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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13. 중봉골

산행일 : 2006년 7월 30일(일)

 

산꾼들을 가득 태우고 대전을 출발한 버스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질주하다가 언제나처럼 덕유산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한다. 휴게소 화장실 뒤쪽의 전망대에서 모녀가  녹색의 들판을 응시하며 칠월의 마지막 휴일 아침을 열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단성요금소를 빠져나가 20번 국도를 타고 시천 방면으로 진행한다. 덕천강변은 피서객들 차지가 되었고 중산리계곡도 수많은 인파로 시끌시끌하다.

 

8시 30분. 중산리매표소 주차장은 이미 만차가 되었는지 공단직원이 진입로를 막고 차량 진입을 통제한다. 하차하여 매표소를 향해 포장도로를 걷는데 멀리 천왕봉의 웅장한 자태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오른쪽으로 휘어 돌아가는 포장도로와 숲 속을 통과하는 갈림길에서 단체 기념 사진을 찍고 숲 속 길을 지나 매표소에 닿는다. 다시 한 번 천왕봉의 모습이 시야에 빨려 들러온다.

매표소를 지나 법계교를 건너면 우천 허만수 선생 추모비가 있고, 길이 갈라진다. 왼쪽은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 주 등산로이고 오른쪽 포장도로는 청소년 수련원으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 포장도로를 따라 30분을 이동하면 청소년 수련원 입구에 위령비가 보인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달랜다.

법계사 이정표를 지나 자갈 박힌 평탄한 길을 걷다보면 출렁다리와 만난다. 출렁다리를 건너 10분 더 가면 「순두류아지트 0.7㎞」라는 표지판을 만난다. 법계사로 향하는 나무계단 직전에 오른쪽 "등산로 아님"이 들머리지만 순두류아지트를 구경하기 위해 무속행위금지 표지판이 서 있는 곳으로 들어선다.

순두류아지트 안내판이 서 있는 계곡 곁 너럭바위가 신선너덜이다. 신선너덜은 그 옛날 마고할미가 장독간에 모래를 깔고 싶어 치마에다 모래를 싸가지고 가던 중 구멍 뚫린 치마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렸는데 이 모래가 커져서 바위덩어리로 돼 신선들이 노닐었다 해서 신선너덜이 됐다는 전설이다.

 

계곡을 건너 20m 진행하면 순두류 아지트가 있다. 겉보기에는 아지트 같은 느낌이 들지 않지만 좁은 바위틈 사이로 들어가면 꽤 넓은 공간이다. 지리산 빨치산의 지휘본부가 있었던 이곳은 거대한 바위에 덮인 지형과 풍부한 물을 갖춘 요새로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토벌대에게 가장 큰 애로를 안겨준 장소다.

다시 되돌아 나와 계곡을 건넌다.  신선너덜부터 중봉골(용수골)인 셈이다. 신선너덜 아래의 계곡은 굳이 부르자면 순두류계곡이며 순두류계곡은  중산리 매표소까지에 해당하고 그 아래는 중산리계곡으로 구분할 수 있다. 흔히들 이 중봉골을 일러 "지리산 최후의 비경" "미답의 계곡" 등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천왕봉과 중봉 사이의 가장 큰 계곡인 중봉골은 마야계곡이라고도 부르는데, 석가여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머물렀던 전설이 전해진다.

뚜렷한 등산로가 이어지지 않고 희미한 흔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나, 계곡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태고의 신비를 자랑하며 적막감마저 감도는 계곡은 지리 여느 계곡과 마찬가지로 풍족한 수량이 반석 사이를 헤치며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지리산의 정식등산로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적은 탓에 중봉골은 원시(原始)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길은 희미해지는 듯 하면 다시 또렷해지기를 되풀이한다. 경사가 점점 급해지면서 주위의 경관은 신비롭고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한다.

10시 45분. 담비에게 공격당한 고라니가 도망가면서 계곡 물에 빠져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하는 너무나 애처로운 모습이 카메라에 순간 포착된다. 담비가 물어 뜯은 상처가 목에 극명하다.

시원스럽게 흘러내리는 용추폭포가 아름다움과 거친 자연의 멋 그대로를 느끼게 한다. 5m가량의 높이와 깊은 소(沼) 이외에 별다른 특징은 없고 큰 바위틈 사이를 흐른다.

작년에 찾았던 칠선 계곡에 이어 또 한번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은 지리의 비경에 넋을 놓는다.

분홍색깔의 산수국과 고목에 핀 버섯도 눈을 즐겁게한다.

11시 15분. 말리기 위해 바위에 아무렇게나 널어놓은 젖은 옷가지와 이불이 눈에 띤다. 계곡을 건너가보니 움막이 있다. 이런 외진 곳에 움막 생활을 하는 사람은 누굴까, 왜 이런 곳에서 세상을 등지고 사는 걸까..도인인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정작 사람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다시 계곡을 건너 냉기가 감도는 길을 이어간다.

11시 35분. 계곡에 잠시 물줄기가 끊기자 세 분이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하산하신다고 한다.

12시 정각. 물이 다시 보이는 계곡에 삼삼오오 모여 점심 식사를 한다. 30분간의 달콤한 점심식사와 휴식을 끝내고 길을 이어간다. 곳곳에 부러져 길을 막고 누운 고목이 진행을 방해한다. 고개를 숙이고 아래로 때론 위로 넘어 통과한다.

