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 (금)
7시에 기상하여 혼자 아침산책을 나섰다.
활기찬 아침거리의 모습은 중국의 다른 지역과 차이가 많았다. 마침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들의 뒤를 따라 학교를 구경하였다. 중학생들뿐 아니라 초등학생들도 등교하고 있었다. 중국도 지금 방학 중인데 보충수업을 받으러 가는 것이라 한다. 법적으로 자녀를 1명만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자녀 교육열이 매우 높다고 한다.
학교 부근 길에는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대신할 음식(중국식 햄버거, 전병 1元-2元)을 파는 노점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나중에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대부분은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이렇게 길거리에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한다고 한다. 호기심에 1개씩 사 먹었는데 맛있었다.
가게(超市)에서 탱자귤(탱자 크기의 귤인데 겉보기와는 달리 까서 먹기 편하고 맛있다) 1봉지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와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하고 호텔을 떠난다.
56개의 민족이 모여 사는 중국은 한족이 92%를 차지하고 나머지 55개 소수민족이 8%를 차지한다. 조선족은 200만 명에서 최근 10년 사이에 80만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데 그 첫째는 가임 여성이 매년 2천 명씩 한국이나 일본사람과 결혼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한족과 결혼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소수민족은 두 명의 자녀까지 허용하지만 경제적 형편 때문에 대부분 한 자녀만을 낳고 있기 때문이란다.
중국에서는 저녁식사 준비는 물론 설거지나 빨래, 집안 청소 등 대부분의 가사 일을 남편이 하기 때문에 3쌍 중 1쌍이 이혼하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가이드가 전하는 사이에 버스는 강태공 사당에 도착한다.
강태공은 약 3000년 전 산동성에서 태어났으며 제(薺)나라의 시조(始祖)가 되고 주(周)나라의 스승이 될 만한 역사적․전설적 인물로 139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강태공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선조가 여 나라에 봉하여 져서 여상(呂尙)이라고도 하였으나 그의 본명은 강상(姜尙)이라고 한다.
여상은 주 문왕의 조부가 기다리던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이라고 불려 졌으며, 그의 성이 강씨였기 때문에 후세 민간에서는 모두 그를 "강태공"이라고 불렀다.
위수 강변에서 곧은 낚시를 하면서 때를 기다리다 주나라의 문왕(周文王)을 만나 반란을 꾀하다 문왕은 죽고 대(代)를 이은 무왕(武王)을 도와 끝내 폭군에 시달리던 은(殷)을 멸망시킨다. 무왕은 주(周)나라를 세우고 나서 전국을 제후국(諸侯國)으로 나누어 공(功)이 많은 신하와 형제․친지들을 각 제후국의 왕으로 책봉한다. 그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제(薺)나라의 초대왕으로 강태공을 책봉하였다.
강태공은 짧은 기간에 공(工)·농(農)·수(手)공업을 활발히 발전토록 추진하여 제(薺)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방을 굳건히 하였으며 중국 최초의 병법(兵法)을 만들었다. 사당으로 들어서면 오른쪽 건물에 손자병법을 쓴 손무의 소상을 볼 수 있다.
강태공 사망 후 주나라의 관례로 시신(屍身)은 원래 섬겼던 주나라의 문왕(周文王)과 무왕의 무덤 주위에 묻었다고 하지만 봉분이 없는 탓으로 구체적인 위치를 모른다.
제나라 초대왕으로 기념하기 위해 태공이 썼던 모자와 옷을 옛 제나라 수도인 오늘의 치박에 묻었는데, 이것이 의관총(衣冠塚)이다. 의관총은 높이 28m이고 남북길이 50m, 동서 넓이 55m이다.
1992년에 임치구는 태공의 의관총 앞면에 강태공사당(姜太公祠)을 건립했다. 주전(主殿)은 강태공(姜太公)의 그림을 놓아 공봉(供奉)을 하며, 현재 명인의 서화 전시관으로도 쓰이고 있다.
