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26일 : 대전-목포-제주도, 한라산(어리목-영실)
여행을 모르면 인생을 절반만 사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여행은 가는 사람이 그곳에 또 간다’는 말도 있다.
돌아와 내가 다시 서야 하는 자리에서의 일상을 건강하게 꾸려가기 위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넓게 보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이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매년 연초에 눈 덮인 한라산 등반을 위해 제주도를 찾았지만 올해는 3월말 수학여행 인솔을 하면서 학생들과 한라산 등반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성판악에서 출발하여 백록담이 내려다보이는 동릉 정상까지 갔다가 다시 성판악으로 하산하는 바람에 아쉬움이 컸다.
5월 마지막 주말, 새여울을 따라 다시 한라산을 찾았다. 첫날은 어리목에서 영실로 넘어가고, 둘째날에는 성판악에서 관음사로 넘어가는 산행이어서 더욱 매력적인 일정이다.
아침 5시. 식구들의 단잠을 깨울까봐 배낭을 둘러매고 조용히 집을 나선다.
빈자리 하나 없이 좌석을 채운 버스는 유성톨게이트로 진입하여 호남고속도로를 힘차게 질주한다. 새벽 단잠을 설친 사람들은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든다. 서해안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목포를 향해 달린다. 고인돌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위해 정차한다.
9시 40분. 제주행 뉴씨월드고속훼리(12000톤)에 승선한다.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하는 3등 객실에 배낭만 던져놓고 갑판으로 나선다.
훼리는 푸른 바다를 헤치며 나간다. 부르지 않아도 다가오는 파도, 보내지 않아도 잠시 떠나갈 줄 아는 파도, 스쳐 지나는 이름 모를 섬의 등대들...
갑판 벤치에 앉아 눈을 감는다. 얼굴을 간질이며 스쳐 지나는 바람이 기분 좋게 한다. 비행기는 빠른 교통수단으로 편리하지만 배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여행이다. 모두들 들뜬 기분으로 추억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하다.
여행은 늘 나를 다시 깨어나게 만든다. 내가 항상 보고 느끼는 나만의 작은 공간에서 탈출하여 좀 더 큰 날갯짓으로 좀 더 큰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바로 여행인 것 같다.
전국에서 모인 산악회원들과 관광객들에 점령당한 갑판은 질퍽한 술판이 벌어지고, 술 취한 아줌마 아저씨들의 흥겨운 트롯 가요가 메들리로 이어진다.
객실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고 선내 식당에서 김치찌개 백반으로 점심식사를 한다.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뱃길 따라 4시간 30분을 항해한 배는 제주항에 닿는다.
여객선 터미널을 빠져나가 주차장에 준비된 버스에 오른다. 한라산 등반을 할 사람들은 1호차를 타고 산행들머리인 어리목으로 향한다. 오후 3시까지 도착해야 산행을 할 수 있는데 20여분 늦게 도착하여 입산 통제하는 공단직원에게 사정이야기를 하고 들머리로 들어선다.
이곳 어리목 코스는 처음이다. 숲 터널에 계단으로 잘 정돈된 등산로를 따라 30분 정도 오르면 해발 1200m 지점(어리목에서 1.6km)에 커다란 물참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송덕수다.
안내판에는 “조선 정조 18년(1794년)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이들이 많이 생겨나자 계집종이 초근목피라도 구해 주인집 식구를 살려보려고 이 나무 아래까지 올랐다 체력이 다해 쓰러졌는데, 우박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몸이 도토리에 덮여 있어 그것을 주워 주인집 식구를 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 흉년 때마다 이 나무에서 나는 도토리로 연명할 수 있게 되자 나무의 덕을 감사하기 위해 제사를 올렸다 한다.”고 적혀있다.
10분 정도 더 진행하여 해발 1300m 지점을 지나자 숲 터널이 끝나고 초원이 펼쳐진다. 훼손된 등산로에는 나무판을 깔아놓았다. 등산로 오른쪽에 사제비오름(해발 1423m)이 보인다. 제비가 죽어 있는 형상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맑고 시원한 물이 콸콸 흘러나오는 사제비샘에서 물 한 바가지로 갈증을 달래고 길을 이어간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챗망오름의 분화구는 양쪽으로 노꼬메와 바리메의 호위를 받아 더욱 의젓해 보인다. 오름의 모양이 채의 망처럼 생겼다하여 챗망오름이라 하고 제주의 전통농기구인 골체를 닮아 골체오름이라 한다.
