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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백두산 4편- 아! 고구려

넷째날(2006년 8월 6일 일요일)


6시. 모닝콜이 울리기 전 잠이 깼다. 아침 산책을 나서면 거리의 모습, 시장의 풍경 등을 통해 그네들의 삶을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다. 숙소인 호텔 앞에 집안시조선족문화관이 있다. 조선족 할머니 한 분이 계단에 앉아 졸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중국의 공원과 광장의 일요일 아침은 부채춤, 검무, 제기차기, 댄스 등으로 활기가 넘친다. 


시장으로 들어선다. 고기를 손질하는 정육점에 다다르자 지저분하고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1시간 정도의 산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호텔에서 제공하는 현지식 뷔페로 아침식사를 한다. 죽 한 그릇과 계란후라이 그리고 과일(수박과 멜론)로 간단하게 식사를 끝낸다.

 

7시 40분. 호텔을 출발하여 고구려 유적지 답사를 시작한다.

▲왼쪽은 중국 전 일정을 진행하는 가이드(조선족 2세), 중간은 집안시 가이드(조선족 2세), 오른쪽은 호텔 객실 담당 직원-어르신 한 분이 실수로 객실 화장실의 유리컵을 파손했는데 변상하라고 해서 10위엔(1300원)을 배상했다.

 

고구려는 졸본(환인)의 오녀산성에서 나라를 세운 뒤 (BC 37), 유리왕 22년 (AD 3)에 집안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장수왕 15년 (AD 427)까지 400여 년 간 고구려의 수도로 삼았다.


집안(集安)은 한국 고대사의 비밀 열쇠를 가지고 있는 압록강변의 고도로서, 400년 간 고구려의 수도로 사용된 국내성의 옛 터와 광개토왕릉비, 장군총, 고구려 고성인 환도산성 등 많은 고구려 역사 유적지를 보유하고 있어 ‘고구려 역사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고구려 유적지 탐방은 집안박물관-환도산성과 산성하 귀족무덤군-오회분5호묘-광개토대왕비와 무덤-장군총(입장료는 한 곳당 30元)으로 이어진다.


집안박물관

숙소에서 버스로 3분 거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집안박물관(입장료 30元)으로 들어서자 고구려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고구려 유물들이 즐비했다. 들어가는 입구에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이 실물 크기로 전시돼 있었으며, 광개토대왕릉의 출토유물을 직접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을 일컫는ꡐ호태왕(好太王)ꡑ이란 글자가 새겨진 청동방울이라든가 전돌은 여기서만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광개토대왕을 호태왕이라 부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귀면기와다.


환도산성으로 이동한다.

고구려 성의 특징은 평지성과 산성의 이성(二城)구조로 돼있다. 평지성은 평상시 도시 기능을 하고, 산성은 전시의 방어기능을 담당한다. 집안의 국내성이 평지성으로 도시기능을 했다면, 환도산성은 전시에 그곳으로 옮겨가 수비기능을 하도록 만들어진 산성이다.


환도산성은 해발 676m에 이르는 환도산에 위치해 있다. 환도산성은 한 눈에 보아도 천혜의 요새임을 알 수 있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협곡과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전쟁 중심의 고구려에서 방어를 위한 가장 전형적인 산성이다.


산성의 답사는 남문 성곽에서 시작된다. 남문 성곽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개울이 흐르고 길이 생기면서 중간 부분이 끊어진 채 남아있다.


중국인 관광객을 위한 11살(소학교 4학년)짜리 현지인 가이드 소녀의 깜찍한 모습과 기가 막힌 설명에 모두들 감탄을 금치 못하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과일과 야채를 파는 노점이 있는데 모두 무공해라고 한다. 이유는 농약이 비싸 농약을 사용하면 수지타산이 맞지를 않기 때문이란다.


산성 안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장대(將臺)는 성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환도산성에서 2.5km떨어진 곳에 고구려의 2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자리하고 있고 성곽 일부만 남아 국내성이었음을 말해준다.


동쪽 산기슭에 왕궁 터가 보인다. 왕궁 터 주변은 농경지로 경작되고 있다. 길이가 92m, 너비가 62m에 이르는 대형 왕궁 터에서는 50여 개 이상의 주춧돌과 기와조각들이 발견됐다고 한다.


산성하 귀족 무덤군

환도산성 아래 산성하 귀족 무덤군에는 37기의 커다란 무덤이 산재해 있는데 풍수지리상 배산임수에 해당하는 명당 자리다.


오회분

오회분(五盔坆)은 다섯 개의 무덤이 마치 군사들이 쓰는 투구나 음식을 담는 바리(그릇)를 엎어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투구 또는 그릇을 뜻하는 ꡐ회(盔)ꡑ자를 쓰고 있다. 오회분중에서 5호묘는 지난 6월부터 다시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5호묘(五号墓)의 무덤방은 4.7평으로 제법 넓은 편이며 네 벽면에 거대한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이 사신도가 벽화의 주제를 이루는데 동쪽 벽에는 날아오르는 청룡(靑龍)을, 서쪽 벽에는 백호(白虎)를 담았다. 또 남쪽에는 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주작(朱雀)이, 북쪽에는 현무(玄武)로 거북과 뱀이 서로 휘감고 얽혀있다.

