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간고속도로→덕유산휴게소→88고속도로(광주방면)→남원톨게이트(좌회전)→구례방향(19번국도)→밤재터널→산동면 소재지→지리산온천(2시간 30분소요)
오늘 지리산 번개산행을 신청한 사람은 모두 12명. 아침 7시 시민회관 뒤에서 만나 3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출발한다.
남원에서 밤재터널을 지나 바로 내리막 길 끝에서 오른쪽으로 지리산 온천 나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전남 구례의 산동면이다. 1,000년 전 중국 산동성(山東省)의 한 처녀가 지리산으로 시집오면서 산수유를 가져와 심었다고 해서 ‘산동’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지명 자체가 ‘산수유’의 전설을 품은 땅이다. 매년 3월이 되면 산동면 일대의 산자락과 골짜기마다 샛노란 산수유 꽃이 무리지어 피어나면 선경(仙境)이 따로 없다.
9시 40분 당동마을에 도착하여 일행을 내려놓고 기사들은 산행의 날머리인 상위마을에 차를 옮겨놓고 돌아온다.
9시 55분 들머리인 당동 마을은 상위 마을 입구를 지나 훨씬 더 위쪽으로 들어간다. 당동솔밭가든에서 산행이 시작된다. 계곡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식수파이프가 동파되어 새어나온 물이 얼어붙어 하얀 고드름폭포를 만들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식수를 보충한 뒤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긴 골짜기를 따라 앞서 간 일행을 뒤따른다.
산행 들머리에서 약 20분 정도 지나면 왼쪽으로 당동고개로 오르는 뚜렷한 길을 놓치고 앞서 지나간 순천산행객들이 눈 위에 남긴 발자국을 따라 무심코 지나치는 바람에 약 40분 정도 알바를 했다. 그러나 뽀드득 소리 들으며 새하얀 눈길을 걷는 즐거움과 시암재로 오르는 길을 확인하는 소득은 있었다.
다시 제 길로 들어서 조금 진행하면 정면에 문이 달린 철조망이 나타난다. 지리산 국립공원의 경계를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도 서 있었다. 코가 닿을 듯 가파른 오르막길을 거친 숨을 토해내며 약 1시간 정도 지그재그로 오르자 당동고개에 닿는다. 성삼재가 코앞이다.
간식을 나누며 후미가 도착할 때까지 휴식을 취하고, 후미가 도착하자 점심준비를 위해 선두는 서둘러 출발한다. 주능선의 장대한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길동무가 되어준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노고단과 그 왼쪽에 솟아 오른 육중한 무게감을 지닌 반야봉의 모습이 너무도 다정스럽다.
지난 가을 귀연 식구들과 태극종주를 하면서 지난 산길이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하늘과 봄날처럼 포근한 날씨, 거침없이 탁 트인 시야, 눈 쌓인 산길 등 지리산은 언제 찾아도 포근하다. 뒤돌아보니 성삼재와 시암재가 눈에 들어오고, 거대한 능선이 수없이 뻗어 내려간다.
고리봉(1,248m)에 올라서자 만복대가 눈앞에 성큼 다가선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눈 쌓인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아예 엉덩이를 땅에 대고 썰매를 타고 내려선다.
헬기장에서 먼저 도착한 선두가 점심식사 준비에 분주하다. 얼큰한 생라면의 뜨끈한 국물이 목줄기를 타고 내려간다. 산속 눈밭위에서 먹는 점심의 맛은 무엇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산행을 이어간다. “성삼재 3km 만복대 3km” 이정표를 지나자 곧바로 묘봉치에 닿는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옛사람들이 산동마을과 심원마을을 넘나들던 고개다.
만복대가 손에 잡힐 듯하다. 만복대는 이름만큼 복스러운 산으로 산 전체가 부드러운 구릉으로 되어 있다. '만복대'란 명칭은 풍수지리설로 볼 때 지리산 10승지 중의 하나로 인정된 명당으로 많은 사람이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하여 만복대로 칭하였다는 설이 있다.
