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6(일)
DMZ평화의 길 22코스(15.3km) : 화천대교 -(3.4km)-미륵바위-(3.6km)-화천 꺼먹다리-(8.3km)-풍산교
죽암휴게소 정자에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한다.
오전 8시, 버스는 다시 출발하여 목적지로 향한다. 홍천강휴게소에서 잠시쉬었다가 조금 더 달려 화천대교 회전교차로에 도착한다. 날씨가 포근하다.
10시 50분, 단체사진을 찍고 파로호 산소 100리길을 따라 북한강변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다.
중공군을 깨뜨렸다는 의미인 파로호(破虜湖)의 원래 이름은 날갯짓 한 번에 구만리를 난다는 뜻을 가진 대붕(大鵬)이란 뜻의 호수였다.
따뜻한 공기를 가르며 걷기 시작한 길. 봄햇살이 잔잔히 드리운 채 고요히 흐르는 북한강은 아름다우면서도 묘하게 긴장감이 도는 풍경이 인상적이다. 그 길은, 지난 역사의 상처와 평화의 희망이 동시에 숨 쉬는 공간이다. 너무나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 속엔 역사의 무게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화천군은 지난 2014년에서 2016년 화천읍 대이리 북한강변 일대 넓은 면적에 눈개승마 86만 본을 심고, 공동 작업장을 조성했다.
눈개승마는 봄을 알리는 첫 봄나물이다. 이른 봄 고산 지역에서 눈을 뚫고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린잎이 삼(蔘)잎과 비슷하고 인삼, 두릅, 소고기 등 세 가지 맛이 난다고 하여 삼나물 또는 고기나물로 불리기도 한다.
뿌리가 깊고 단단하게 자라는 눈개승마는 본래 목적인 북한강 흙탕물 저감 역할뿐만 아니라 풍산리 주민들의 소득까지 올려주고 있다. <화천군 제공>
북한강과 나란히 달리는 461번 지방도로(평화로) 옆에 있는 "초림동 전설이 깃든 미륵바위"는 조선 후기에 세워진 절터(미륵 터)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6개의 바위다.
독특한 모양, 거대한 크기를 가진 돌들은 신령스러운 존재로 치성과 금기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때 돌은 치성을 드리는 이에게 복을 주고, 금기를 어기는 이에게 화를 내리는 야누스적 존재가 된다.
미륵바위에는 두 이야기, 소금장수 이야기와 초립동이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을의 장 아무개라는 선비는 늘 미륵바위에 치성을 드리며 과거를 준비하던 사람이었다. 드디어 과거를 보러 가는 날 어느 초립을 쓴 동자가 동행을 자청했고, 초립동이 덕에 넉넉히 한양에 도착해 큰 주막에 짐을 풀었다. 그런데 막상 계산을 할 때가 되니 초립동이가 사라져버렸고, 장 선비는 대금을 갚기 위해 머슴살이를 살다 과거도 못 치게 되어버렸다. 며칠 뒤 나타난 초립동이는 일절의 변명도 없이 ‘한양의 대감집 막내딸이 죽을 병에 걸렸는데, 이 환약을 먹여 살리라.’고만 할 뿐이었다. 장 선비는 그 말대로 대감집을 찾아가 딸을 고쳐줬고, 대감은 지난 번 과거에는 장원이 없어 며칠 뒤 다시 과거를 칠 것이라고 알려줬다. 마침내 장원급제를 한 장 선비는 양구현감으로 부임해 금의환향하게 되었는데, 동행하던 초립동이가 미륵바위를 지날 즈음 사라지자 그제야 미륵바위의 현신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산천어밸리(청정아리 풍차펜션)부터 미륵바위까지는 강원평화누리길 6코스 미륵바위길(15.4km)이다. 이곳부터 한묵령까지는 강원평화누리길 7코스 한묵령길이다.
미륵바위 왼쪽에 있는 커다란 금속조형물은 화가 임옥상의 "흐르고 또 흐르고"라는 작품이다. 원안에 삶이라는 글자를 넣었다.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다리는 북한강을 가로지르는 살랑교다.
살랑교 직전에 소설가 김훈이 이름지었다는 '숲으로 다리' 안내판이 있다. 숲으로 다리는 살랑교를 건너면 산소길이 있는데, 그 중에서 수면 위로 다리를 놓은 일종의 물윗길을 말한다. 즉, 살랑교가 숲으로 다리는 아닌 셈이다. 안내판만을 본다면 헷갈리게 한다.
살랑교는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와 대이리를 연결하는 길이 290m, 폭 3m의 인도교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는 살랑골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다리 중간에 투명유리로 스카이 워크존이 조성되어 있다. 걸음이 빠른 선두는 벌써 다리를 건너고 있다.
