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 : 2008년 10월 10일(금)-11일(토)
살고 나서 후회한들 흘러간 세월 되짚어 볼 수 없는 일, 하고 싶을 때 해야 되고 보고 싶을 때 보아야 한다.
지난여름 지리산 종주 중 폭우를 만나 추위와 배고픔으로 벽소령에서 음정으로 탈출한 쌤들이 다시 지리산 종주를 계획하면서 동행을 하자고 한다.
성삼재를 출발하여 장터목산장에서 1박을 한 후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고 중산리로 하산하는 1박 2일 일정이다.
올 봄과 여름에 지리산 당일 종주를 했지만 1박 종주는 5년만이다. 지리의 품에 안기어 여유로운 발걸음을 옮기며 맘껏 지리의 가을을 가슴에 담고 오랜만에 천왕봉에서 일출을 볼 욕심으로 길을 나섰다.
10월 10일은 개교기념일이다.
0시 30분. 서대전역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모여앉아 닭똥집을 안주삼아 소주 한잔하면서 완주의 의지를 다진다.
0시 45분. 용산에서 밤 10시 50분에 출발한 여수행 무궁화호(대전에서 12500원) 열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토막잠을 청한다. 열차는 익산에서 전라선으로 접어들어 여수를 향해 달린다. 심청이의 고장 곡성을 지나면서 눈을 뜬다.
심청전에 용왕, 인당수, 뱃사람 등 바다와 관련된 용어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당연히 심청이 살았던 곳은 중국과 거리가 가까운 서해 바닷가가 아닐까 상상해 왔다.
그렇다 보니, 바다와는 먼 내륙 지방인 곡성이 심청의 고향이라니 얼른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예전에는 섬진강의 수량이 풍부해서 강을 따라 배가 내륙 깊숙이에 있는 곡성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새벽 3시 20분. 구례구역에 닿는다. 구례구역(求禮口驛)이 있는 곳은 행정구역상 구례군이 아니라 황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역이 있는 곳에서 섬진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야 구례읍이다. 구례읍내에서 구례구역까지는 약 7km가량 떨어져 있고 시내버스로는 10분 조금 넘게 소요된다.
역 명칭을 원래 구례역이라 정하려 하였으나 순천시 황전면 주민들이 자신들 동네에 타 지명이 붙은 역이 들어서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 간의 지혜로운 의견 조율에 의해 현재의 천안아산과 같은 요상한 이름이 탄생하는 건 면했다. 황전면 주민들이 자신들의 동네이지만 구례로 들어가는 길목이라는 특성을 감안해 구례 + 입 구(口) 자를 써서 현재의 '구례구역(求禮口驛)'이란 명칭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내리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지리산 종주를 하는 사람들이다. 역 앞에는 성삼재까지 가는 산꾼들을 태우려는 택시들이 기다리고 있다. 성삼재까지 요금은 대당 3만원, 약 20여분 정도 소요된다.
4시 10분. 성삼재를 출발하여 30여분 오르면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한다. 물 한 모금으로 거치러진 호흡을 고르고 약 10분 정도 더 오르면 노고단 입구인데 어둠속에 묻혀있다.
지리산에서 물맛이 가장 좋다고 소문난 임걸령 샘터까지는 1시간 거리다. 이곳에서 식수를 담고 25분을 걸어 노루목에 도착한다. 조망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한다. 거기서 20분을 더 걸어 삼도봉에 닿는다.
그 길에서는 늘 예기치 않았던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찾아온다.
걷다보면 생각은 담백해지고, 삶은 단순해진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일에만 몰두하고, 걸으면서 만나는 것들에게 마음을 열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길의 끝에 와 있는 것이다.
- 김남희의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1> 중에서 -
나무 계단을 내려서 화개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토끼봉을 오른다.
"산을 오르는 이의 고독감을 상상해 본다. 등반이라는 행위는 오직 자신의 싸움일 뿐 그 누구도 대신해 주지 못하는 철저한 고독의 길로 그 과정을 통해 얻는 건 결국 자신에 대한 재발견과 긍정이 아닐까?"
"깊은 산길에서 만나는 다 다르면서도 같은 얼굴들, 결국 그들을 통해 들여다보는 건 내 자신이다. 생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길 위의 길 역시 자기에게 이르는 길"이다. - 김남희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네팔트레킹 편에서-
토끼봉 헬기장에서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연하천으로 향한다. 반야봉을 넘는 운해가 장관을 연출한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함께 걷는 동반자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힘이 된다. 그 길이 멀고 험할수록 더욱 그렇다. 지리산 주능선 종주는 성삼재에서 시작하여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5.5km 주능선을 걷고 중산리로 하산하는 총 거리 약 35km 로 체력도 중요하지만 정신력이 필요하다.
산행은 새로운 만남이다. 바람을 만나고 소리를 만나며 그리운 사랑을 가슴에 담고 설렘을 만나게 된다.
늘 지리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쓰러져 가는 고목에서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산행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자기 정리의 엄숙한 도전이요 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이다.