 

정상의 턱밑 해발고도가 매우 높은 곳까지 크고 작은 소(沼)와 폭포가 자리잡고 있어 지리산의 깊고 깊은 속내에 신비감이 느껴진다. 흘러내려 오는 계곡 물을 그대로 퍼마시고 수통에도 가득 채운다. 멋진 폭포 앞에서 모두들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고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권마간산호 집편고불가(倦馬看山好 執鞭故不加)라" 게으른 말을 타야 산 구경하기가 좋다는 말이다. 뒤에 처져 맘껏 호사를 누린다.

희미한 흔적을 따라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는데 땀이 비 오듯한다. '엄마찾아구만리'라는 표지리본을 보면서 잠시 웃었는데 우리 일행이 중봉 찾아 구만리가 될 줄이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두일행의 꼬리를 놓치는 바람에 물 마른 계곡을 건너 오른쪽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왼쪽 길로 접어들었다.

 

힘겹게 올라서자 커다란 바위가 길을 막아서고 오른쪽으로 멀리 콘네이너 박스가 눈에 들어온다.

이리저리 길을 찾아 헤매다가 일행의 의견을 모아 표지리본이 있는 길을 1-2분 내려서니 왼쪽으로 방향이 꺾이면서 길이 이어진다. 조금 올라서니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조금 더 진행하니 아~천왕봉이 코앞이다. 일행은 신과 통하는 골짜기라는 통신골을 통해 천왕봉으로 오르고 혼자 동릉을 기어오른다. 동릉에서 바라보는 천왕봉(1,915.4m)은 색다른 모습이다.

14시 40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는 천왕봉의 모습에 한껏 취한 뒤 오른쪽 아래로 빙 돌아 천왕봉으로 오른다. 산행을 시작한 지 약 6시간 소요.

생전 처음으로 천왕봉에 올랐다는 관홍님은 감격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한다. 멀리 중봉이 한 눈에 조망된다.

천왕봉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중봉으로 향한다. 중봉까지는 약 30분 거리다.


중봉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면서 기다리던 헤어진 일행과 반가운 해후를 한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과 가장 가까운 봉우리인 중봉(1,875m)은 숱한 지리산의 준봉들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며, 천왕봉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웅장한 느낌으로 올려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지니고 있다. 남쪽의 낮은 봉우리들을 향해 열린 조망은 운해와 어우러져 형용하기 힘든 장관을 연출한다.

중봉에서 조금 진행하면 출입통제 안내판이 서 있다. 울타리를 넘어서면 하봉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하산은 오른쪽 치밭목을 향해 내려간다. 10분 정도 내려가면 길을 막아선 주목 한 그루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협곡과 구상나무가 어우러져 만드는 풍광은 한 장의 그림엽서다.

16시 정각. 써리(써레)봉에 오른다. 써리봉은 바위들 솟은 모양이 마치 '써레'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써레는 갈아놓은 논바닥의 흙덩이를 바수거나 바닥을 판판하게 할 때 사용하던 농기구이다. 써리봉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겹겹이 이어지며 펼쳐진 높은 산줄기들 사이로 흰 구름들이 떠다니고 멀리 함양 독바위가 조망된다.

30분 정도 진행하면 치밭목대피소 1km 이정표와 출입통제 안내판이 보인다. 황금능선 초입이다. 1979년도 당시 세석산장 관리인으로 있던 <정원강>님께서 낫으로 길을 내며 개척한 산길로서, 산길을 다 만들고 나서 가을날 써레봉에서 구곡봉을 지나 덕산의 덕천강가로 이어진 능선을 바라보며 가을능선의 그 아름다움에 스스로 [황금능선]이라 일컫게 된 것이라 한다.

치밭목으로 가는 좋은 길을 버리고 재빨리 오른쪽 울타리를 넘어서 빠르게 진행한다. 조망바위에 서면 운해 저고리를 걸친 써리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장관이다.

험하고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늦은목이에 닿는다. 그대로 직진하면 황금능선으로 이어지고 오른쪽 길은 중봉골로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너덜지대가 나타난다. 너덜지대를 조심조심 내려선다. 중봉샘에서 식수를 보충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식수통은 바닥을 드러내고 갈증은 더욱 심하다.
 
중봉계곡과 만난다. 배낭을 내려놓고 계곡 물에 머리를 쑤셔 박고 갈증을 달랜다. 계곡 물이 이렇게 맛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종봉골 산허리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산길을 따라 20여분 내려서면 법계사로 오르는 길과 만나고 10분을 더 내려서 위령비가 있는 원점에 도착한다.

 

휴식을 취하면서 후미를 기다린다. 고문님이 건네는 참외가 꿀맛이다. 후미와 동행하며 안전산행을 돕던 청산님이 도착하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터벅터벅 내려간다.

19시 30분. 중산리매표소를 빠져나와 용궁식당에서 시원한 맥주로 갈증을 풀고 식당에서 제공한 봉고를 타고 주차장에 도착하니 일행들이 환호하며 반긴다.

 

어딘가를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은, 그곳을 아는 자만의 아름다운 특권이다. 단 한 번의 스침으로도 가슴 벅찬 추억을 안겨준 하루, 일상으로 돌아오는 차속에서 그곳을 추억하며 모두들 들뜬 분위기다. 세상의 무게에 짓눌린 채 변해 가는 오염된 마음을 정화하고 추스를 수 있는 이번 산행은 분명 내일의 삶에 크나큰 활력소가 될 것이다. 지리산이 더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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