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30분 모닝콜에 눈을 뜬다. 커튼을 젖히자 아직 동이 트기 전이어서 태산이 희미하게 조망된다.
아침식사 후 셔틀버스를 타고 태산으로 이동한다. 갈수록 태산, 티끌모아 태산, 걱정 근심이 태산 같다, 태산이 높다하되...
중국에서는 예부터 5대 명산을 「오악(五岳)」이라 하였는데, 이 중에 동악(東岳)인 산동성의 태산(泰山)은 서악(西岳)인 섬서성의 화산(華山), 중악(中岳)인 하남성의 숭산(崇山), 남악(南岳)인 호남성의 형산(衡山), 북악(北岳)인 산서성의 항산(桓山)과 더불어 오악을 이룬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 태산은 ‘오악지장(五岳之長)’, ‘오악독존(五岳獨尊)’라 하여 천하제일의 명산으로 꼽았다. 그 이유는 제왕이 이곳에서 하늘에 뜻을 받는 봉선(封禪)이라는 의식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태산정상에서 단을 쌓고 하늘에 제를 울리는 것 이 봉(封)이라 하고 태산 밑에서 땅과 산천에 제를 지내는 것을 선(禪)이라고 한다.
진시황으로부터 역대 군주들은 황제로 등극한 후 반드시 태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 하늘에 알렸다. 봉선은 황제가 태평성대의 실현을 신에게 보고하는 의식이다. 황제라고 아무나 태산에서 봉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치적이 높은 성천자(聖天子)만에게 허용되는 것이다. 유사 이래 진시황, 한의 무제, 당의 현종 등이 봉선을 했다고 한다.
걸어서 오르려면 대묘에서 출발하여 홍문을 지나 중천문과 십팔반을 거쳐 남천문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많이 이용하지만 사람이 많이 몰리고 절차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가이드는 다른 코스를 택했다. 진짜 이유는 이 코스가 가장 힘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북천문 아래 후석토삭도(케이블카)에 탑승한다. 요금은 성인 왕복 90위엔(12000원)으로 비싼 편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키 120cm 이하는 아동요금을 받는다.
15분 정도 올라 장인봉(丈人峰)에서 내려 몇 걸음 옮기자 하늘의 거리, 천가(天街)에 닿는다. 오른쪽 아래에 남천문과 그토록 걷고 싶었던 십팔반 계단이 보인다.
케이블카를 이용했기 때문에 조금은 싱거운 등산이 되었지만 천가를 지나 승중문-서신문-벽하사-태산정상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동안 역사와 관련된 유적지를 음미하며 그 역사의 깊이를 느껴본다.
태산은 역대 제왕과 백성들이 참배하던 영산인 동시에 문인묵객들이 시를 읊고 글을 쓰며 불교, 도교, 유교의 신도들이 경전을 전하고 포교를 하던 신산이기도 한다. 제왕이 봉선의식을 행하면서 태산은 신격화 되었고 많은 불교와 도교의 신도, 그리고 문인명사들이 이곳을 찾아 무수한 명승고적을 남겼다.
태산은 해발 약 1,545m로 산동성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동부․제남시․태안 등 3개의 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부터 천하제일의 산으로 칭송받아 오듯이 자연 경관은 물론이고, 신앙의 산으로도 추앙받아 왔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돌비석 등의 옛 유적과 종묘 등이 있어 볼 것이 많은 국립공원으로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자연문화유산이다.
정상에는 50m나 될 듯 한 마의비(磨의碑)를 비롯하여 연도에는 모든 바위위에 명필의 글이 조각 되어 있는 서예의 보고다.
중국인에게도 이 산은 신령스런 산으로서 태산에 한번 오르면 지상에서 적어도 10년을 장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누구나 태산등정이 숙원이었다고 한다. 소원의 크기에 비례하는 향을 들고 산에 오르는 중국 사람이 많이 눈에 띤다.
천가 동쪽의 높은 벼랑위에 벽하사가 있다. 태산여신인 벽하원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벽하사는 고산건축의 걸작으로 송나라 대중상부 2년에 건축을 한 것이다. 청나라 건융 35년에 재건축을 거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벽하사는 역대 황제들이 즉위할 때마다 하늘에 신고식을 치룬 곳이다. 별도의 입장료를 징수한다.
