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8(일) 서해랑길 89구간(18.6km) : 대부남동 보건진료소-(7.6km)-동주염전-(5.5km)-상상전망대-(4.4km)-탄도항-(1.1km)-전곡항
봄의 문턱에 들어선다는 절기인 입춘(立春)이 지났지만, 오늘은 올겨울 들어 가장 혹독한 추위가 맹위를 떨친다. 뒤풀이 장소를 고려해 이번에는 코스를 역방향으로 걷기로 한다.
대부도는 시화호 방조제 등 간척사업과 도로 연결로 육지와 맞닿아 있어 행정적으로는 여전히 섬으로 분류되지만, 자연 상태의 섬 모습은 희미해졌다. 또한 본섬인 대부도를 비롯해 선감도, 탄도, 불도, 구봉도, 풍도, 육도 등 주변 섬들을 함께 아우르면, 경기도에서 가장 큰 섬 권역을 이룬다.

햇살은 품에 안고, 매서운 바람은 등에 지며 걷다 보면 조금은 덜 춥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버스에서 내린다.
행낭곡 마을 입구에서 단체 기념 사진을 찍고 걷기 시작해 조금 떨어진 역방향 시작점, 남동보건진료소 입구에 도착했지만 서해랑길 89코스의 끝과 90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이 보이지 않아 조금 당황스럽다.


보건진료소 앞 바닷가 비룰정 정자 옆에 놓인 커다란 빨간 우체통은, 길 위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작은 설렘이다. 바다와 갯벌의 차분한 풍경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색이, 이곳이 단순한 통과 지점이 아니라 기억을 남기고 마음을 쉬어가는 자리임을 알려주는 듯하다.

우체통에 서해랑길 89코스 종점이자 90코스 시점 변경 안내문이 붙어있다.

알고 보니 원래 전곡항에서 시작해 남동보건진료소 입구에서 끝나던 89코스 종점이, 2024년 하반기경 560m 떨어진 고랫부리입구 버스정류장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를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되돌아 갔다 오기에는 날씨도 너무 춥고 거리도 만만치 않다. 어차피 다음 번에 걸어야 할 길이기에, 안내판 사진은 다음에 찍기로 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혹한 속에서도 서해랑길을 이어가려는 마음만큼은 여전히 단단하다.

조경수가 멋지게 어우러진 건물이 눈에 들어오고, 태극기까지 펄럭이고 있어 평범한 가정집은 아닌 듯한데, 정작 그 정체를 알려줄 현판이나 안내판은 보이지 않는다. 괜스레 더 궁금증을 자아내며, 발걸음은 자연스레 그 앞에서 잠시 머문다.

대부도에서는 서해랑길, 경기둘레길, 대부해솔길이 같은 길을 공유한다. 대부해솔길은 경기 안산시 대부도 일대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둘레길로, 해(海)와 솔(松)이 어우러진 길이라는 뜻처럼 바다와 소나무 숲길을 함께 걸을 수 있다. 약 74km에 걸쳐 총 7개 주요 구간으로 나뉘어 있어 바다·갯벌·염전·숲길 등 다양한 풍경을 만난다.
쪽박섬에서 유리섬박물관까지 약 11.5km, 대부 해솔길 4코스는 해안선을 따라 걷는 구간이 많아 갯벌과 바다 풍경이 잘 어우러진다.

코스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짧은 숲길.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고요한 공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숲길을 지나면 한동안 농가들의 정겨운 풍경이 이어진다. 소박한 마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발걸음 옆으로 갯벌이 함께 보이는 구간도 나타난다. 갯벌과 나란히 난 길을 천천히 걸으며 바다의 숨결을 느낀다.

서해랑길 89코스 주변에는 예쁜 펜션과 독특한 모양의 이색적인 숙소들이 곳곳에 자리해, 걷는 내내 눈이 즐겁다. 스쳐 지나가기 아까운 풍경 앞에서 자연스레 발걸음이 느려지고, 카메라에 담는 재미도 솔솔 더해진다.








고랫부리 갯벌 습지 보호지역을 지나간다. 이 일대는 국가습지보호지역이자 람사르 습지 협약에 따라 보호받는 갯벌로 지정되어 있어, 철새와 갯벌 생물들의 중요한 서식지 역할을 하고 있다.
"고랫부리(고래부리)"라는 이름은 이곳 지형의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리'는 뾰족하거나 돌출된 지형을 뜻하는 옛말이며, 갯벌이 바다 쪽으로 돌출된 해안 지형이 마치 고래의 부리처럼 보인다는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중부흥슈퍼 버스정류장에서 도로를 건너 마을로 들어간다.

서해랑길 거리 이정표 위쪽에는 89코스 종점이 3.2km 로 표시되어 있는데, 아래쪽에는 종점까지 4.2km로 적혀있다. 동주염전까지 4.5km 표지판은 바닥에 떨어진 채 방치되어 있어 사후 관리가 아쉽다.


베르아델승마클럽부터 동주염전까지 약 12.5km, 대부해솔길 5코스는 염전과 방조제 길이 길게 이어져 바다 내음과 함께 산책 느낌으로 걷기 좋다. 주변 펜션단지와 자연 풍광이 어우러진다.


