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읍내리 당간지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온양시내에서 송악면 쪽으로 3㎞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당간지주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 땅 속에 묻혀 있어 마주 세워진 두 기둥만 드러나 있다.
기둥머리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안쪽에는 깃대를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이 파여져 있다.
표면이 심하게 닳아 다른 조각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으며, 기둥 바깥쪽 두 모서리를 깎아내어 마치 세로줄무늬를 새긴 것 같은 효과를 냈다. 위·아래 기둥의 굵기가 별 차이 없이 다듬어져 전체적으로 세련미를 보이고 있다.
크기로 미뤄 꽤나 큰 절의 것으로 보이는데 지주가 자리하고 있는 지금의 위치가 본래의 자리로 여겨지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때에 본래 절터였다가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관청을 세운 것으로 전해져 당시 시대적 이념 흐름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물 제537호이다.
「온주아문(溫州衙門)」
아산시 읍내동 온양향교(溫陽鄕校)에서 동쪽으로 약 400여m 떨어진 곳에 조선시대 온양군의 관아 건물로, 낮은 남향의 야산을 배경으로 하여 문루(門樓)및 동헌(東軒)이 있어 이곳이 옛날 행정 중심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아문에는 「온주아문(溫州衙門)」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신라 문무왕 3년(663)에 군 이름을 온주(溫州)라 하였으므로 그대로 이름을 따서 붙인 듯하다. 아문건축에서 흔히 보는 2층의 문루 건물로 아래층은 통로로 사용하고 위층은 누마루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다듬은 장대석 한벌을 깔아 만든 기단위에 4각형의 기초석을 갖춘 높이 1.5m의 주형 초석을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 누마루를 설치하였다.
마루의 4면에는 계자 난간을 돌렸고 아래층 기둥에는 화려한 초반을 한 낙양을 붙였다. 동헌은 아문에서 약50m 북쪽에 서 있다.
조선시대 온양군 동헌으로 쓰이다가 1928년부터 일제의 주재소, 해방 후에는 파출소로, 1986년 시 승격에 따라 1988년 까지 온주동 동사무소로 2년간 사용되다가 1993년에 수리 복원하였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평면이며 잘 다듬은 장대석을 한 벌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덤벙주초를 두고 그 위에 네모난 기둥을 세웠으며 우물천장이며 홑 처마 팔작 지붕이다.
아문은 고종 8년(1871)에 중건된 건물이며 동헌은 여러 차례 변형되었으나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건물로 여지도서 온양군 공해조에는 동헌 10칸, 아사 23칸, 객사 37칸, 무학당 3칸, 향청 12칸 등 건물이름과 칸수가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2동의 건물만 남아 있다 .
아문의 앞에는 비석(碑石)들이 서 있으며 배면(背面)에는 읍내리(邑內理) 산성(山城)이 보인다.
온양향교(溫陽鄕校)
본래 아산시 법곡동(능뫼)에 있었는데 임지왜란 시 소실되었던 것을 광해군 2년(1610)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 하였다. 이 향교에서는 중국의 사성오현과 이철, 그리고 우리나라의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향교의 건물 배치를 살펴보면 내·외삼문과 명륜당, 대성전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다. 향교의 입구에는 하마비와 홍살문이 서 있고 솟을대문 형식의 외삼문이 있는데 정면에는 명륜당이 위치한다.
명륜당의 후면 내삼문을 지나면 정면에 대성전이 위치한다. 명륜당은 정면 5간, 측면 2간의 팔작 지붕이며, 중층의 기단 위에 자연초석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 배흘림의 원주가 세워져 있다.
어간은 4분합의 띠살문으로 되어 있으며 상인방 위에 「명륜당」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대성전도 명륜당과 마찬가지로 중층기단 위에 만들어져 있는데 건물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 익공식 형태다.
기단은 막돌 허튼층 쌓기로 되어 있는데 그 위에 자연초석 및 원형초석을 함께 사용하였으며 초석 위에는 배흘림의 원주를 세웠다. 동측에는 정면 6간, 측면 2간의 동제가 위치하고 있다.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
아래 내용은 아산시청 홈페이지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1999년 12월 28일) 국가에서 지정 보호하고 있는 마을로 아산시 송악면 설화산밑에 위치하고 있는 외암리 민속마을 에는 약5백년 전에 이 마을에 정착한 예안 이씨 일가가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어 살고 있다.