천년 묵은 사찰을 지키며 그 앞에서 통행료를 받아온 사람들, 관광객들에게 열쇠고리, 향, 자물쇠 등을 팔며 태산 꼭대기에서 자신의 삶을 꾸리는 사람들. 현재와 과거가 묘하게 뒤섞인 그들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은 지금의 중국 현실을 보여주는 듯도 하고 결코 저 아래 세상과는 융화될 수 없는 그들의 색깔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대관봉은 옥황정 앞의 평정봉 아래에 위치해 있다. 대관봉에는 당현종의 <기태산명>이 새겨져 있다. <기태산명>은 속칭 당마애비라고도 한다. 높이는 13.3m 이고 너비는 5.7m이며 서언, 명문 및 액관 등 1008자가 새겨져 있다. 당현종의 태산봉선행사를 기재한 것이다. 글귀가 우아하고 예서체로 날아가는 듯하다. 비각은 웅장하고 거대하며 금빛 찬란하다.
대관봉과 서쪽의 운봉위에는 많은 비문이 겹쳐있다. “벽립만인”, “호흡우주”, “치선호한”, “청벽단애” 등 큰 글씨들은 “기태산명”과 잘 어울린다.
오악독존은 중국 인민폐 5위엔짜리 뒷면에도 나오는 유명한 곳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고 한 공자의 말이 떠오른다.
옥황정은 태산 주봉의 최고봉으로 산정에 옥황묘(玉皇廟 태산 정상에 있는 사원)가 있어서 얻어진 이름이다. 산문, 옥황전, 관일정, 망하정, 동서의 도방으로 구성된다. 창건 년대에 관한 고증은 없으나 명대에 재건축을 하였다.
본전 내에는 동으로 주조한 옥황대제상이 모셔져 있다. 신감위의 편액에는 “시망유풍”이란 글이 있다. 옛적부터 많은 제왕들이 이곳에서 장작을 피우면서 제천행사를 하여 산 전체 신들에게 기도를 올렸다. 동정에는 “욱일동승”을 감상하고 서정에는 “황하금대”를 감상할 수 있다.
태산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일관봉에는 ‘관일빈관’ 이라는 호텔이 있다.
하산은 오르던 길로 되돌아 내려간다. 남천문을 지나 악명 높은 '십팔반'의 끝없는 계단들을 잠시 내려섰다 올라온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버스를 갈아타고 태곡로(泰曲路)를 달려 제녕시 곡부로 이동한다.
제녕은 중국 고대 문화 발상지 중의 하나로서, 유교 문화가 바로 이곳에서 발생했으며, 역사상 줄곧 산동성 서남부 일대의 중요한 물자 집산지이자 문화 명인들의 배출지가 되어왔다.
춘추 전국 시대의 5대 성인인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 모두가 이곳 제녕에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제녕은 예로부터 "공맹의 고향이자 예의의 고장"이라 일컬어졌다. 이들의 출현은 이 일대 문화 발달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의 대시인 이백, 두보도 오랫동안 제녕에 기거하며 인구에 회자되는 시를 많이 남겼다.
제녕에는 갈만한 곳이 많다. 유교 문화 관광 도시인 곡부와 추성이 있고, 또한 안자와 증자의 사당, 소호릉, 철탑사, 동대사가 있으며, 수호전의 108 영웅호걸의 양산박이자 중국 북방 최대의 호수인 미산호가 있는데 이곳은 아시아 최대 규모인 십만 헥타르의 연꽃 자생지이다.
산동성의 명승지 중 가장 유명한 곳이 곡부(曲阜)의 삼공과 태산이다. 삼공(三孔)이란 공묘와 공부 그리고 공림을 가리킨다. 오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공자의 자는 중니(仲尼), 본명은 구(丘)이며 모습은 이름 그대로 못생긴 짱구다. 아버지는 은나라 왕족 혈통으로 이름이 ‘숙양홀’이다. 아버지의 첫째 부인은 딸만 9명을 낳고 대를 잇지 못해 집을 나갔다. 둘째 부인은 아들을 낳았는데 불구자였다. 다시 안씨(顔氏) 가문의 딸(무당이었다고 함)과 혼인하고 산신에게 3년을 빌어 얼굴이 매우 못생기고 괴이한 형상의 아들을 얻었는데 이가 바로 ‘공구’ 훗날의 공자다.