대부 포도로 만든 그랑꼬또 청수와인이 경주 APEC 공식 만찬주로 쓰일 정도로 포도는 대부도 특산물 중 하나다. 해풍을 맞고 자란 캠벨이 주종이었는데, 요즘엔 샤인머스킷으로 많이 교체되었다고 한다. 포도로 유명한 곳답게, 비닐하우스 안에는 가지런히 뻗은 포도나무와 잘 정돈된 가지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줄을 맞춰 늘어선 덩굴 사이로 햇살이 스며든다.

대부도 팬션 시티 방향으로 걷는다.



대부도에 조성된 유럽풍 콘셉트의 테마형 펜션단지 대부도펜션시티를 지난다.



'팬션시티'라는 이름에 걸맞게 넓은 부지에 다양한 스타일의 객실(지중해풍, 런던/파리/로마 등 테마 동 이름) 및 오토캠핑장, 감성 카라반 등이 보인다.



팬션 시티를 지나 만난 한옥 느낌의 감성 카페 Karpon(카르폰)은, 고즈넉한 분위기와 자연 풍경 속에서 쉬어가기 좋은 곳인데 오늘은 휴무라 문이 닫혀있다.

평화로운 마을 풍경을 감상하며 걷다 보니, 멀리 동주염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좁다랗게 이어진 상동 방조제 길로 들어서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오른쪽에는 끝없이 이어진 갯벌, 왼쪽에는 고즈넉한 염전이 자리한 길은 서해랑길만의 매력이 제대로 느껴진다.

동주염전은 옹기 타일을 이용해 바닷물에 태양의 열과 바람의 기운을 모아 천일염을 만드는 전통 방식을 고집하는 염전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소금 생산을 이어왔으며, 현재는 백씨 가문이 정통 천일염의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연과 정성만으로 천일염을 만들어 온 곳. 그 품질을 인정받아 과거 청와대에 납품한 이력도 있다고 하니,그 장인 정신이 더욱 깊게 느껴진다.

동주염전은 아직 소금 생산철이 아니라, 한산하고 다소 황폐한 느낌이 감돈다. 반짝이던 소금밭 대신 비어 있는 염판과 고요한 풍경이 이어지며, 계절을 기다리는 염전의 숨 고르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오히려 긴 시간 이어져 온 염전의 역사와, 곧 다시 시작될 노동의 기운을 조용히 상상하게 된다.

동주염전(東洲鹽田)은 동쪽에 있는 섬 또는 모래섬의 염전이라는 뜻으로, 대부도 동쪽 해안의 갯벌, 모래섬 지형을 이용해 만든 염전이라는 지리적 특징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동주염전 사무실을 지나면 동주염전 체험장이다. 본래 염전의 역사와 소금 만드는 전통 과정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곳으로, 이미 완공됐음에도(시설 조성 완료), 운영권 입찰이 여러 차례 유찰되면서 수년째 정식 개장·운영이 되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 점심상을 펼친다. 냄비에서는 라면이 보글보글 끓고, 지금 제철인 과메기와 마가목 담금주, 떡과 빵, 과일 등 각자의 배낭에서 하나둘 꺼낸 음식들이 어느새 진수성찬이 된다. 특별한 상차림은 아니지만, 함께 나누기에 더없이 풍성하고 따뜻한 길 위의 한 끼다.


바람의 언덕을 내려서자 시야가 트이며 갯벌이 눈앞에 펼져진다.






대부도 본섬을 뒤로하고, 대선방조제를 따라 천천히 선감도로 넘어간다. 섬과 섬을 잇는 이 길 위에서 바다와 하늘이 나란히 펼쳐진다.



선감도에 들어서면 걷는 즐거움에 더해 소소한 재미를 주는 포토 스팟들이 눈에 띈다.


길가 곳곳에 만들어 놓은 재치 있는 문구의 아기자기한 조형물들과 의자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자연스레 카메라를 꺼내 들게 만든다.


풍경과 어우러진 유머 한 스푼, 그 앞에 서서 사진 한 장 남기다 보면 선감도의 기억은 조금 더 선명하고 따뜻해진다.


다음 백과와 나무위키에 따르면, 선감원(仙甘園)은 조선총독부가 1941년 태평양전쟁에 투입할 인력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도에 설립한 감화 시설이다.
이곳에는 부랑아와 불량배, 경범죄자뿐 아니라 항일 행위자나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낙인찍힌 청소년들까지 ‘교화’라는 미명 아래 강제로 수용되었고, 이들은 강제노역은 물론 징용과 징병에까지 동원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선감원은 1982년까지 운영되며, 부랑아 갱생과 교육을 내세워 아동과 청소년을 강제로 연행해 격리 수용했다.

원생들은 중노동과 상시적인 폭력, 고문 등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었고, 많은 이들이 구타와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거나 섬에서 탈출하려다 바다에 빠져 숨졌다.


