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성판악-관음사), 관음사, 제주-목포
새벽 4시. 알람소리에 눈을 뜬다. 제주도 여정 둘째 날이 시작된다. 한식뷔페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물병에 식수를 채운다. 5시 30분 숙소를 출발하여 제주시에서 한라산 동쪽 허리를 가로질러 서귀포를 잇는, 총연장 43km의 5·16도로(한라산 제1횡단도로)를 따라 30여분 이동하여 성판악휴게소에 도착한다.
한라산을 오르는 성판악 코스는 5·16도로로(한라산 제1횡단도로)의 최고점인 해발 750m에서 시작된다. 성판악(城板岳)은 남서쪽 인근에 있는 성널오름에서 유래되었다. 특히 수직절벽이 병풍처럼 약 500m 정도 둘러쳐진 모양이 마치 '나무판자로 성을 둘러친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숲길은 짙은 녹색의 길로 아침 산책을 하는 기분이다. 투명한 햇살이 짙게 우거진 나무 잎사귀 사이로 스며든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정상을 향해 다가설 수 있는 여유. 가파른 길에서는 땀을 흘려서 좋고 평탄한 길에서는 잰걸음으로 달려갈 수 있어 좋은 길. 산행은 자신을 거듭나게 만든다.
서어나무 등 활엽수가 우거진 길을 따라 진행하여 속밭을 지나 화장실이 있는 쉼터에 이른다. 여러 번이 길을 지나다녔지만 이곳에 샘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진달래밭 대피소 3.5km 이정표가 보이고 완만한 오름길이다. 길 오른편 숲속에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이 이용하는 모노레일이 보인다.
들머리에서 1시간 10분 지나 사라무인대피소에 닿는다. 사라악 약수가 자리 잡고 있다. 전날 내린 비로 시원한 약수가 흐른다. 한바가지 떠서 갈증을 달랜다.
진달래밭대피소 0.7km이정표를 지나면서 길은 조금씩 가팔라진다. 가파른 길을 10여분 오르자 시야가 열리면서 해발 1,500m고지에 다다른다. 고도가 높아갈수록 구상나무와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이곳에서 만난 구상나무와 좀고채목 등이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계절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의 신비를 안겨주는 나무들의 모습이 우직하게 느껴진다. 어떤 구상나무는 이미 고사목으로 둔갑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구상나무는 잎끝이 두 갈래이며 솔방울이 열리고 잎 뒷면은 은빛이다. 반면 주목은 잎끝이 뾰족하고 빨간 열매가 열린다.
7시 50분 진달래밭 대피소에 닿는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40분이 지났다. 온통 붉은 꽃물결은 아니지만 이제 피시 시작한 연분홍 철쭉이 곳곳을 붉게 물들여 놓았다. 간식을 나누며 휴식을 취한다.
진달래 밭에서 백록담까지는 2.3km 보통걸음으로 1시간 30분 소요. 하절기에 정상인 백록담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13시까지 진달래 밭에 도착해야 한다. 진달래밭 대피소부터는 오르막길을 걷게 되는데 양쪽으로 전나무가 즐비하고 바위들이 뒤엉켜있다.
뒤돌아보니 멀리 사라오름이 시선을 잡아끈다. 제주도의 360여 기생 화산 가운데 정상에 화구호가 있는 오름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사라오름 분화구는 예로부터 제주 제일의 명당자리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진달래밭대피소를 떠난 지 40분. 해발 1700m 표지석을 지나자 정상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한라산을 멀리서 보면 동그란 산정에서부터 해안지방까지 납작한 접시 아니면 방패를 엎어놓은 것 같으니, 곧 방패 순(楯)자를 쓴 순상화산(楯狀火山)이다. 해발 1750m부터 정상까지 0.8km 올라가는 길은 성판악 등산코스 중에서 제일 가파른 길이다.
해발 1800m 지점부터는 나무계단이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스쳐 지나간다. 해발 1900m 돌 표지석을 지나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마지막 오르막길은 이국적인 멋을 풍기고 있어 낭만적이다.
9시 정각. 드디어 한라산 동릉 정상에 도착한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환상의 섬 제주도, 이 섬의 한 가운데 1,950m의 높이로 우뚝 솟은 한라산(漢拏山)이 있다. 능히 은하수를 잡아당길(雲漢可拏引也)만큼 높은 산이란 뜻을 가진 이 산은 예부터 신선들이 산다고 해서 영주산(瀛州山)이라 불리기도 했고 금강산(金剛山) 지리산(智異山)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정상 한 가운데 푹 팬 분화구 안 한쪽은 물이 고여 있다. 백록담이다. 백록담은 원래 흰 사슴이 뛰놀며 분화구내의 물을 먹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 사냥꾼이 뛰노는 사슴을 잡기 위해 활을 쏜다는 것이 그만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맞추자 화가 난 옥황상제가 한라산 정상을 뽑아 들어 사냥꾼에게 던졌고, 그 뽑힌 자리가 백록담이 되었으며 던진 것이 산방산이 되었다고 한다.
한라산 동릉 정상 표지목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한 장 남기고 관음사지구를 향해 발길을 옮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자 서서히 한라산 최고봉인 부악의 외벽이 기괴하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장관이다. 오래 전 스위스 여행에서 오른 알프스의 융플라우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산길로 들어선 지 20분. 왕관릉에 도착한다. 삼각봉에서 보면 왕관 모양의 바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 '살아 백년 죽어 천년 산다'는 고사목과 고채목 등 이국적인 나무들이 잘 꾸며놓은 정원 같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서 용진각 무인대피소에 도착한다. 용진각에는 갑자기 비가 내려 급류가 생길 우려가 있는 곳이어서 무인대피소가 있다.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거리는 짧지만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다.