공자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20살 때 결혼하여 평범한 아들 하나(공이)를 얻었다. 노나라 법무장관을 지냈으나 왕과 갈등하여 관직을 버리고 14년을 주유천하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집필하다가 72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 후 수백 년이 지나 한무제가 유교를 숭상하면서 공자를 받들고 후대에는 왕으로 추앙된다.
공자는 중국 고대의 저명한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 군사가였으며 세계의 문화사에서도 널리 이름을 날린 거인이다.
그가 주장한 어진 정치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유가의 학설은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을 비롯한 동양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 봉건사회의 정통적인 질서로 확립되었으며, 공자가 타계한 후 2.400여년이 지났지만 공자의 학설은 오늘까지 중국과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과시한다.
공자가 태어나고 묻힌 도시, 취푸(曲阜)에 도착한다. 기원전 춘추시대부터 얻어온 유명세에 비해 도시는 꽤나 조촐한 모습이다. 성곽 밖 재래시장(동관시장)에는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베어난다.
식당(유림취주점)에서 점심식사 후 식당 문을 나서자 장사꾼 아줌마들이 기다렸다가 벌떼처럼 달려들면서 조그만 가이드북과 팔찌를 사라며 ‘한국 돈 천원’을 외친다.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 유교의 영향을 받은 모든 지역에서 공자는 교양의 원천이다. 해외의 화교들도 자주 공묘를 찾아오는데 이들에게는 이곳이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공묘로 들어선다.
22만 평방미터의 대지 위에 펼쳐진 9개 관문과 8개 정원, 466개 방, 그 대궐 같은 규모가 공자의 위상을 말해준다.
공묘에는 아주 훌륭하게 설계된 건축물로 양 측으로 향나무를 심어 엄숙하고 숙연한 분위기가 감돈다. 공자 사후 1년 뒤에 노나라 애공(哀公)이 묘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규모가 작았지만 전한시대에 유교가 국교가 된 후 제왕이 점차 규모를 확대했다.
주요건물은 중앙선을 따라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으며 동, 서로 대칭되고 있다. 현재 공묘의 건물 대부분은 명․청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공묘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석이 서있는데 그 중에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문화혁명 중 북경에서 온 홍위병이 넘어뜨린 것을 시멘트로 붙여 놓은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부터 뒤로 가면서 순서에 따라 아홉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앞쪽으로 세 부분은 고목이 울창하다. 울창한 고목 사이로 나 있는 길을 걷고 있으면 공묘의 오랜 역사가 느껴진다.
공묘에는 한나라 대부터 여러 시기에 걸친 기념비들이 다량으로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 고대 서예예술의 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것은 무게가 수십 톤에 이른다고 한다.
기념비는 모두 용의 첫째 아들인 ‘비희’ 가 떠받치고 있다.
용한테는 아들이 아홉이 있었는데 첫째는 비희(贔屓)라는 이름을 가진 용으로 커다란 거북에 용머리를 하고 있다. 힘이 장사로 무거운 짐을 지기를 좋아한다고 하여 돌비석 받침으로 쓰여 진다.
둘째는 포뢰(蒲牢)라고 하며 울기를 좋아 한다고 하여 종걸이로 사용되고, 셋째는 폐한(狴豻)으로 힘이 세다는 이유로 옥문 위에 새겨 졌고, 넷째 애자(睚眦)는 죽이는 일을 좋아 하므로 칼이나 창 같은 무기에 장식으로 새겨졌다.
다섯째가 이문(螭吻)이며 망보기를 좋아 한다고 하여 지붕위에 기와(용마루)로 쓰여 졌으며, 여섯째 팔애(叭애)는 물을 좋아 한다고 하여 다리 장식으로 쓰여 졌다.
일곱째가 산예(狻猊)이며 하여 불을 좋아 한다고 하여 향로 뚜껑에 장식용으로 쓰여 졌으며, 여덟째 초도(椒圖)는 문을 닫는 일을 좋아 한다고 하여 문고리로 쓰여 졌다.
아홉째 도철(饕餮)은 음식을 좋아 한다고 하여 가마솥 뚜껑 같은 것을 장식하는데 쓰여 졌다고 하는데 이들이 용의 아홉 아들 즉 구룡자(九龍子)다.
건물들에 걸려 잇는 간판들은 공자의 생전에 쌓은 덕을 칭송하고 있어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며 어느새 존경의 마음이 스스로 솟게 하고 있다. 공묘는 현존 중국의 고대 건물 중에서 제일 오래 된 건물이기도 하다.
장중한 비석들을 지나 정원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중국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대성전을 만나게 된다.