강태공 사당 한 쪽에 구조전(丘祖展)이 있다. 평해구씨의 시조인 구목공을 모신 곳으로 대한민국 평해구씨대총친회에서 세운 검은 대리석 추모비가 있다. 목공(穆公)은 강태공의 셋째 아들이다.
약 100여개의 성씨가 이 강태공과 제나라에서 파생되었다는 내용을 적은 현판이 진열된 전시관이 그 옆에 있다. 그 현판을 보면 노(盧), 고(高), 허(許)氏 등이 눈에 띤다. 한국의 노태우전대통령이 이곳을 다녀간 모습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제나라(齊國) 역사박물관은 제나라 옛 황성 유적지의 동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고성의 대성과 소성이 맞물리는 특수한 모양으로 쌓여 있다. 박물관은 푸른 벽돌로 지었는데 옛 성곽을 방불케 한다.
내부에는 5개 진열실에 300여건의 진귀한 문물과 대량의 문물자료, 모형, 사판, 조각, 사진, 도표로 제나라의 흥망성사를 설명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과학기술, 군사와 민속을 소개해주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도사를 사칭하며 진시황을 속인 서복(徐福)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서불은 불로초를 구해 오라는 진시황의 명을 받고는 동해에 선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불로장생초가 자라고 있다고 속여 수천 명 어린 동남동녀들과 많은 재물을 배에 싣고서 줄행랑을 친다. 우리나라를 거쳐(남해 보리암과 소매물도를 거쳐 가면서 ‘서불과차’라는 글을 남겼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역사박물관은 선제시대, 제국시대, 음악청, 무위청, 성곽청, 과기청 등으로 나뉘어 제나라 800년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삼족토기와 각종 무기류, 명도전이 전시되어 있고, 현대 축구의 기원이 중국 제나라에 있다는 여러 증거들(축구공, 축구하는 각종 그림 등)을 전시해 놓았다.
사람뿐만 아니라 말까지도 순장했던 모습들을 모형으로 전시하여 강력했던 지배자, 잔인했던 지배자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나라 역사박물관에서 버스로 10분 거리 떨어진 임치구 제릉진 후이관장에 고차박물관(古車博物館)이 있다.
임치중국고차박물관은 현재 중국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제일 정확하고 완전한 차마유적(車馬遺跡)과 문물이 전시된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1991년부터 1994년 9월까지 4년에 거쳐 완공되었다. 제청고속도로 공사 중 유물들이 발굴되어 거기에 지붕을 씌우고 박물관을 만들었다.
박물관은 춘추시기 순차마(殉車馬) 전람실과 중국고차전람실 두 부분으로 나뉜다.
후이춘추순차마는 전국 10대 고고 발견 중의 하나로 그 규모가 크고 말의 장식이 정교하여중국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고 있다.
후이춘추순차마 전람실은 1호 갱과 2호 갱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호 갱은 길이가 32m, 너비가 5m, 순장된 마차가 10대, 말 32필이며 2호 갱은 길이가 8m, 너비가 3m, 순장된 말이 6필이나 된다. 2호 갱은 1호 갱과 달리 마차는 밑에 있고 말이 그 위에 있다. 매장된 말들은 전마(戰馬: 전쟁시 사용하던 말)로 모두가 수놈이다.
고차진열실에는 후이차마갱(後李車馬坑)에서 출토된 여러 가지의 차량과 임치지구에서 출토된 고대차량의 복제품 및 전국에서 출토된 각종의 고대차량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및 글로 중국 고대 마차의 발전사, 그리고 고대 전쟁, 교통, 운송, 생산 및 생활에서 마차의 역할을 구체적이며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거란족이 타고 다녔다는 차마는 말이 아니라 낙타가 끌고 있어 눈길을 끈다. 2천 여 년전 의 마차바퀴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진시황이 사용했던 마차의 실물 크기의 모형과 제갈공명의 목마모형. 전차(당시 전차란 쌍두마차로 기수가 앞에 서고 장수 옆에 노수(弩手)가 선 3인승이 1승(一乘))와 전쟁 무기 등 엄청난 유물들이 전시 되어 있다.