이는 형제복지원과 삼청교육대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의한 무자비한 연행과 인권유린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오늘날까지도 생존자들은 깊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으나, 이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명예 회복은 여전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숲길로 들어선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숲 길을 걸으니 절로 스트레스가 풀린다. 숲길 중간에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기도가 깃들어 있을 돌탑도 보인다. 열심히 걷다 보니 벌써 코스의 절반가량을 왔다.

본격적으로 대흥산 산행이 시작된다.



대부도 대흥산은 높지는 않지만, 바다와 섬 풍경을 함께 품은 아기자기한 산이다. 완만한 오르막과 잘 정비된 길 덕분에 부담 없이 걸을 수 있고, 정상에 서면 탁 트인 서해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화장실에 잠시 볼일을 보고 다시 배낭을 고쳐 맨다.

상상전망대로 오른다.




바다향기수목원의 상상전망돼는 서해랑길 89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모든 상상이 전망되는 곳이라는 뜻으로 '상상 전망대'가 아닌 '상상 전망돼' 란다. 이름부터 유쾌한 공간이다.

전망대에 오르자 수려한 서해안의 경관이 발아래 펼쳐진다.


시야 가득 서해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해안선과 잔잔한 바다, 그 너머로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들어온다.


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 내음까지 더해져, 잠시 말없이 서 있기만 해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순간이다.


전망대 안내판에 적힌 섬들 이름을 보며, 눈앞에 펼쳐진 실제 경관과 맞춰본다. 글로 적힌 이름과 눈으로 보는 풍경이 어우러질 때, 그 장소가 지닌 의미와 이야기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시간에 쫒겨 바다향기수목원 관람은 패스하고 피톤치드 가득 들이키며 숲속을 계속 걷는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산이라기보다는 완만한 구릉 하나를 넘게 된다.



선감도 대흥산 정상에는 ‘팔효정’이라는 육각정자가 자리하고 있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팔효정’은 여덟 가지 효를 실천하자는 뜻을 담아 세워진 정자로, 이곳을 오르는 모든 청소년과 시민들이 효의 마음을 되새기길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팔효정 정자에 서면 탄도항과 누에섬이 한눈에 들어오고, 시야 가득 탁 트인 서해의 풍경이 펼쳐진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풍경이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탄도항 풍력발전기와 케이블카가 또 다른 풍경을 더해준다. 이제 코스의 끝도 얼마 남지 않았다.






불도방조제를 따라 걷는다.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닷바람은 제법 날카롭지만, 그 속에는 묘한 청량함이 함께 묻어 있다. 차가운 바람에 몸은 움츠러들고 발걸음은 빨라진다.

불도방조제 끝에서 불도봉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숲을 빠져나오자 길가에 횟집들이 즐비하다.


불도 정문규 미술관 버스정류장에서 대부 해솔길 7-1코스 시점방향으로 진입한다.


작은 언덕을 내려서자 엄청 넓은 파크 골프장이 시선을 압도한다.

그 끝에 경기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대부 광산 퇴적암층이 자리하고 있다.



별 생각없이 도착했는데 눈앞에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안산 대부광산 퇴적암층은 1988년 규석을 채굴하기 위해 개발된 광산이다. 이후 1999년과 2000년, 채굴 과정에서 약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 화석이 발견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에 따라 이 일대가 먼 옛날 호수였으며, 모래와 진흙이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 지금의 지층을 이룬 곳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광산은 2001년 폐광되었고, 2003년에는 그 학술 가치와 보존 필요성을 인정받아 경기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지질과 역사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관광명소로 조성되어, 방문객들에게 1억 년 전 시간의 흔적을 조용히 들려주고 있다.




좀 더 멋진 모습을 보기 위해 탄도봉 전망대로 올라간다.


중간중간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듯 드러나는 호수의 풍경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가지 사이로 얼어있는 호수의 수면을 마주할 때마다, 걷는 발걸음을 잠시 멈춘다.

탄도봉 전망대에 올라서면, 전곡항과 제부도 그리고 누에섬과 갯벌 위에 설치된 풍력발전기 3기가 조망된다.




반대쪽 전망대에서 대부 광산 퇴적암층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숲길을 내려와 탄도항으로 향한다.


대부 해솔길 7코스는 일부 구간 공사로 노선을 변경하여 7-1코스로 대체 운영되는데, 탄도항에서 대부도관광안내소 약 17 km, 7-1코스는 해안·숲길·지질명소·전망 포인트 등 대부도의 풍경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비교적 긴 코스다.

탄도항에서 탄도교를 건너 탄도방조제 위에 발을 올린다.

시화호 남쪽 수문이 자리한 탄도방조제와, 북쪽의 시화방조제가 바닷물을 막아서면서 오늘의 시화호가 만들어졌다. 시화호가 생기기 전, 이 길은 섬과 육지를 이어 주던 유일한 통로였다.


지금은 고요한 호수를 곁에 두고 걷는 평범한 길이지만, 한때는 세상과 섬을 잇는 마지막 끈이었음을 떠올리면, 발걸음마다 오래된 시간의 숨결이 스며드는 듯하다.



드디어 서해랑길 89코스의 시점, 오늘의 종점인 전곡항에 도착한다.

긴 여정의 끝에서 만나는 항구의 풍경이, 오늘의 걸음을 조용히 위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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