▲십삼비정(十三碑亭)
공묘의 본전이라 할 수 있는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전각(殿閣)이다. 공자의 위패를 중앙에 모시고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 등 4성(四聖)을 좌우에 모셨다.
대성전에 생민미유(生民未有 : 백성이 생긴 이래 공자와 같은 사람은 없다)라는 대형 편액이 걸려있다. 내부에는 금빛 찬란한 닫집을 짓고 공자상을 모시고 있으며 위패에는 지성선사공자신위(至聖先師孔子神位)라 쓰여 있다.
소상의 복장은 제왕에 해당하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소상은 문화혁명 때 파괴된 것을 1982년 황금 48량(兩)을 들여 복원한 것이라 한다. 1103년에 창건되었고 1499년에 보수하면서 대성전 앞에 있는 10개의 돌기둥에 용을 새겨놓았는데 살아 꿈틀거리는 듯 한 생동감 있는 용을 조각하여 높은 예술적 가치를 자랑하고 있다. 너무 화려해서 황제가 올 때면 빨간 천으로 싸서 감춰야 했다고 한다. 용은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문양이다. 공자의 우상이 황제 수준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공부로 들어서는 문 양 편에 쓰인 글씨 중에서 富에 점이 없는 것은 ‘부귀영화가 그치지 말고 영원하라’는 의미고, 章이 이어져 있는 이유는 ‘문장이 하늘까지 닿아라’ 라는 의미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그럴 듯하다.
공부는 공묘의 동쪽에 있는데 공자의 자손들이 살았던 저택이다. 역대의 제왕들은 공자를 기념함과 동시에 그의 후손들에 대하여 은총도 많이 베풀었었다고 한다. 기원전 195년에 공자의 제 9대 후손이 제왕으로부터 봉제군으로 책봉 받으면서 그의 후손들은 이 관직을 세습하게 되었다. 전한의 원제 시대에 공자의 13대 후손 공패(孔覇)가 관내후로 봉해지면서 식읍 800호, 황금 200근과 함께 황제에게 받은 집터가 점차 넓어져서 지금의 공부가 되었다.
송나라 1055년에 제 46대 후손이 연성공으로 책봉되면서 이 관직은 줄곧 세습되어 제 77대에까지 이어져 왔으며, 이는 중국의 가족사에서 제일 오랜 귀족 가족사로 되었다. 지금 후손들은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10여 만점의 문물 중에서 원, 명나라 때의 의관과 공자의 초상화, 그리고 연성공과 그의 부인의 초상화, 제사를 지내는데 쓰이는 그릇이 제일 중요한 문물로 꼽힌다.
대문, 의문, 대청, 내택문, 영은문, 가묘는 명나라의 건축이며 나머지는 전부 청나라 때의 건축물이다.
문에는 ‘탐’ 이라는 전설의 동물이 그려져 있다. 탐은 욕심이 많은 동물로 용의 머리에 기린의 몸통을 하고 있으며 하늘의 해를 잡으려 올라가다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문에 그려 드나들면서 교훈으로 삼도록 한 것이란다.
▲가보비(家譜碑)
노벽(盧壁)
진시황이 분서갱유(진시황이 금서 육경을 불태워 버리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것)를 실시하자 유학자들이 벽을 만들어 공자와 관련된 유가의 책을 숨겼다. 공자의 제 9대 직계손자 공부(孔鮒)가 벽에 서적을 수장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축한 것이다. 왼쪽에는 공자의 사택 마당의 오래된 우물이 있다.
▲공자에 대한 예우는 역사상 두 번에 걸쳐 깨졌는데, 한번은 진시황의 분서갱유, 또 한 번은 문화대혁명 때다. 분서갱유 당시 공자 관련서적을 감춰뒀던 노벽이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듯 묵묵히 공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공택고정(孔宅故井)-공자의 옛날 저택 우물. 공자의 옛날 저택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적이다.
서로에는 객실, 동로에는 묘지, 중로에는 관공서와 주택과 화원으로 나뉘어 있었다. 공부의 관아는 삼당(대당, 이당, 삼당)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공무를 집행하던 관서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공부는 중국에 현존하는 가택과 관아 기능을 동시에 구비한 건물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제일 잘 보존된 건물이다. 지금은 76대, 77대 후손들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서예글씨나 도장을 새겨 팔고 있다.