용진각은 삼각봉과 왕관릉 사이의 움푹 꺼진 골짜기를 일컫는 것인데, 예전에 용진굴이라고도 불렸다. 굴이라고 해서 동굴이 있는 것은 아니고 주위가 높은 언덕에 둘러싸여 신비스런 기운이 서려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용진각의 동북쪽 언덕은 장구목이라는 고원평지이다. 왕관릉에서 바라보면 영락없는 장고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에 1977년 세계 최고봉 초모룽마(티베트어로 세계의 어머니 여신이라는 뜻. 에베레스트, 8848m)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올랐으나, 2년 뒤 북아메리카의 최고봉 데날리(일명 메킨리, 6194m)에서 운명을 달리한 제주출신 산악인 고상돈씨를 기리는 케른(돌무덤)이 있다고 한다. 골짜기 건너편 산 중턱에 우뚝 선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끈다.
조금 더 내려서니 약수터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약수는 제주도가 자랑하는 삼다수보다 훨씬 물맛이 좋다. 낙석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철조망 아래 사면으로 난 등산로에 서면 왕관바위가 멋진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오고 멀리 파란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어우러져 부악의 외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곧이어 삼각봉을 만나고 개미목을 지나 개미등이 시작된다. 두 골짜기 사이에 툭 튀어나온 모양이 개미의 등 같아서 그런 명칭이 붙은 것이라고 한다. 백록담에서 1시간 소요.
삼각봉에서 50분. 탐라계곡대피소에 도착한다. 이곳 역시 폭우로 인한 기상악화시 계곡물이 갑자기 불어났을 때를 대비해서 지어놓은 무인대피소이다.
한라산 계곡 중 가장 길다는 탐라계곡을 끼고 계속해서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약간 험하다. 계곡이 깊을수록 마음도 깊어진다더니, 계곡은 인기척이 거의 없다.
탐라대피소에서 10여분 지나면 무덤처럼 보이는 숯가마터에는 안내판 있다. 이곳은 한라산 참나무로 숯을 만들던 숯가마터라고 한다.
다시 10분을 더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구린굴 표지판이 보인다. 구린굴은 용암동굴로 한라산 화산폭발 당시 백록담 분화구로부터 흘러나온 용암에 의해 형성된 동굴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만이 갖고 있는 소중한 자원이라고 한다. 관음사지구 1.5km 이정표가 반긴다.
11시 45분 야영장에 도착하여 약 5시간 30분 동안의 한라산 종주 산행은 끝이 난다. 5.16도로(제1횡단도로)와 1100도로(제2횡단도로)를 잇는 제1산록도로 변에 있는 관음사코스는 코스 명칭이 관음사라해서 절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고, 등산로 입구에서 동쪽으로 약 1.2km지점에 관음사란 사찰이 있기 때문 붙여진 것이다.
차에 배낭을 벗어놓고 혼자 관음사로 향한다. 1117번 포장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자 관음사 주차장에 닿는다.
'한라산관음사'라는 현액이 걸린 일주문을 들어서면 좌우측에 팔부신장을 조성해 놓았다. 팔부신장(八部神將)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을 보호하고 호위하는 여덟 부류의 신장들이다. 양쪽으로 제각기 다른 모습의 석불상이 도열해 있고 여느 절처럼 사천왕문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 사천왕상 대신에 사천왕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천왕문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해월굴이 보인다. 이 토굴은 관음사를 창건한 안봉려관 스님이 3년 동안 기도 정진한 토굴이라고 한다.
대웅전 왼쪽에는 연산전이 자리하고 그 왼쪽에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에 이 세상에 와서 죄악과 고통으로 헤매는 중생을 구하기로 약속되었다는 미륵불상을 중심으로 만불(만개의 불상) 봉안이 진행 중이다.
그 왼쪽으로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나란히 자리하고 경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다시 도보로 야영장 주차장으로 돌아와 나무 그늘 평상에 앉아 후미가 오기를 기다리기 약 2시간이 지나 후미대장과 일행의 모습이 보인다.
등산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잡다하고 복잡한 생각은 잠시 접어 머리를 쉬게 하고, 대신 온몸으로 자연의 기를 받으며 마음으로 느끼기 때문에 몸은 피곤할지라도 기분은 좋아지는 것이다. 결국은 피곤했던 몸도 더욱 건강해진다.
대한민국 최고 식단을 자랑하는 “용꿈 돼지꿈” 이라는 식당으로 옮겨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여객선터미널로 이동하는 중간에 잠시 농수산쇼핑센터에 들려 아이들 줄 초콜릿을 샀다.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여객선터미널을 지나 목포행 훼리에 오른다.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산악회원들에 점령당한 갑판과 선실은 질퍽한 술판과 고스톱 판으로 왁자지껄하고 식당 또한 점령되어 시장을 방불케 한다.
찜통 같은 선실을 피해 갑판 위에서 벌어진 만원의 행복(자리돔회와 한라산소주)은 늦은 점심식사 탓에 일찍 자리를 뜬다. 좁은 선실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
사람들이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보기 위해 갑판으로 몰려든다. 뱃머리가 향하는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바다 곳곳에서 수많은 섬들이 신비스런 자태를 드러낸다. 구름과 숨바꼭질하며 보고 있는 사람들과 바다를 황금색으로 물들이던 붉은 해는 섬 뒤로 수줍게 제 모습을 숨긴다. 오랜만에 보는 황홀한 석양의 모습은 마음을 편하게 했다.
유달산과 목포의 야경이 눈에 들어오고 4시간 30분을 항해한 훼리는 밤 9시경 목포항에 닿는다.
버스에 올라 대전으로 향한다. 자정 여산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하고 30분 후 유성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새벽 1시가 되어 집에 도착한다.
1박 2일 동안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한라산 산행은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