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8일(금) - 혼자
이티재-구녀산-분젓치-좌구산-방고개(밤티)-질마재-칠보치-칠보산-596.5봉-송치재-모래재(19km, 8시간)
다음 주 히말라야트레킹을 떠나는 관계로 정맥팀과 동행하지 못하는 구간을 혼자 다녀오기 위해서 길을 나선다.
청원-상주간 고속도로 문의요금소를 나가 32번 지방도로를 타고 미원을 향해 진행한다. 청원군 미원면 수산리 도로변 남양홍문 효자각에서 잠시 차를 세운다.
이 효자각은 조선 정조 23년(1799)에 효행으로 증직된 우금헌(友琴軒) 홍이중(洪 中, 15763∼1661)과 그의 아들로서 이조판서에 증직된 효정공(孝定公) 홍석기(洪錫箕, 1606∼1680) 등 남양홍씨(南陽洪氏) 부자를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정면 1간 측면 1간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부자의 효자문 편액을 한 목판에 새겨 걸었다. 밖에는 "남양홍씨부자충효지려(南陽洪氏父子忠孝之閭)"라고 쓴 현판을 달았다.
7시 30분 이티봉휴게소 주차장에 주차하고 산행준비를 한다. 이티봉휴게소 뒤로 정맥 길이 열려있다.
구녀산성 성벽은 극히 일부만 원형이 남아있다. 구녀성(九女城)의 유래가 적힌 안내문이 있다. 내용을 보면
“구녀성의 축성 시기는 신라시대로 추정되며 석축형태로 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진다.
이곳 산정에 아들 하나와 아홉 딸을 가진 홀어머니가 있었다. 이들 남매는 모두 장사였는데 항상 불화가 잦아 마침내는 생사를 건 내기를 하게 되었다. 내기인 즉, 딸 아홉은 산꼭대기에 성을 쌓는 일이고 그 사이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는 것이었다.
내기를 시작한 지 5일이 되던 날, 어머니가 상황을 살펴보니 성은 거의 마무리가 다 되어 가는데 서울에 간 아들은 돌아올 줄 몰랐다. 이에 내기에 지게 되면 아들이 죽게 될 것을 생각한 어머니는 가마솥에 팥죽을 끓여 딸들을 불러 모아 팥죽을 먹으며 천천히 해도 되리라 했다.
뜨거운 팥죽을 식혀 먹고 있는 동안 아들은 부르튼 다리를 이끌고 피를 흘리며 돌아왔다. 그리하여 내기에 진 아홉 딸은 성위로 올라가 몸을 던져 죽고 부질없는 불화로 아홉 누이를 잃게 된 동생은 그 길로 집을 나가 돌아올 줄을 몰랐다.
어머니도 남편의 무덤 옆에 아홉 딸의 무덤을 만들어 놓고 여생을 보내다가 숨을 거두었다. 당시 죽은 아홉 딸과 부모의 묘는 이 성안에 2줄로 배열된 11기의 묘라고 전해진다.”
한 쪽에는 사각정자가 세워져 있고 운동기구와 의자까지 갖춰져 있는 것을 보니 동네주민들이 자주 이 산을 찾는 모양이다. 구녀산 정상 표지석(484m)은 커다란 돌무더기 옆에 있다.
증평군 증평읍 율리와 청원군 미원면 종암리를 연결하는 분젓치에 내려선다. 산경표에 나오는 분치(粉峙)가 분젓치로 바뀌었다고 한다. 도로포장이 잘되어 있지만 오가는 사람이 없다.
분젓치가 있는 이곳까지 증평 땅이다. 충청북도 증평군은 한 개의 읍(증평읍)과 한 개의 면(도안면)을 보유한 미니 지방자치단체다. 인구 3만 여명에 불과한 증평군은 2003년에 증평출장소에서 군청으로 승격하였다.
“좌구정(座龜亭)” 정자 뒤로 동면중인 증평저수지(율리방죽)가 내려다보인다.
도로 양편에 한남금북정맥(구녀산 3㎞), ( 좌구산 4㎞)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다. 도로를 건너 좌구산을 향해 진행한다.
방고개에 닿는다. 율치(栗峙) 즉 밤고개인데 어찌된 일인지 이정표에는 방고개로 기록되어 있다. 증평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점촌18㎞’는 1.8km의 오류일 것이다.
증평군에서 조사한 지명의 유래에 의하면 이곳 밤고개 밑에는 밤티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인조반정 때의 공신인 김치의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이룬 마을이다.
이 고장의 골짜기마다 특징이 있는 이름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향교골, 사장터, 가마골, 절골, 담안, 부점 등이 그것이다.
부점이란 부점촌(釜店村)을 말하는데 옛날에 솥을 만드는 점(店)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순우리말로는 솥점말이라고 한다하니 듣기에도 좋고 정감이 간다.
밤티 서남쪽에는 삼기리(三岐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은 미원, 청천, 증평으로 가는 세갈랫길이 있어 불렸단다. 또 밤티 북쪽 골짜기에는 봉천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봉씨가 처음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기 시작해서 봉천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봉천리(奉川里)는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 임금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다음 해인, 세조 2년(1456년)에 일어난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하음 봉씨(河陰奉氏)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살면서부터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사옹원별좌로 있던 봉여해라는 사람이 단종 복위에 실패하자 의금부로 붙잡혀 가서 죽었는데 봉여해의 친족들이 참화를 면하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지면서 일부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됐다는 것이다. 산길을 가는 길손에게 지명의 유래나 역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정표와 나그네들의 다리쉼을 위한 긴 나무의자가 놓인 삼거리를 두 번 지난다.
