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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25. 청학연못

 

산행일시 : 2007년 7월 15일(일)

산행코스 

백무동-한신폭포-세석대피소-영신사지-청학연못-시루봉-촛대봉능선-거림(9시간 소요)


7시 대전 동부터미널.

칸님과 오늘 산행 안내를 해 주실 산삼해님이 차례로 도착하고, 표를 끊고 버스에 오른다. 참고로 백무동까지 버스 요금은 10600원으로 카드결재는 불가하다.

 

7시 10분  우리 일행을 포함해 대여섯 명의 등산객과 대여섯 명의 일반 승객을 태우고 백무동행 버스가 출발한다.


산행 안내를 맡으신 산삼해님이 오늘 산행 코스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산삼해님과 지리산 산행을 한 적이 있는 복수동님이 동행하기를 청하여 일행은 네 명이 된다.


덕유산 휴게소에서 15분간 정차하고 88고속도로 지리산요금소를 빠져나가 인월에서 잠시 정차하여 승객을 내려놓고 백무동으로 향한다.


대전을 떠난 지 2시간 만에 백무동에 도착한다.

백무동이란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설이 여러 가지다. <지리산 365일>의 저자 최화수 씨는 '예전부터 많은 무당이 모여드는 골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으므로 백무동(百巫洞)이 맞는 한자 표기일 것'라고 설명한다. 늘 안개가 많이 끼므로 백무동이라는 사람도 있다. 한편 백무동 주민들은 백무동 동쪽의 중봉, 하봉 능선은 삼한시대 때 국경선이었는데 전쟁이나 무기와 관련이 깊은 괴점 같은 지명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무기를 뜻하는 무자를 쓴 백무동이 맞는 지명일 것이란 주장을 편다.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9시 35분 탐방지원센터를 지난다. 곧바로 장터목으로 오르는 하동바위 길과 세석고원으로 오르는 길이 갈라진다. 상백무에서 세석대피소까지는 6.5km로 약 3시간 30분이 소요된다.


백무동계곡에는 작은새골, 큰새골, 한신지곡이 한신계곡 본류로 흘러들면서 아기자기 하면서도 덩치 큰 폭포들을 숨기고 있다.


산삼해님으로부터 작은새골, 큰새골 들머리를 안내 받으면서 마음속으로 가보게 될 날을 기약한다.


산행을 시작한 지 40분. 울창한 잡목 숲의 터널을 빠져 나오면 가장 먼저 반기는 폭포가 첫나들이폭포이다. 우천 허만수 선생이 명명했다고 한다. 


높이 20여m의 시원한 폭포수가 부채살처럼 퍼지면서 시퍼런 소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이 아찔하다. 귀를 멍하게 할 정도로 요란하고 눈이 부실 정도로 계곡의 암반에 부딪치는 모습이 장관이다. 계곡을 가로지르며 놓여있는 철다리에 서서 다시 한 번 눈길을 준다.


첫나들이폭포 위쪽을 한신계곡이라 하고 그 아래쪽을 백무동계곡이라 칭한다.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 하여 '한신계곡(寒新溪谷)', 또는 중국의 한신 장군이 이 계곡에 잠시 피신했던 곳이라 하여 '한신(漢信溪谷)'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지도상에 표시된 바람폭포는 어느 것인지 그냥 지나치고 가내소 폭포에 닿는다. 첫나들이폭포에서 약 15분 거리. 폭포 아래 소는 수심이 깊은지 시퍼렇다.


먼 옛날 한 도인이 이곳 폭포에서 수행한지 12년이 되던 어느 날, 마지막 수행으로 폭포 양 쪽에 밧줄을 묶고 눈을 가린 채 줄 위로 건너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리산 마고할매의 셋째 딸인 지리산녀가 심술을 부려 도인을 유혹하였고, 도인은 그 유혹에 넘어가 물에 빠졌다. 그리하여 도인은 "에이- 나의 도(道)는 실패했다. 나는 이만 가네"하고 이곳을 떠났다고 하여 '가내소 폭포'라고 이름 붙여졌다는 전설이 흥미롭다.