오늘 산행은 만복대를 거쳐 다름재에서 하산하려 했으나 시간이 여의치 않아 가보지 않은 왼쪽 하산로를 따라 상위마을로 하산을 결정한다.
동면중인 긴 계곡을 1시간 반 정도 내려서면 봄을 기다리며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산수유나무가 눈에 띤다.
이곳은 지리산 반달곰이 서식하는 지역이어서 영구적으로 출입을 통제한다는 사실을 다 내려와서 알게 되었다.
산동에서 가장 많은 산수유나무가 있는 만복대(1433m) 자락의 상위마을은 임진왜란 때 피난민들이 들어와 터를 잡은 곳이다.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벼슬길에 올랐던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고 한다.
상위마을은 숫제 산수유나무에 파묻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에 띄는 건 몇 백 년씩 묵은 산수유나무들뿐이고, 여느 시골에 흔한 감나무나 대추나무 따위는 오히려 찾아보기가 어렵다. 마을 뒤편에는 눈 덮인 지리산 연봉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마을 오른편에는 작은 골짜기가 흘려내려 있어 자연경관 또한 매우 아름답다.
차량을 회수하여 만복사지로 이동한다.
남원시 왕정동 만복사지는 기린산 아래에 지은 사찰로 일설에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창건 당시 만복사는 상당히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만복사에 기거하던 승려들이 시주를 마치고 저녁나절에 돌아오는 광경이 장관이어서 이러한 장관을 남원 8경(南原八景)의 하나로 꼽게 되었으니 곧 만복사 귀승(萬福寺歸僧)이 그것이다.
그러나 만복사는 조선조 중엽 정유재란으로 말미암아 왜적에 의해 소실되어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당시의 유물로 5층석탑·당간지주·석불입상·석좌대·석인상 등이 전해오고 있다.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은 만복사를 배경으로 "만복사저포기"라는 한문소설을 남겨 한문소설의 효시를 이루었으며 당시 만복사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만복사지석좌(萬福寺址石座)
만복사지에 다른 3점의 보물과 함께 자리 잡고 있는 이 석좌는 화강암으로 된 고려시대의 유물이다. 이 석좌는 원래 35척의 청동불상을 모셨던 6각형 좌대로 중간 받침돌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단 하나의 돌로 다듬어 졌다는 점 또 대부분의 좌대가 8각형이거나 원형인데도 이 석좌는 6각형을 이루어 졌다는 점이 독창성을 높여주고 돌로 조각된 좌대 가운데서 그 예가 흔하지 않을 정도로 크기가 거창함이 특별하다는 인정을 받는다.
▲만복사지석불입상(萬福寺址石佛立像)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불상이다. 석불입상은 얼굴이나 몸 등에서 매우 원만하고 부드러운 성격이 드러나 있지만 옷 주름이나 몸의 자세는 다소 어색하고 위축된 면이 보인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쇠퇴해가는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만복사지오층석탑(萬福寺址五層石塔)
▲만복사지당간지주(萬福寺址幢竿支柱)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만인의총(萬人義塚)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 관. 군 1만여 의사들의 호국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으로 주민 6천여 명을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분투 끝에 장렬하게 모두 순절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들은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612년(광해 4년) 충렬사를 건립하였다.
만인의총은 충의선양 차원에서 유적보호사업이 잘 이루어진 듯, 제법 넓은 공간에 충혼을 기리는 사당과 사당 뒤의 무덤, 사당 아래의 기념관, 그리고 탑과 비석들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다.
지리산산행시 귀연의 단골집 장수촌(011-9614-1517 조윤숙)으로 이동하여 산삼해님이 중국에서 가져온 태산명주를 곁들인 푸짐한 저녁만찬을 마치고 귀로에 오른다.
덕유산휴게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헤어지기 아쉬운 작별을 나누며 지리산 번개산행은 끝이 난다. 산행 안내해 주신 산삼해님, 운전해 주신 세 분(청산, 정암, 산에가자)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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