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 (일)
7시 모닝콜에 눈을 뜬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오르려 하자 장사꾼들이 건대추 6봉지를 ‘한국돈 천원’을 외치며 판매한다. 호텔 객실에 비치한 곡부시내 안내지도와 볼펜까지도 유료(각 5위엔)라고 한다. 가이드가 방을 체크하면서 객실에 비치되었던 볼펜과 지도를 수거한다. 이런 젠장...서비스가 엉망이다.
8시 맹자의 고향 추성으로 이동한다.
맹자의 고향을 알리는 ‘孟子故里’ 패방(牌坊)을 지나면 공자의 고향 추성이다. 패방은 위에 망대가 있고 문짝이 없는 대문 모양의 중국 특유의 건축물이다. 곡부에서 남쪽으로 20km 떨어진 추성은 중국의 유명한 유교사상가 맹자의 고향이다.
역사 도시답게 이곳의 역사는 3천 년 전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예로부터 "추노성지(鄒魯聖地)"라 불리기도 했다. 또한 국가급 역사문화의 명승지이면서 신흥공업도시다. 오랜 역사와 다양한 문화의 흔적으로 이곳에는 300여종에 이르는 각종의 유적이 남아있다. 110만의 인구가 생활하고 있는데, 교통이 편리하고 제남 제녕공항과도 경복고속도로를 이용하면 7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곡부의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과 마찬가지로 이곳 추성에는 맹묘(孟廟), 맹부(孟府), 맹림(孟林)의 삼맹(三孟)이 자리하고 있다.
맹묘와 맹부는 추성시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북송시기에 건설되었다. 공묘와 공부와 같은 역할로 맹자를 제사지내던 곳이며, 맹자와 후손들이 지내던 곳이다. 또 맹림은 공림처럼 맹자가의 가족묘지다.
맹자는 공자(孔子) 사후 107년 뒤에 노나라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훈육과 자사(子思)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 공자의 도를 계승하여 인의를 중시하고 덕에 기초한 왕도정치를 역설하였으며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맹자(孟子)’는 맹자의 언행과 경륜을 수록한 유가의 주요 경전중의 하나다.
아성묘(亞聖廟) 정문은 영성문(櫺聖門)인데 붉은 칠에 기와를 얹은 담을 거느리고 솟을지붕으로 서 있다. 문을 들어서자 수령이 적어도 수백 년은 다 넘어 보이는 늙은 측백나무가 묘당에 빽빽하다. 아성전 앞의 한 그루와 아성 침전 앞 두 그루는 수령이 천년을 넘어서 특별히 보호되고 있었다.
팔각 대리석주로 세운 아성묘방(亞聖廟坊)을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아성묘 내는 고목이 더욱 연륜을 느끼게 하고 고색창연하다. 중앙로 오른쪽에 강희비정(康熙碑亭)이 있다. 康熙는 청 성조시대의 연호로 1622년부터 1722년 사이이니 적어도 300여 년 전에 황제가 이 비석을 세우고 비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 오른 쪽 담 밑에 세 개의 석비가 있었다.
가운데에 제일 작고 아무 장식 없는 장방형의 사각 비가 맹모삼천사(孟母三遷祠) 비이며 양쪽의 두 비는 비신의 상단부를 둥글게 굴려 같은 크기로 만들었는데 왼쪽 것은 맹자가 학업을 중도에 폐지하고 돌아오자 맹자의 어머니가 짜던 베를 칼로 끊고 훈계하였다는 맹모단기처(孟母斷機處) 비이고 오른쪽 비는 아쉽게도 네 번째 글자가 훼손되어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비문은 자사자○중용처(子思子○中庸處)였다.
아성묘는 맹자를 제사 지내던 묘우(廟宇)인데 중심 건물인 아성전은 이층 팔작지붕으로 건륭 황제가 세로 쓴 아성전(‘亞聖殿’)이란 금자(金字) 현판을 달려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중앙에 감실이 있고 감실에는 맹자의 소상(塑像)이 있으며 그 앞에 대형 향로가 놓여 있다. 맹자의 소상은 면류관을 썼는데 미간이 넓고 눈이 크며 수염이 희다.
맹부는 아성부(亞聖府)라고도 한다. 맹묘의 서쪽에 담을 경계로 하고 붙어 있는데 맹자의 적손 후예들이 생활하던 곳이다. 맹묘와 같은 시대에 처음 조성되기 시작하여 당(堂)과 누(樓)와 방(房)이 190여 간이며 일만 오천여 건의 희세진보(稀世珍寶)를 소장하고 있다 한다.
