변화 속에서도 제 빛을 잃고 있지 않고 있어 연곡사를 찾는 기쁨을 살려주고 있다. 이들 부도는 모두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꽃을 피운 선종 계통의 문화유산으로, 연곡사가 가장 번창했던 시기가 신라 말 고려 초였음을 짐작케 한다.


▲연곡사 동부도(국보 제53호)

 

부도(浮屠)란 이름난 스님의 사리나 그 유골을 안치한 돌탑을 말한다. 연곡사 동부도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가운데 가장 형태가 아름답고 장식의 조각이 정교한 작품이다. 받침돌에는 구름속의 용과 사자가 장식되어 있고, 가운데 받침돌과 눈 모양 속에 팔부신중(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장)과 가릉빈가(불경에 나오는 머리는 사람 몸은 새인 상상의 새), 사천왕상 등의 무늬를 조각하였다.

 

▲연곡사 동부도비(보물 제153호)

 

연곡사 동부도비는 비문을 새긴 비석의 주된 부분인 비신(碑身)은 없어졌고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귀부-龜趺)과 뿔 없는 용 모양을 새긴 형상인 이수부분만 있다.

 

▲연곡사 북부도(국보 제54호)

 

연곡사 북부도는 8각형의 탑신 각 면에 문짝(문비), 향로, 사천왕상으로 장식되었고 비교적 넓은 불집(화사석) 위의 지붕돌은 기왓골 등을 정성들여 새기는 등 조각이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연곡사 서부도(보물 제154호)


 

연곡사서부는 조선 효종 원년(1650년)에 세워진 소요대사 부도이다.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연곡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는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이다.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났으며, 호남지방에서도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담양 출신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그는 1907년 8월 26일 지리산 연곡사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야간 기습을 받아 패전하고 순절하였다. 이때 절도 불탔다. 이를 기리는 비석이 경내에 세워진 것이다.


▲연곡사 현각선사탑비(보물 제152호)

 

 연곡사 현각선사탑비는 동부도비와 마찬가지로  비문을 새긴 비석의 주된 부분인 비신(碑身)은 없어졌고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귀부-龜趺)과 뿔 없는 용 모양을 새긴 형상인 이수부분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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