윗세오름대피소까지는 완경사의 초원지대로 백록담 화구벽과 북서릉을 바라보며 오른다. 오름약수로 목을 축이고 들꽃과 새소리 벗 삼아 천천히 걷는다.
윗세오름은 한라산 정상인 북악 서쪽으로 나란히 솟아 있는 세 개의 오름을 통틀어 일컫는 이름으로 붉은오름(큰오름), 누운오름(샛오름), 새끼오름(족은오름)을 말한다.
산행은 윗세오름대피소까지 오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후 백록담 정상으로 오르는 서북벽 코스와 남벽 코스는 자연훼손이 심해 자연휴식년제 구간으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휴게소를 겸하는 윗세오름대피소는 컵라면, 간식, 생수 등을 팔고 있다.
17시. 자연휴식년제로 못 오르는 백록담을 지척에 두고 아쉬움을 달래며 영실로 하산한다.
노루샘을 지나 뒤돌아보니 대평원 너머에 한라산 정상 화구벽이 위협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람들은 한라산을 두고 신의 정원이라 부른다. 계절마다 색깔이 다르고 생태가 다르고, 계곡마다 전설이 서려 있는, 그래서 사람들은 한라산을 동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구상나무숲 길로 들어선다. 영실 코스에서 가장 경관이 좋은 병풍바위 능선길에는 군데군데 만개한 철쭉이 햇살을 받아 분홍빛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녹색물결이 발걸음을 묶는다. 철쭉은 다음 주에나 만개할 것 같다.
왼쪽으로 병풍바위가 펼쳐진다. 수직의 바위들이 마치 병풍을 펼쳐놓은 것처럼 둘러서 있어 병풍바위라 부른다.
해발 1500m 표지석을 지나면 영실기암(오백나한 五百羅漢)의 풍광이 펼쳐지며 잠시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제주10경의 하나인 오백나한은 기암의 수가 500개나 된다는 데서 유래됐다. 나한이란 불교 용어로 생사를 초월해 법도를 배울 게 없는 자를 일컫는 말로, 바위들이 솟아 있는 모양이 마치 장군들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일명 오백장군이라 부르고 있다.
오백나한에는 “제어미의 육신으로 끓인 죽인 줄도 모르고, 죽을 먹은 오백 명의 아들이 비통함에 울다가 바위로 굳어졌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비폭포에는 한여름 폭우가 내린 후 기암절벽 사이로 폭포가 흘러내려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영실소나무 숲을 빠져나오면 휴게소가 있는 영실에 닿는다. 영실(靈室)은 신들의 거처라는 의미다. 팔각정 뒤로 오백나한이 펼쳐진다.
영실샘물로 목을 축이고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 30분 정도 걸어 영실공원관리사무소가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면서 산행은 끝이 난다. 약 4시간이면 충분하다.
숙소인 제주로얄호텔에 여정을 풀고 저녁식사를 한 다음 야간투어에 나선다. 제주도 명물인 말고기 코스 요리를 시식하고 택시에 분승하여 해안도로를 타고 용연으로 향한다.
용연(龍淵)은 용담동 동한드기와 서한드기 사이의 소(沼)를 말하며 용두암에서 동쪽으로 200m 정도 거리에 있는 호수로 용이 놀던 자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취병담 또는 용추라고도 불려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선인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라고 한다.
용연은 한천 하류지역의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으로 옛날에 용왕의 사자가 드나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비를 몰고 다니는 용이 살고 있어 기우제를 지내면 가물었던 땅에 약속이나 한 듯 비가 내렸다고 한다.
연못의 양쪽에 8개의 바위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좁은 계곡이며, 영주 12경 가운데 하나인 용연야범이라 불리는 곳이다. 용연야범은 풍류객들이 야간에 배를 띄우고 기암절벽의 맑은 물 위에 비친 달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용두암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용왕의 부름을 받고 불로장생의 약초를 캐러 한라산을 향하던 용이 산신의 노여움을 사 화살을 맞고 해변으로 떨어져 바위로 굳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바닷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힘찬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화산 기암이다. 조명을 받은 용두암은 바위에 파도가 부딪쳐 산산이 조각나는 모습과 어우러져 마치 한 마리의 용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밤바다의 파도소리를 음악 삼아 해변에서 마시는 캔맥주를 끝으로 야간투어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다. 제주도의 첫째 날 여정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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