구만교는 해방 전 일제가 기초를 놓은 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소련군과 북한군이 교각을 세운 뒤, 휴전 이후 화천군이 상판을 올려 완성된 다리다. 멀리 보이는 백암산(白巖山, 1,179m)은 간밤에 눈이 내려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파로호 건너편에 화천수력발전소가 있다. 지어진지 70년이 넘은 발전소인데 아직도 발전을 하고 있다.
파로호에 깃든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은 두 가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군, 중국 내 한국 독립군과의 전투에 필요한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북한강 상류에 발전소를 만들었다. 6년이 넘는 공사 도중 강제로 징용을 당해 난공사에 투입된 한국인 중 1000여 명이 사고로 희생되었다 하니, 지금의 화천수력발전소와 화천댐은 우리 한국인의 피로 만들어진 것이다.
화천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공산 치하에 들었다가 6 · 25전쟁 때 국군의 북진으로 수복되었다. 1951년 5월에 있었던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소양강 전투는 아주 치열했다. 이때 중공군이 2개 군단 병력을 투입하여 대공세를 취해왔으나,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화천수력발전소를 탈환하였다.
한국전쟁이 고지전으로 이어지기 직전인 1951년 5월에 후퇴하던 중공군 수만 명이 강원도 화천 일대에서 숨졌으며, 그중 상당수의 시신이 이곳 호수에 수장됐다. 중공군을 깨뜨렸다는 의미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이름은 그렇게 생겨났다.
조금 더 걸으니 '화천 꺼먹다리'가 나타난다. 1940년대 일제가 남한 최초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세운 꺼먹다리는 건립 당시 원형을 잘 보존하고 한국 전쟁의 슬픔을 담고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채, 묵묵히 이곳을 지키는 상징적인 다리다. 구만교가 건설되면서 1981년 폐쇄되었다가 2007년 재정비하여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처녀고개를 오른다.
딴산은 외따로 떨어져 있어 딴산이라한다. 딴산 정면에서는 안 보이지만 딴산 뒤로도 물길이 나 있어 비가 오면 마치 강물 속에 딴산만 혼자 따로 우뚝 나와 있는 모양새가 된다고 한다.
딴산과 비래바위가 금강산 소속이라는 이유로, 금강산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승려들이 나와 이른바 '대여료'를 받아 갔다고 한다. 어느 원님이 '대여료' 마련에 고심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일곱 살 난 아들이 "그들에게 도로 가져가라고 하고 못 가져가겠으면 이제부터 '보관료'를 내라 하시라."고 조언을 한다. 아이의 대답에 귀가 번쩍 뜨인 원님과 얼굴을 붉히며 돌아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는 승려의 이야기는 지금 들어도 통쾌하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었다. 도령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갔고, 처녀는 도령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도령을 기다리며 매년 꽃버선을 나무에 매달던 처녀는 어느 해, 실족하여 죽고, 도령은 장원급제해서 돌아왔다.
처녀가 죽은 사실을 안 도령은 벼슬을 버리고 처녀의 원혼을 달래주었다. 그 후 마을에는 풍년이 들어 풍산리(豐山里)라고 불렀고, 처녀가 죽은 고개를 처녀 고개라 불렀다.
풍산교 아래에서 DMZ평화의길 22코스는 끝이난다.
DMZ 평화의 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기억’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길이다. 분단의 상처 위에 피어나는 평화의 희망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길. 어쩌면 평화란, 그렇게 조금씩 걸어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인지도 모르겠다.
버스에 배낭을 두고 풍산교 근처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는다. 탁자에 둘러앉아 따끈한 어묵탕을 앞에 두고 소주잔을 기울인다. 서로의 얼굴에는 피로함과 성취감이 교차하며 미소가 번진다.
머무른 흔적을 모두 지우고 귀가를 서두른다.
호법분기점 근처에 오자 차들은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천천히 움직인다. 하늘은 노을빛으로 붉게 물들고, 정체된 차들마저도 그 속에 잠시 멈춘 풍경의 일부가 된다. 비록 막히는 길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햇살 덕분에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진다.
속도를 잃은 도로 위에서, 뜻밖의 평온을 마주한다. 누군가에겐 짜증 나는 순간이었을 이 시간도, 이 햇살 아래에선 잠시나마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되어준다.
'평화누리길+DMZ평화의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DMZ평화의 길 21코스(풍차펜션~화천대교 회전교차로) (0) | 2025.03.16 |
---|---|
DMZ평화의 길 20코스(명월2리 버스정류장~풍차팬션) (0) | 2025.03.03 |
한탄강 주상절리길(잔도) (0) | 2025.02.03 |
DMZ평화의 길 17코스(남대천교~와수리 세월교) (0) | 2025.02.03 |
경기평화누리길 12코스(통일이음길) (0) | 2025.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