문중에 걸출한 인물들이 많아서 큰집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이끼 낀 돌담을 돌면 이 마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데 돌담너머로 집집마다 뜰 안에 심어 놓은 과일나무 및 마을 입구의 장승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디딜방아, 연자방아, 물레방아, 초가지붕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이밖에 많은 민속 유물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특히 이 참판댁과 중요민속자료 95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암군수댁(건재 가옥)은 아름다운 정원과 더불어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느껴볼 수 있는 장소이다. 최근에는 이곳에서 사극이나 영화 촬영이 종종 있으며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원래 외암마을의 주인은 평택진씨였다. 지금도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묘가 외암 마을 남쪽으로 약 500m의 거리인 구릉의 골말에 위치하고 있어, 과거 이 마을의 주인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묘소의 남쪽에 집터와 연못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곳이 진참봉의 집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오늘날 외암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의 절반이 예안이씨다. 시작은 평택진씨 참봉 진한평의 사위인 이사종이다. 당시 진한평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예안이씨 이사종이 진한평의 장녀와 혼인하면서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외암 이간 선생이 쓴 [외암기]에 "예안이씨가 온양에 들어와 살게 된지 이미 5세가 되었다" 고 하였는데,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연은 6대조이고, 이사종은 5대조가 된다. 그렇다면 이사종 때부터 이곳에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외암기]에서는 선조 이사종이 그의 부친인 이연의 묘를 송악의외록에 정하면서, 별업을 외암에 지어 열승정(閱勝停)의 위치에 대해 읍지에서도 기록되어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안이씨는 전의 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로 10세손인 익(翊)이 예안이씨의 시조가 된다. 7세손인 이연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둘째 아들 이사종 계열만 번창하고 있는데, 이사종부터 예안이씨 온양파가 시작되었다.
외암 이간 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예안, 자는 공거(公擧),호는 외암 외에 추월헌(秋月軒)이라고 하였다. 숙종 36년(1710)순무사 이만성(李晩成)에 의하여 장릉참봉(葬綾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6년뒤인 숙종 42년(1716)에 다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자의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젊은데도 벼슬이 뛰어오름을 논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숙종실록에서도 '호서사인(濠西士人)이간'이라는 표현이 보이듯 이 온양 향리에서 주로 지낸 이간은 31세 되던 해 권선재를 건립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영조 3년 51세로 일생을 마감했는데 정조는 이조참판과 성균관 좨주를 증직하였으며 순조는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정공이고 저서로는 [외암유고]가 있다.
마을에는 외암 이간의 학문적 유업을 기리는 사당이 있고 매년 외암 이간 선생이 사망한 음력 3월14일 불천위제사를 지낸다. 외암 선생의 묘소는 외암리 오른쪽 산기슭에 있으며 입구에 신도비가 남아있다.
예안 이씨 집안의 족보를 보면 문과 급제자로 이정렬이 있다.
퇴호 이정렬(1868~1950)은 조선말기에 이조참판을 지낸 인물로 고종으로부터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호를 받았다.
이정렬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였는데, 명성황후는 이정렬을 매우 아끼어 필묵과 첨지를 내려주기도 하였다. 그는 17세 되던 해 명성황후에게 당시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24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이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34세 때 일본이 강제로 통상조약과 사법권이양을 요구하니 이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당시의 책임인외부대신을 탄핵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의 뜻이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은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송악으로 낙향한 그해 11월 칠은계를 조직하여 충남일대의 항일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참판댁'이라 부르는 퇴호 이정렬이 살던 집에는 지금도 유품이 많이 남아있다.
• 경부고속국도 목천IC → 국도21호(20km)→신도리코앞사거리→읍내동사거리→국도39호(10km)→송악외곽도로→외암민속마을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불입상 (牙山坪村里石造藥師佛立像)
보물 제536호. 높이 545cm. 이 불상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거불(巨佛)이며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준다. 나발(螺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우뚝 솟아 있고,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양각되어 있으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어 자비로운 부처의 얼굴을 잘 나타내었다.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아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불신(佛身)은 평판적이며 양 어깨에 걸쳐진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양팔과 무릎 부분에서 옷주름이 도식적으로 처리되었는데, 이것은 고려시대 불상의 한 특징이다.
양 무릎의 동심원 주름은 통일신라 불상인 삼화령 미륵삼존불의 본존이나 순흥 석교리 석불입상(보물 제116호) 등에서도 보이는 특이한 수법이다. 양손은 가슴 앞에 모아 약합(藥盒)을 들고 있어 이 불상의 명칭이 약사불(藥師佛)임을 알 수 있으며, 손 모양과 손가락의 표현이 생동감이 있어 흥미롭다.
대좌 위에 있는 양발은 5m가 넘는 거구에 비해 작은 편이다. 규칙적인 옷주름, 짧은 목, 움츠린 어깨, 꼿꼿한 직립자세 등의 부자연스럽고 도식화된 면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목천IC - 남부대로 - 21번 국도(20km) - 온양온천 - 39번 국도 송악방면 (3km)- 외암교 전에 우측으로 진입 - 용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