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 : 2010년 12월 19일(일)
산행코스 : 한티재-블랫재-운주산-이리재
동행 : 귀연산우회 31명
거리 및 소요시간 : 도상거리 약 5시간 30분 소요
오늘 산행은 낙동정맥 종주의 절반을 진행한 기념으로 한티재에서 이리재까지 약 5시간 30분 정도의 비교적 짧은 산행만 하고 포항 죽도시장으로 이동하여 그 곳 명물인 과메기와 물회를 먹는 맛기행을 겸하기로 한다. 버스는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로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차창 밖으로 겨울풍경이 스쳐간다. 아침식사를 위해 칠곡휴게소에서 정차하였다가 포항을 향해 달린다. 추수를 끝낸 논에는 소들의 사료를 얻기 위해 커다란 원통모양의 하얀 비닐 포장된 건초더미가 눈사람이 되어 시선을 끈다.
지난번 산행을 끝낸 한티재 터널 입구에서 하차하자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단체기념사진을 촬영하고 한티재로 오르는 것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한티재로 오르는 능선에 붙으면 한티터널 아래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겨울은 산의 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계절이다. 누군가는 겨울 산이 눈을 현혹하는 것이 없어 오히려 걷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다고 한다.
낙동정맥상의 실제 한티재로 내려서서 재킷을 벗어 배낭에 넣고 545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산길을 치고 오른다. 545봉에 도착하여 맥주로 갈증을 달래고 과일도 나누어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낙동정맥 상의 실제 한티재
△545봉에서의 휴식-과일도 나누어 먹고 맥주도 나누어 마시고...
블랫재으로 내려서는 길은 급한 내리막이다. "블랫재"라는 지명은 이 고개를 오르는 길목에 있었던 블랫골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유래한다. 이 마을 이름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절터 골에 신라시대 때 절이 있어 불교가 이 고개를 통해 다른 마을로 전래됐다고 해서 생긴 이름 "佛來"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재를 넘어가면 도적이나 범과 같은 야수의 피해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뜻으로 "不來"라고 한다.
△고운 겨울햇살이 내려앉은 블랫재 굽은 길은 아름다운 겨울 풍경을 선사한다.
△블랫재 오른쪽 도일리 마을전경
△310봉 삼각점
△421봉
△421봉 삼각점
421봉을 지나 낙엽이 쌓인 부드러운 능선길을 홀로 걷으며 잡념을 털어낸다. 선두 일행이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식사를 하며 반긴다.
△점심시간1-선두
△점심시간2-후미
안국사로 이어지는 갈림길에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 아래쪽 마을에 신라시대부터 "안국사(安國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모두 소실되고 현재는 암자만 하나 남아 있다고 한다. "안국사"는 현재 인비리 마을에 있어 그곳의 안국사를 "하 안국사"라고 하고, 이곳의 안국사를 "상 안국사"라고 한다.
조금 더 진행을 하면 능선을 따라 정면으로 돌탑이 있는 봉우리 방향과 오른쪽 경사면을 따라 운주산으로 질러가는 길이 갈라진다. 돌탑봉을 거쳐 운주산으로 향한다.
△돌탑봉
산 아래 절골은 신라시대 안국사(安國寺)가 있을 때엔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계곡 어귀에 하안국사(下安國寺)가 있고, 산 중허리 안국사지 곁에 상안국사란 암자가 있다.
운주산 정상은 금방이다. 운주산은 "산이 높아 멀리서 보면 항상 구름을 받치고 있는 기둥 같다."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기슭을 항상 감싸고 있어서 "구름이 머물러 사는 산"이라고도 한단다. 한자 표기가 어느 것이 맞는지 영천시에서 바로 잡아야 할 듯하다.
△이곳에는 한자로 "기둥 주(柱)"로 표기 되어 있는데 정상석엔 "살 주(住)"로 표기 되어 있다.
운주산은 산세가 험하여 예로부터 포항-영천사람들 왕래를 어렵게 했다. 그러나 이런 지리적 특성은 방어와 피난에 적합한 군사요충지 역할도 톡톡히 한 모양이다. 아래와 같은 설명이 이를 뒷받침한다.
'임진왜란 때 백암 김륵의 부대가 성을 쌓고 진터를 설치하여 왜적과 항전을 벌였으며, 1910년대 산 아래에 있던 안국사가 포항 지역 의병부대인 산남의진(山南義陳)의 근거지로 알려져 일제에 의해 불태워지기도 하였다. 산 중턱에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 전쟁 때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된 동굴이 있다.'
참고로, 산남(山南)이라 함은 경상북도 조령(문경 새재) 이남의 영남 지방을 일컫는 말이다. 산남의진(山南義陳)은 중추원의관 정환직이 고종으로부터 의병봉기의 밀지를 받고 그의 아들 정용기와 함께 영천을 중심으로 거병한 의병부대이다.
△운주산 아래 헬기장
△정시심(1641-1690), 조선 현종 2년(1661년)에 무과에 올라 충무위 대호군에 이르러 전주영장(營將)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었음을 감안하면 묘지는 약 320년이나 되었다.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 정시심 묘(折衡將軍 行龍驤衛副護軍 鄭時諶 墓)- 숙(淑)부인 송씨도 같이 표기된 것으로 봐서 부부 합장묘.
인비리 갈림길. "인비리(仁庇里)"의 유래가 재미있다. 이곳에는 먼저 추(秋)씨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하(河)씨가 뒤이어 들어와 거주하였으며, 경주 김씨가 세 번째 입주 하였다 한다. 추씨와 하씨가 타지로 떠난 뒤 마을이 커지고 장터가 생기며 역촌이 되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자, 어진 사람들은 숨어 버리게 되어 인비(仁庇)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소망전망대에서 바라본 대구-포항간 고속도로 전경
△ 618봉(돌탑봉)
△대구-포항간 고속도로
운주산-이리재-봉좌산 구간은 낙동정맥과 포항시 경계가 중첩되는 구간으로 포항 근교산 마니아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리재 산행날머리
운주산 동쪽은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이고 서쪽은 영천시 임고면 수성리이다. 그 사이를 잇는 고개가 '이리재'다.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의 옛 지명이 '이동' 이다. 이 마을은 파평 윤씨(尹氏) 집성촌이어서 윤동(尹洞)이라 불렀으나 차츰 타성이 이주해와 인자(人字)를 더하여 이동(伊洞)이라 고쳤다 한다. 이동 골짜기를 이리골로 부르고 고개마루를 이리재로 부른다.
△이리재1
△이리재2
산행 뒤풀이를 위해 포항의 죽도시장으로 이동한다. 약 1시간 소요.
포항의 구룡포는 과메기의 고장. 과메기 특구로 지정된 포항 대보면, 동해면, 장기면, 구룡포읍 등 호미반도에서 생산되는 과메기는 전국 생산량의 80%인 5000여 톤에 달한다. 구룡포항에서 호미곶에 이르는 바닷가 덕장에 가보면 주렁주렁 매달린 과메기가 냉동과 해동을 거듭하며 꼬들꼬들하게 건조되고 있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과메기는 원래 청어로 만들지만 청어 어획량이 적어 꽁치로 만든다고 한다(20마리 1만5천원)
△식당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빌리면 과메기는 손으로 찢어야 제맛이라고 한다.
포항의 흰살생선물회는 제주도의 자리돔물회, 속초의 오징어물회, 그리고 울릉도의 꽁치물회와 더불어 4대 물회로 통한다. 1년 동안 숙성한 고추장에 온갖 양념을 넣어 만든 육수가 맛의 비결로 매콤하면서도 칼칼한 맛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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