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6(일)
DMZ평화의 길 26-1코스(15.8km) : 두타연 갤러리-(3.0km)-뱅이골 소공원-(2.8km)-도고 터널-(3.6km)-도사 삼거리-(3.5km)-동면사무소-(2.9km)-피의 능선 전투 전적비
세 달 만에 다시 걷는 DMZ 평화의 길.
산티아고 순례길과 포르투갈, 스페인에서의 시간은 마치 오래된 꿈처럼 아득하다. 타인의 땅에서 낯선 언어와 풍경 속을 걸으며 채워졌던 발걸음이, 이제 다시 익숙한 우리 땅, 그 끝자락에서 이어간다.
세 달 전의 나와 오늘의 내가 이어지는 길 위에서, 평화는 거창한 말이 아닌, 그저 걸을 수 있음에 있는 것임을 다시금 느낀다.
대전에서 양구까지 버스로 4시간이 넘게 걸린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산과 들, 이름 모를 마을들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도착지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멀다'는 말이 이토록 실감 나긴 처음이다. 하지만 그 거리만큼 마음도 천천히 비워진다. 번잡한 도시의 일상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고요한 자연과 맞닿을 준비가 되어간다.
11시가 거의 되어서 두타연 가는 길 3km 앞 평화 쉼터(두타연갤러리)앞에서 하차한다. 고요한 아스팔트 도로 위에 해병대 장갑차가 묵묵히 자리잡고 있다. 그것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는다.
원래의 DMZ 평화의 길 26코스는 민간인 통제구역이라 사전 예약이 필수다. 그래서 대체 우회 코스인 26-1코스를 따라 걷는다.
눈 앞에 풍경은 전쟁의 상흔보다 평화의 안온함에 가까웠다.






DMZ 평화의 길은 소리 없는 말로 기억을 속삭이고, 침묵으로 마음을 어루만진다. 다시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여정의 연장이 아니다. 세계의 끝자락에서 만났던 나를, 다시 이곳에서 조용히 마주하는 일이다. 떠났던 시간이 있었기에 이 길의 고요함이 더욱 깊이 다가오고, 걸음 하나하나가 감사로 물든다.

참가한 인원의 절반은 두타연 쉼터에서, 절반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뱅이골 소공원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습한 공기가 뺨을 적시는 와중에도 흐린 하늘이 햇빛을 가려주어서 다행이다.


학령고개를 넘는다. 예로부터 학이 자주 날아들던 곳이라 하여 '학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길가에 눈길을 주니, 작고 붉은 산딸기가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잎 사이로는 다래덩굴이 얽히고, 풀잎 위에는 느릿한 달팽이 한 마리가 흔적을 남기며 지나간다. 사람이 덜 닿은 만큼 자연은 스스로 숨을 쉬고, 작은 생명들이 제 집처럼 머문다. 산딸기 하나, 다래 하나, 그리고 달팽이 한 마리. 이 소박한 풍경이 바로 청정지역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두타연가는 길" 식당의 3代 막국수 유혹을 뿌리치고 일행의 뒤를 따른다.


도고터널 입구에 적힌 "조선백자 원료의 중심 양구 백토"라는 글귀는 과거 조선백자를 빚던 원료의 산지로서 양구의 자긍심을 보여준다.
양구(楊口)라는 지명의 유래는 '버들 양(楊)'이라는 한자에서 보듯, '버드나무가 많은 지역'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구(口)’는 한자로 ‘입구’ 또는 ‘통로’라는 뜻이 있어, 이 지역이 내륙 깊은 산악지대를 잇는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음을 지명에서 알 수 있다. 양구는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특히 DMZ 인근 접경지역으로서 역사적·군사적 의미도 크다.



아스팔트 도로 위를 걷는 길은 조금은 지루하고 불편했지만, 도고터널을 지나자, 통행 차량이 드물어 걷기 한결 수월해진다.
도사리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조금 지나 군부대 철조망 옆에서 점심상을 편다. 삶은 호박잎쌈은 입안에서 향긋하게 퍼지고, 일행들의 손이 분주하게 오간다.






양구는 우리 국토의 정중앙이다. 그래서 국토정중앙면도 있다.

점심 뒤 덕곡2리를 지나는데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교인들이 우리 일행을 유심히 바라보며 묻는다. "국토 순례 중이세요?" 아니요. "DMZ 평화의 길을 걷고 있어요."
이 길은 단순한 걷기가 아니라, 나라의 경계를 따라 걸으며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의 역사를 되새기는 순례길이기도 하다.







임당초등학교의 정자에서 마신 냉커피 한 잔이 더없이 시원하다. 동면사무소를 지나자 작은 면 소재지가 펼쳐지고, 서천변을 따라 코스가 이어진다. 임당2교를 지나 월운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임당교회를 지나 잠시 코스를 벗어나 펀치볼 전투전적비에 올라가본다.

펀치볼 전투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과 치열하게 맞붙었던 격전지다. 해안분지의 지형이 마치 판취볼(Punch Bowl, 화채그릇)을 닮았다 하여 미군들이 붙인 이름이다. 이곳은 1951년 가을, 국군 제5사단이 중심이 되어 벌인 공격 작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다. 해발 고지마다 포성이 울렸고, 분지 하나를 두고 수천 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바쳤다. 지금은 그저 평화로운 언덕과 논밭이지만, 그 아래는 피와 눈물로 얼룩진 기억이 있다.


월운리로 들어선다.








마지막에 만난 피의 능선 전투전적비는 또 다른 비극의 상징이다. 함경도 방향을 향한 고지선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로, 1951년 8월부터 10월까지 한 치의 땅을 두고 벌인 격전이었다. 적군과 아군 모두 막대한 희생을 치렀고, 능선은 이름 그대로 피로 물들었다. 지금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그때의 상처를 덮고 있지만, 이름만큼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DMZ 평화의길 26-1코스, 비록 우회한 길이었지만 평화를 염원하며 걸은 오늘의 걸음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버스를 타고 팔랑폭포로 이동한다. 쏟아지는 물소리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계곡물에서 얼굴을 씻고, 땀에 절은 몸을 식힌다. 간단한 뒤풀이 자리에서 시원한 수박 한 조각, 맥주 한 잔이 꿀맛이다.


대전에 도착하니 아직 해가 남아 있다. 오늘 하루도 국토의 끝을 걸었고, 역사의 심연을 들여다보았으며,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가슴에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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