이곳에서 장터목으로 이어지는 한신지곡이 갈라진다. 작년 가을 귀연에서 한신지곡을 산행했던 추억이 스쳐 지나간다.


7-8분 더 진행하여 오층폭포(해발 855m)를 구경하러 등로에서 살짝 벗어난 사이 칸님이 그냥 통과하면서 그때부터 칸님과는 따로따로 산행을 하게 된다.


한신폭포(해발905m)는 백무동3.7km/세석대피소2.8km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금줄을 넘어 계곡으로 약 10분 정도 내려가야 한다.


정규 등산로에서 협곡을 통해 한신폭포로 들어서는 새로운 길을 확인하고 다시 협곡으로 내려온다. 한신폭포의 실체를 보려면 절벽난간으로 돌아 내려가야 한다.


폭포 위쪽에서는 나뭇가지에 가려 카메라에 폭포의 모습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 한신폭포 낙수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커다란 바위절벽 아래로 조심스럽게 내려서 접근한다. 약 30분 정도 소요했다.


화랑골 들머리를 지나 시원한 계곡물에 세수를 하고 간식을 나누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10여분 진행하여 만나는 다리가 촛대봉골 들머리라고 한다.


가파른 오르막길은 숨을 턱밑까지 차오르게 하고, 너덜 길은 지친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세석 대피소 500m 쯤 못 미친 곳에서 휴식을 취하던 칸님과 다시 반가운 조우를 한다.


지리 주능선에 이르자 지리산을 넘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짙은 운무가 덮여 조망이 없다. 이곳에 오면 세석평전에 초막을 짓고 살다가 사라졌다는 우천 허만수 선생이 떠오른다.


1976년 6월 어느 날. 그의 나이 육십 되던 해 "나를 찾지 말라"는 말을 남긴 채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아무도 모른다. 그가 죽은 자리도 아무도 모른다. 누구는 칠선계곡에서 누구는 도장골에서 혹은 신선터널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지리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풍문만이 떠돈다. 그를 기리는 비 하나가 중산리 계곡에 서 있다.


13시 15분. 세석대피소 식탁에 앉아 반주를 곁들인 20분간의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원기를 회복하여 산행을 이어간다.


식수를 보충하고 거림 방향으로 향하다 영신사지를 찾아 들어간다. 영신사지 들머리는 세석대피소에서 약 7-8분 거리로 나무판 길이 시작되는 곳 10여m 전방에서 오른쪽에 있다.


5분 정도 들어가면 절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넓은 공터와 샘터가 보인다. 앉아서 기도를 드렸다는 바위에 올라 주위를 둘러본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에 의하면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가섭대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지리산마니아 산꾼들이 아니면 찾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재취하지 않은 곰취가 지천이다.


의신과 거림이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왼쪽 숲으로 들어선다. 청학연못을 찾아가는 길이다. 청학연못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촛대봉에서 찾아간다. 그래서 이곳은 아무런 표시도 흔적도 없다.

고문님의 기억과 산행 감각으로 숲을 헤맨 지 50여분 지나서 드디어 환상의 세계 청학연못이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촛대봉과 시루봉(장군봉) 능선 중간 서쪽 아래 해발고도가 1500m도 넘는 세석고원에 위치한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에 비친 지리 선경은 지리비경 중에서도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데, 운무에 가려 더욱 신비스러운 느낌이다.


자연 상태의 연못이 아니고 청학동의 이상향을 완성시키는 의도에서 옛 선인들이 의도적으로 지형을 갖추려는 듯 인공으로 조성된 연못이라고 한다.


청학(靑鶴)은 중국의 문헌에 나오는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또 운다'는 전설의 새이다. 날개가 여덟이고 다리가 하나이며 얼굴이 사람같이 생겼다는 상상의 길조(吉鳥)로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전설의 새라고 한다. 이 새가 울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하여 옛 사람들은 청학이 사는 청학동을 신선의 고장이라 여겼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태평성대의 이상향을 청학동이라 불렀다.