아성부라는 금자(金字) 현판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다시 맞배지붕으로 된 세칸짜리 예문(禮門)을 지나게 된다. 육중한 나무 대문에는 문짝마다 예복을 입고 읍(揖)하는 자세의 채색 인물화가 그려져 있었다.
▲의문(儀門)
예문을 지나면 대당을 만나게 되는데 청나라 옹정 황제가 쓴 칠편이구(七篇貽矩)라는 금자 현판이 걸려 있다. ‘칠편’(七篇)이란 ‘맹자’(孟子)의 양혜왕(梁惠王), 공손축(公孫丑). 등문공(藤文公), 이루(離婁), 만장(萬章), 고자(告子), 진심(盡心) 등 일곱 편을 이름이니 ‘맹자’(孟子)를 후세에 남겨 법도가 되게 한 가문의 긍지를 나타낸 것이리라.
앞쪽은 맹부의 관아이고 뒤쪽은 가족들의 내택으로 손님을 맞이하던 빈청은 본래 문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마음을 열면 산이 보인다.’는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창문이 달려 있고 유리도 끼워져 있었다.
맹자를 논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분이 맹자의 어머니이다.
아들을 바로 잡기 위해 짜던 베를 잘라버리고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이사도 세 번이나 했던 참으로 대단한 어머니! 그와 관련하여 두 기의 석비가 있어 후세의 교훈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뜻밖에도 맹모의 사당은 없고 맹자의 아버지 사당이 세간 팔작지붕에 후성전(後聖殿)이란 현판을 달고 남아 있었다.
▲견산당(見山堂)-입구 문
사마천은 사람을 성인, 군자, 소인, 무인으로 구분했는데 덕과 재능을 겸비한 사람을 성인, 재능은 없으나 덕을 갖춘 사람을 군자, 재능은 있으나 덕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소인, 덕과 재능 모두 없는 사람을 무인이라고 했다. 사람을 쓸려거든 무인을 쓰는 한이 있어도 소인은 쓰지 말라고 했다. 이는 덕이 갖추지 못하고 재능만 있으면 위험하기 때문이란다. 오늘날 우리 정치인들이 새겨할 대목이다.
맹림 관람을 생략하고 곧바로 역산으로 이동한다.
역산(峄山)은 이산 또는 동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추성시의 동남쪽으로 12km떨어진 곳에 있으며 태산과 마주하고 있어 "태산 남쪽의 명산"으로 꼽히고 있다.
공자는 "동산에 올라보니 노나라가 작아 보이고 태산에 올라보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 고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동산이 바로 역산이다. 역산은 진한(秦漢) 시기부터 벌써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중국고대의 9대 명산의 하나이다.
공자, 맹자, 진시황, 사마천, 화타, 이백, 두보, 소동파, 왕안석, 구양수 등 유명한 인물들이 모두 역산을 다녀갔으며 역산의 300여 곳에 남겨놓은 그들의 흔적은 역산에 문화의 색채를 더 해주고 있다.
진시황은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다음 동쪽으로 시찰을 떠나 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역산에 올랐다고 한다. 역산을 보고 감개무량한 진시황은 이사를 불러 “분봉제를 폐지하고 군현을 설치하여 천하를 통일하라"고 쓰게 하였다. 유명한 진나라 역산 기념비가 바로 진시황이 동쪽으로 시찰하면서 세운 첫 기념비이다.
역산은 또 고대의 많은 진인들이 도교의 수련을 하던 지역으로 뜻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푼돈을 노자로 모아 역산에 찾아 와서 열심히 도를 닦았다고 한다. 수많은 사찰과 수백 개의 도를 수련하던 곳이 잘 보존되어 왔으며 푸른 기와와 붉은 담으로 더욱 숙연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중국의 명산이 그렇듯이 이곳도 정상 근처까지 돌계단이 이어진다. 장군바위를 지나 휴게소에서 생수 한 병을 사 목을 축이고 삭도정류장이 있는 남천문을 지나면 관음전과 성모사 등 많은 암자에서 향을 피운다.
오화봉 안내판이 잇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전망대에 서면 정상의 모습이 아찔하게 보인다. 계단이 끝나는 곳부터는 바위 틈 사이로 몸을 숙여 기어가야 통과할 수 있다. 마치 서울의 북한산 호랑이굴을 연상시킨다.