벽 사이 좁은 미로를 따라 이리저리 이동한다.
▲시예당(詩禮堂)은 공자의 독자 아들 공이가 공부하던 곳으로 공자처럼 훌륭한 스승도 자기 아들은 직접 가르치지 못했다고 한다.
육대합
건륭황제의 딸과 결혼한 공자의 후손에게 6대(代)까지 잘 먹고 잘 살도록 땅과 재물을 하사한다는 증서.
공림 앞 진입로 양쪽에는 기념품을 판매하는 노점상이 즐비하게 늘어서 호객행위를 한다. 우리 돈 천원이면 도장을 새길 수 있고 붓글씨로 이름을 써 주는 접는 부채도 살 수 있다.
공림은 중국에서 제일 크고 오래 된 가족무덤으로 공자의 가족편년사이기도 하다. 공자와 직계자손 76대, 방계자손은 78대까지 묻혀 있는데 무덤이 약 10만 여기가 되며 담장둘레만 7.25km인 세계최대의 씨족묘지이다.
지성림(지성은 공자를 일컫는 말)이란 현판이 걸린 공림의 대문을 지나면 수많은 묘비의 비석이 숲을 이루고 있다. 수수교를 건너 공림으로 향한다. 공자가 주유천하 할 때 공자를 태우고 하루에 일만리를 갔다는 전설의 동물 ‘표문’ 이 지키고 있는데 손으로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성취된다는 전설때문에 반질반질하다. 통로를 지나면 수호신 역할을 하는 조각상이 서 있다. 한 쪽은 문신으로 손에 부채를, 다른 한 쪽은 무신으로 손에 칼을 들고 있다.
공자의 분묘는 향전 뒤쪽에 위치해 있고 ‘대성지성문선왕묘’ 라 쓰여 있다. 공자의 묘 옆에는 공자의 아들(공이) 묘, 그 앞쪽에는 공자의 학문을 계승한 손자의 묘가 위치해 있는데, 이러한 묘의 배치는 공자가 아들을 데리고 손자를 앉아주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중국의 대 사상가인 공자의 무덤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는 중국인들의 신념으로 돌보지 않은 듯 풀이 우거져 있으며 무덤 가운데 거목이 자라고 있다. 어린 아이에게 절을 하게하여 동정심을 일으켜 관광객들에게 구걸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씁쓸함을 느꼈다.
원래 숙소인 궐리빈사(闕里賓舍)는 관광 명승지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전통적인 분위기가 있는 호텔이다. 입구의 벽에「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라는 공자의『논어』에 나오는 명구가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안타깝게도 중국공산당 행사 때문에 행단(杏壇)호텔(3성급)로 숙소가 변경되었다.
일찍 숙소로 들어서자 결혼식을 알리는 아치형 풍선과 리무진이 눈길을 끈다. 중국은 늦은 밤에 결혼식이 거행된다고 한다.
여장을 풀고 혼자 택시를 타고 재래시장으로 나섰다. 이곳저곳 성곽 안팎을 쏘다니며 그들의 사는 모습을 둘러보고 커다란 슈퍼마켓에 들려 공부가주 2병을 구입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는 시내에 있는 귀빈루 식당에서 곡부 지방 전통식으로 다과가 곁들어진 훌륭한 식사였다. 숙소로 돌아오자 결혼식이 끝이나 아쉽게도 결혼식 장면을 보지 못했지만 차려진 음식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호텔 근처 슈퍼마켓에서 건과일(망고)과 견과류를 구입하고 재래시장을 구경을 하기 위해 두 대의 택시에 분승하여 동관시장으로 나갔으나 낮에 북적대던 서민들의 활기찬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어두컴컴한 시장은 적막감이 감돈다.
택시를 돌려 곡부버스터미널 앞에서 내려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돌아보지만 그다지 볼거리를 찾지 못했다. 밤 9시면 벌써 대부분의 상가가 문을 닫는다. 맥주 한 잔 마실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내일을 기약하며 숙소로 돌아온다.
중국의 신호등은 숫자로 남은 시간을 표시한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의하면 한국인에 의해 고안된 것이지만 성격이 급한 한국에서는 남은 짧은 시간 내에 교차로를 통과하기 위해 과속을 하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이 높아 사용하지 못하고 느긋한 중국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중앙선 개념이 없고 횡단보도 개념도 없지만 교통신호등은 잘 지키는 편이고 과속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는 몇 건의 교통사고를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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