청학 연못의 길이는 대략 20m, 넓이는 대략 6-7m 정도 되며 깊이는 대략 1m내외의 타원형의 연못으로, 대슬랩 형태의 커다란 바위가 앞을 막아주고 둥글게 돌조각을 세워 뒤 물길을 막았다.


1879년 8월에 지리산을 다녀와서 [두류산기]를 남긴 <송병선>의 기록에 의하면 “와암(臥巖) 벼랑에 [鶴洞壬(학동임)] 3자가 새겨져 있다.”고 적혀있다.


대슬랩 형태의 바위 상단에 새겨져 있다. 위의 [두류산기] 자료가 아니면 마지막 각자 [壬] 字 외 나머지 [鶴] 과 [洞]은 식별이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鶴] 字는 바위 부분이 깨어져서 파자가 된 상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간에 쫓겨 찾을 수가 없었다.


30분간 휴식을 취하면서 간식을 나누고 식수를 보충한 다음 촛대봉쪽으로 길을 잡고 올라선다. 갈라진 바위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지척의 거리에 자리한 청학연못은 그 어디에고 흔적이 없다. 촛대봉과 시루봉 갈림길에 이르자 촛대봉을 휘감은 운무가 걷히고 잠시 시원한 조망을 선사한다.


오른쪽 시루봉을 향해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진행하여 시루봉(장군봉)에 올라선다. 분재모습의 나무를 키우는 바위 사이로 운무가 가린 촛대봉이 희미하게 조망된다.


칸님과 바위 협곡사이 가파른 내리막길을 5분 정도 조심스럽게 내려서서 만나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에 붙어 바위를 타고 넘어온 고문님과 만나 산책로 같은 부드러운 숲 속 길을 따라 걷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바위사이 협곡 길은 북해도교로 이어지는 매우 험한 내리막길이다.


도장골과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희미한 오른쪽 능선 (일명 촛대봉능선)길로 접어들어 2시간 정도 키 높이 자란 산죽과 씨름을 하며 온몸이 땀범벅이 된다.  추천하고 싶지 않은 산길이다.


시루봉에서 2시간 정도 내려오면 봉우리도 아닌 곳에 박혀있는 삼각점[운봉436-1983복원]이 지도상 806.7m봉임을 확인시켜 준다. 이곳에서 거림마을 까지는 약 10분 소요된다.


거의 다 내려와서 삼거리 갈림길을 만난다. 오른쪽 길은 세석에서 거림으로 이어지는 정규등산로와 만나고 왼쪽 길은 민박집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이다.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5분 정도 내려서자 예쁜 간판과 빨간 우체통이 반기는 <도장골 산방> 민박집 마당으로 내려선다. 예전 거림 매표소 바로 아래 지점이다.


거림계곡은 거대한 수림으로 뒤덮인 골짜기란 뜻으로 잔돌(세석)평전까지 거리가 약 6km이며 세석평전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로 경사도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10분 정도 더 내려서 주차장에 도착하여 9시간 산행은 끝이 난다.


계곡으로 내려서 차가운 계곡물에 바지와 등산화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온몸의 땀을 씻어내니 좀 살 것 같다. 


진주행 막차가 출발(18시 50분 출발. 요금은 5800원)하기 까지 10여분 시간 여유가 있어 시원한 맥주(1병 3000원)로 건배를 하고 갈증을 달랜다.


버스는 정시에 출발하여 20시가 막 지난 시간 진주터미널에 도착한다. 20시 정각에 출발하는 대전행 버스는 방금 출발하였다고 한다. 막차는 21시. 한 시간의 시간 여유가 생겼다. 터미널 앞 식당에서 소주 한잔 곁들여 국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대전행 막차에 몸을 싣는다.


2시간 동안 단잠에 취해 있는 사이 버스는 대전에 도착하고 밖에는 비가 내린다.

 

지리의 또 다른 속살을 보여주시고 저녁식사까지 사 주신 산삼해님, 동행 해주신 칸님과 복수동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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