정상에 서면 탁 트인 시야가 가슴까지 시원하게 한다. 마치 속리산 문장대에 서 있는 느낌이다.
역산은 바위와 돌이 기이한 것이 특징이다. 오교석, 어석 등 수많은 형상의 기암괴석들이 산의 곳곳에 들짐승의 모양으로 널려 인공적인 조각을 거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곡부로 이동하여 어제 점심식사를 했던 유림취주점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테이블마다 공부가주와 물만두까지 추가로 올라오고 즐거운 점심식사는 1시간이 넘게 계속된다. 배불리 먹고 제남으로 이동한다.
고속도로를 달린 지 2시간이 지나 서제남(西齊南) 톨게이트를 빠져 나간다. 은좌백화점이 자리 잡은 제남 중심가의 숙소로 향하는 동안 창밖으로 펼쳐진 모습들은 첫날과는 다른 모습이다.
‘창문을 열면 파리가 들어온다고 창문을 열지 않으면 신선한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다’며 등소평이 펼친 대외 개방정책으로 잠자던 중국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지도자의 한 사람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한 결과를 가져 오는지 중국을 올 때마다 역동적으로 변하는 모습에 놀라곤 한다.
발마사지를 받기 위해 ‘傳統好兄弟足通’으로 들어선다. 동남아 여행을 하면서 누리는 호사 중의 하나다. 70분간의 마사지는 여행의 피로를 덜어준다. 곶감을 판매하는 할머니에게 10위엔을 건네면서 곶감을 싸달라고 하자 엄청 많은 양을 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옥천삼신(玉泉森信)호텔에 도착하여 가이드에게 주문한 깨(5kg 2만원-잘 사왔다고 아내에게 칭찬 받았다)를 받아 들고 방으로 들어서 여장을 푼다. 창밖으로 보이는 천성광장(泉城廣場)주변 야경이 너무 아름답다. 천성광장은 유네스코가 국제예술 광장으로 지정한 곳이다.
숙소 옆에 은좌상성은 산동성에서 규모가 가장 큰 쇼핑센터로 내부 장식이 호화롭고 우리나라 고급 백화점 수준이다. 가격이 합리적이고 서비스도 친절하다. 지하 슈퍼마켓에서 표돌천 상표의 고량주와 건과일 그리고 잣, 호도, 호박씨 등 견과류를 구입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다시 야시장으로 나갔다. 어두컴컴한 골목에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야시장은 서울의 남대문 시장과 비슷하며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물건을 팔지만 선뜻 살만한 물건은 없다. 과일까지도 꼬치로 판다.
중국 여행의 마지막 밤이 아쉬운지 송촌중 선생님 일행들도 호텔 근처 선술집에서 술 한 잔을 나눈다. 귀연의 두 분 고문님과 몇 분 일행들에게 양꼬치구이를 안주 삼아 청도 맥주를 대접하며 이번 여행의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눈다. 좋은 사람들과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늘 여행이 끝날 즈음에 느낀다.
1월 28일 (일)
5시 모닝콜에 눈을 뜨고 짐을 꾸린다. 술은 휴대하고 검색대를 통과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탁송하는 가방에 넣어야 한다. 호텔 프론트에 방 키를 반납하면서 산동성 특산품 전병 1박스(50위엔)를 구입했는데 맛이 고소하고 주전부리로 그만이다.
6시 호텔을 떠나면서 아침식사로 호텔에서 제공되는 도시락은 겹친 식빵 반 조각에 삶은 계란 2개, 소시지 2개, 우유 한 봉지가 전부였다.
숙소에서 제남 공항까지는 약 50여분이 소요된다. 짐을 부치고 탑승권을 받아들고 출국수속을 받는다. 조용한 공항은 대부분 한국 관광객들이 차지하고 있다. 남은 30위엔은 호랑이 기름 한 병을 사서 모두 소비했다.
8시 30분 산동항공은 정확하게 제남 공항을 이륙한다. 올 대와 똑같은 기내식이 제공되고 1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비행기는 한국시간 11시에 인천공항에 안착한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서울 팀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 다음 대전행 버스에 오르자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정치뉴스가 머리를 아프게 한다. 화성휴게소에서 얼큰한 떡라면으로 허기를 달래고 토막잠에 빠진 사이 대전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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