문제는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사는가에 있지 않고 자기 몫의 삶을 어떻게 사는가에 달려 있다. 같이하는 마음이 있어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대피소를 예약했지만 입실 마감시간까지 대피소에 도착하지 않으면 예약이 무효가 된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일행과 헤어져 산행에 속도를 낸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심불재언 시이불견 -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이라 했으니 풍경은 사람의 마음만큼만 보인다.
덕평봉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지리산 종주 중 종종 보이는 산허리를 휘두른 운해는 신선이 노는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
이곳에 오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자유와 존재의 가치, 이거야 말로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세석대피소에 도착하여 관리인에게 물으니 단체 손님이 예약을 하여 대피소에 여유가 없다고 한다. 떡 한조각으로 허기를 달래고 배낭에 커버를 씌운 다음 장터목 대피소를 향해 촛대봉을 오른다. 장터목대피소까지는 1시간 30분 거리다.
촛대봉에 오르자 더욱 짙어진 농무가 점점 온 세상을 삼켜버린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주능선 곳곳이 다시 길을 재정비하여 보다 편안한 종주가 된다. 산길을 정비를 하면서 누군가가 석장승 모양의 돌을 세워 놓아 눈길을 끈다.
40여명의 젊은 남녀들이 동일한 유니폼을 입고 앞서 간다. SBS방송국의 신입사원들이 극기 훈련 중이란다. 도전하는 삶은 아름답다.
삶은 놀라울 만큼 깊고 넓은 그 무엇이다. 하나의 위대한 신비이고 우리들의 생명이 그 안에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나라이다. 문제는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사는가에 있지 않고 자기 몫의 삶을 어떻게 사는가에 달려 있다.
오후 4시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한다. 가뭄으로 식수가 부족하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중산리쪽으로 100여m를 내려가야만 식수를 구할 수 있다. 중앙홀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 왁자지껄하게 대피소의 저녁은 소란스러우면서 활력이 넘친다.
2시간 50분이 지나 일행이 무사히 도착하고 늦은 저녁만찬을 준비한다. 덕분에 취사장은 우리 일행이 전세 내다 시피 한다. 이샘이 삼겹살을 굽고, 윤샘이 참치 김치찌개를 끓이고 분주하다. 각자의 배낭에서 나온 이슬이와 로얄살루트까지 부족함이 없는 만찬은 오래 계속된다.
오전 4시 30분. 산장이 분주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해서 출발한다. 어제 밤에 남겨 놓은 찌개를 따뜻하게 데워 아침 식사를 하고 식수를 보충한 다음 랜턴으로 길을 밝히며 천왕봉으로 향한다.
산장을 출발한지 약 1시간. 어둠속에서 어렴풋이 정상의 바위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 위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멋진 그림을 연상시킨다.
남명 선생이 "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萬古天王峰 天鳴有不鳴)" 라고 지리산 영봉의 장엄함을 찬탄했듯 천왕봉은 여전히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보아도 거칠 것 하나 없는 천왕봉 정상에서의 전망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으며 지리산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천왕봉의 해돋이는 천지개벽을 보는 것 같은 천하의 장관으로 지리산 10경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6시 30분. 불덩어리가 솟아오르면서 3대가 덕을 쌓아야만 볼 수 있다는 천왕봉의 장엄한 일출(日出)이 시작된다.
지리산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기 위한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중산리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문창대 바위에 고운 최치원선생의 각자를 카메라에 담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문창대에는 고운최선생 장구지소(孤雲崔先生 杖屨之所 : 최치원이 지팡이와 짚신을 놓아두었던 곳)라는 문구가 암벽에 새겨져 있지만 그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나무계단을 내려서자 법계사 일주문이 멋진 모습으로 서 있다. 법계사는 국내서 가장 높은 곳인 해발 1450m에 위치한 사찰로 544년(신라 진흥왕 5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칼바위 길보다 부드러운 순두류쪽으로 하산 길을 잡는다. 지난여름 엄청난 굉음을 내며 물 흐르던 계곡은 물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왼쪽으로 보이는 출입금지 표시는 중봉골(속칭 마야계곡)이라 불리는 비경의 험난한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길이 20m의 출렁다리를 건너 부드러운 오솔길을 걷는다. 순두류는 해발 900m 지대에 3만여 평의 완만한 평지를 말하며 이름 그대로 두류산의 지세가 순하게 흘러서 산속의 평원을 이룬 곳이다.
화장실과 홍수 예경보 시스템이 있는 곳에서 넓은 비포장길이 이어지고 자연학습원과 갈림길에 1996년 8월 9일 헬기 추락사건으로 사망한 소방대원들의 위령비가 서 있다.
탐방지원센터까지는 법계사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고 중산리까지는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도보로 약 30분 걸어 1박 2일의 지리산 종주를 마무리한다.
△중산리에서 바라 본 천왕봉의 모습
중산리 주차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양념 삼겹살을 안주삼아 이슬이로 하산주를 하고 라면을 끓여 배를 채운다음 진주행 시외버스에 오른다. 진주까지는 약 1시간 10분이 소요되고 요금은 4700원이다.
진주에서 대전행 고속버스는 9600원이며, 약 2시간 20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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