임치중국고차박물관은 중국고차의 연구 성과 및 중국 역대 마차의 진품을 집대성하여 중국 마차의 유구한 역사, 훌륭한 제작 기술 및 세계 차량 발전사에서의 앞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큰 규모의 난장이 펼쳐진 것을 구경하기 위해 잠시 정차한다. 우리나라의 5일장을 연상시키는 난장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물건들을 팔고 있는데 물건은 매우 품질이 떨어진다. 과일과 투루판산 건포도를 조금 샀다.
호텔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태안으로 이동한다. 제남에서 경복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경복(京福)고속도로는 북경에서 대만 부근 복건성의 성도인 복주까지 거리가 장장 2700km 라고 한다.
태안 근처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여 달리던 버스는 교통경찰에게 적발되어 2백위엔(한화 26000원)의 과태로 처분을 받았다.
2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태안으로 들어서자 태산 산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태안(泰安)은 산동성 중부 태산 남쪽 기슭에 있는 도시로 26개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으며, 명대(明代)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렸다. 태안은 화하(華夏 중국의 옛 명칭)문명의 발상지이며, 50만 년 전부터 인류가 생존하는 역사상 중요한 지역이다. 또한 태안은 중국 최대의 여행 도시로 시내에 위치한 태산은 중국 5대 명산 중 으뜸으로,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태안시는 태산에 의해 이름을 얻었다. "태산이 편안하면 온 천하가 편안하다", 즉 국태민안(나라가 태평하면 백성이 편안하다는 뜻)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과학과 기술의 도시여서 농업대학, 산동기술대학, 태산의대 등 유명한 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기계․화학․피혁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밀․옥수수․땅콩․대마(大麻)․사과․대추 등을 산출한다.
진주보석점에 들려 차도 한 잔 얻어 마시고 미용과 주름에 좋다는 진주 화장품도 발라보고 가격이 500만원이 넘는 황금색 민물진주도 구경했다. 민물진주는 해수진주와 달리 핵이 없어 땀에도 변색이 되지 않는 게 특징이라며 열변을 토하지만 아무도 사는 사람들은 없다.
시간 여유가 있어 인근에 있는 수정보석점을 들렸지만 역시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은 없다.
이제 한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가이드들이 안내하는 이런 상점 운영은 갈수록 힘이 들 것이다.
태산국제호텔에 여정을 풀고 혼자 거리로 나섰다. 점점 어둠이 내려앉는 거리를 자전거로 퇴근하는 사람들과 양을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목동의 모습에서 갑자기 떠나온 집 생각이 떠올라 안부 전화를 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택시를 이용하여 산삼해님과 시내구경을 나선다. 태산 버스터미널 옆에 은좌백화점(태산점)에 들려 선물용 술 2병을 구입하고 대추 편과 탱자귤 등 쇼핑을 한 다음 인근 식당에 들어가 청도맥주와 어제 주문에 실패한 땅콩(化生)을 시켰다. 1접시에 6위엔(800원).
수교자(水餃子 물만두)를 시켰는데 커다란 두 접시가 나와 당황스러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물만두는 근(斤)으로 판다. 야채물만두는 1斤(500그램)에 10위엔(1300원)이고 고기물만두는 14위엔(1800원)인데 35-6개 정도. 반근을 주문했어야 했는데 결국 먹다먹다 남아 포장을 부탁했다. 아침에 아들이 먹어보더니 식었지만 맛있다고 한다. 남은 땅콩도 다음날 점심식사 시간에 훌륭한 맥주 안주가 되었다. 좋은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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