돌탑이 있는 봉우리를 지나 곧바로 좌구산(座龜山 해발 657m) 정상에 닿는다. 한남금북정맥 중 가장 높은 좌구산은 산의 모형이 마치 거북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앉을 좌(坐), 거북 구(龜)자를 써서 좌구산(坐龜山)이라고도 하고, 또한 개 구(狗)자를 써서 좌구산(座狗山)이라고도 하는데 이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광해군 때 정3품인 병조참지를 지냈던 진주목사 김시민의 양아들인 김치(金緻)는 점술과 천문에 능했는데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질 즈음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신의 관상을 보니 이듬해인 인조반정의 해에 죽을 운명인지라 관직을 사직하고 이곳 좌구산 밑의 율리 마을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이때에 김치는 한양의 심기원, 최명길 등과 내통하여 인조반정을 밀의했다고 하는데 어느 날 김치에게 심기원이 찾아와 능양군의 사주와 반정을 일으킬 일자를 점쳐 달라고 하였다.
이에 김치는 반정일자를 정하여 주고 깊은 잠에 빠졌는데 한밤중에도 동편 좌구산에서 개가 세 번이나 크게 짖어대므로 잠에서 깨어 그곳을 즉시 피하여 무사했다고 하는데 그 후 김치는 개가 짖음으로 사람을 구하고 나라의 큰일을 성공할 수 있게 하여 준 명산이니 개 구자를 써서 좌구산(座狗山)이라고 부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좌구산 정상에서 1.9km 떨어진 새작골산은 괴산군과 증평군, 그리고 청원군의 경계다. 질마재까지는 1.3km 거리다.
질마재는 증평읍에서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592번 지방도로가 지난다. 질마는 수레를 끌 때 말이나 소 등에 안장같이 얹는 제구로 그 모양이 질마와 같은 형국으로 된 고개와 같다하여 질마재로 부른다.
崔元用 공덕비가 있고, 그 옆엔 큰 은행나무가 있다. 공덕비의 내용은 이러하다.
"최원용은 청안면 부흥리 출신으로서 그곳에 석회광을 개발하여 1, 2차 산업용 원료를 생산하고 지역의 유휴노동력을 흡수하여 농가소득 증대에 기여함.
청안면의 동맥인 증평 - 점촌간 도로가 협소하고 점질토로 굴곡이 심하여 차량 통행에 지장이 막대하자 , 자신의 공장의 장비/인력을 투입, 도로 보수를 하고 교통 원활을 기하여 농산물 수송과 교통난 해소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다. 이에 청안면민이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
도로를 건너 절개지를 치고 오른다.
비포장임도인 칠보치를 지난다. 청안면의 문당리와 문방리를 이어도는 도로다. 옛날에는 고개가 있어 두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칠보산 쪽지봉 팻말이 매달린 봉우리에서 정맥길은 왼쪽으로 이어지는데, 오른쪽으로 30m 떨어진 곳에 칠보산 정상표지석이 있다. 자칫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다.
철조망이 둘러쳐 있는 목장 지대를 지나 송치재로 내려선다. 여러 기의 돌탑들이 보인다.
보광산관광농원 울타리를 돌아 모래재로 내려선다.
모래재 의병격전지 유적비는 일본의 1905년 강압적 을사보호조약과 1907년 한국 군대 해산 등 일제 제국주의의 국권찬탈에 항의하는 전국 의병이 궐기하였는데 여기서도 의봉장 한봉수가 이정구 등 9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이들을 사살하고 총기, 탄약, 우편물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린 것을 기리기 위하여 1984년 11월 세운 것이다.
한봉수(韓鳳洙·1883∼1972)
청주 출신의 한말 의병장으로 잘 알려진 한봉수는 청원군 북일면 세교리에서 태어났다. 청주 진위대의 해산군인 김규환(金奎煥)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해 8월에는 다시 향리에서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의 전면에 나섰다.
8월 진천군 문백에서 일제 헌병 중위 도기선치(島岐善治) 등 3명을 타살한 것을 시작으로 괴산 유목리전투·미원전투·낭성 가래올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그 활동범위를 전의·목천·평택·장호원·횡성 등으로 넓히면서 2년 6개월 동안 34회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단 한 번만 패배하였을 뿐이며 그 행동이 너무 빨라 '번개대장'으로 불린 유격전의 명장이었다.
'모래재 해발 228m'이정표가 서 있는 모래재를 지나는 34번 국도는 괴산-증평과 연결된다.
괴산은 삼국시대 3국의 접경지대로서 백제와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충돌이 잦았던 곳으로 신라 진평왕(眞平王) 28년(606) 신라장수 찬덕(讚德)이 가잠성( 岑城)을 지키고 있을 때 백제의 대군이 쳐들어와 백여 일을 포위 공격하여 성은 완전히 고립되어 바람 앞에 등불, 신라군은 여러 번 원군을 보냈으나 그 때마다 패하여 달아났고, 이제 성안은 식량과 물마저 바닥이 나 군사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성주인 찬덕이 의롭게 싸우다 죽을 것을 역설하였으나 군사들은 항복하여 목숨을 보존하길 원했다.
찬덕은 운명이 가까워 온 것을 깨닫고 "너희들은 내가 죽은 후에 항복하라. 나는 죽어 귀신이 되어 백제 놈들을 잡아갈 것이다."라고 외친 뒤 앞의 느티나무에 머리를 들이받고 장렬하게 죽었다고 한다. 후에 이 소문을 들은 태종무열왕(김춘추)는 찬덕장군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서 고을이름에 느티나무 괴(槐)자' 를 넣게 하였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괴산(槐山)'지명 유래라고 한다.
전원주유소 주인아저씨의 도움으로 증평에서 콜택시를 불러 차량을 회수하여 대전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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