 

1단에는 해와 달의 신, 수레바퀴제조신과 씨 뿌리는 하늘나라 사람, 소머리신(神農)과 불의 신, 하늘을 나는 신선 등의 그림이, 2단에는 용을 타고 비파, 거문고, 피리, 장고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하늘나라 사람들이 그려져 신과 사람을 한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가이드의 설명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이 심하다.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 있으나 근처 화장실에 붙은 상점에서 선명한 복원본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다른 오회분에서 나온 벽화의 원본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조선족 찻집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차 한잔을 대접받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광개토대왕비로 이동한다.


광개토대왕비(국강상광개토경평호태왕비(好太王碑)

서기 414년 고구려의 제 20대 장수왕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높이 6.4m, 무게 37톤의 거대한 기념비. 비면에는 1802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가운데 150자는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마모되어 있다.


비문은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장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왕들의 족보, 그리고 광개토대왕대 대한 간단한 행적 소개, 2장은 광개토대왕이 수행한 정복활동의 내용, 3장은 왕릉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수묘제(守墓制)를 개혁했다는 내용과 수묘인의 출신지를 적어 놓았다.


주몽(朱蒙)의 어머니 유화는 하백(河伯)의 딸인데 부여왕(夫餘王)에 의해서 방안에 갇히게 되었다. 햇빛이 그녀의  몸을  비추면서  점점  배가 불러오더니  마침내  잉태하게 되어 알 하나를 낳았다. 부여왕이 개한테 버렸으나 개가 먹지를 않았고, 돼지한테 버렸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고, 길에다 버리니 마소도 피하였으며, 그 후에 들에 버리니 뭇새가 털로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부여왕이 쪼개보려고 했지만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미한테 되돌려주었다.


그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었다. 성장하게 되자 이름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는데, 그 나라 속언으로 주몽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광개토대왕비문 중에서-


광개토대왕비에서 5분 정도 거리에 호태왕릉(好太王陵)이 보인다. 뜨거운 햇살을 이고 걸어서 이동한다.


광개토대왕 무덤[호태왕릉, 적석총]

장군총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여겨져 왔으나, 장군총은 광개토대왕비로부터 1km나 떨어져 있고 비에서 500m 떨어진 적석총에서 ‘태왕릉이 신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라는 의미의 글이 새겨진 벽돌이 출토되고, 크기도 장군총의 4배나 되기 때문에 적석총을 광개토대왕 무덤으로 여기고, 장군총은 고구려 20대 임금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인용 김기웅 ‘고분’ 색깔있는 책들 대원사, 1995>


보통은 광개토대왕릉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고구려 축조법의 특징인 겉쌓기, 속쌓기의 이중 쌓기 축조법에서 겉쌓기 부분이 모두 파괴되고 자잘한 돌들로 쌓여진 속쌓기 부분만 남아 있는 상태다. 무너져 흩어져 나뒹구는 석재들과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북한마을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장군총으로 이동한다.


장군총 앞 노점상에서 인솔자가 사 준 아이스크림(1元)으로 더위를 식히며 계단을 따라 장군총으로 오른다.


장군총

일명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군총(將軍塚)의 정식 명칭은 우산하1호분(禹山下一號墳)이다. 무덤 앞으로는 평야(通溝平野)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 압록강이 흐른다. 무덤은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하여 방대형 단을 7층으로 쌓고 제 4층 단의 한가운데에 널길과 돌방[石室]을 설치했다. 묘실의 방향은 서남향이며 무덤의 네 모서리는 정확히 동서남북에 맞추어졌다.


신라가 금속공예의 민족이고, 백제가 흙의 민족이라면 고구려는 돌의 민족이다. 집채만한 돌을 쌓아올려 장수왕릉을 세웠고 고구려의 수십 개의 성이 아직까지 건재한 것은 고구려인의 돌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준다.


천장 돌의 넓이는 약 60평방미터, 무게는 50톤 가량이다. 널방은 한 변의 길이가 5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가 5.5m이다. 널방 안에는 동서로 나란히 2개의 널받침[棺臺]을 설치했다.


제1층의 각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높이 5m가량의 대형 석재로 버팀 돌을 세워 무덤을 지탱하게 했는데, 원래는 12개였지만 북면의 1개는 깨어져 없어지고 현재는 11개만 남아 있다.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되어 묘실 내에서는 일체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단지 무덤 남쪽 밑의 흙더미에서 동제장식편이 수습되었을 뿐이다.


장군총에 쓰인 석재는 무덤에서 20km 거리에 있는 근처 채석장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이유는 이 채석장의 석재가 결이 고운 화강암으로 장군총에 쓰인 돌과 재질이 같기 때문이다.


장수왕은 평양성으로 천도하였지만 집권이 시작되면서 무덤을 만들기 때문에 사후 이곳에 매장된 것이라고 한다.


장군총 옆에 있는 고인돌은 부장묘로 추정되며 도굴꾼들에 의해 석문이 열려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후궁의 묘라고 한다


우리 조상의 묘와 비를 자기네 것이라며 중국이 관리하고 우리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그것을 관람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11시 30분. 압록강으로 이동한다.

압록강(鴨綠江)은 백두산 남쪽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중국과 국경을 이루면서 서해에 흘러드는 한반도에서 제일 긴 강(길이 803킬로미터, 유역넓이 6만 3160평방킬로미터)이다.

압록강에서 바라보는 북한쪽 산은 헐벗어 있고, 어떤 곳은 산꼭대기까지 산비탈을 경작하고 있다.

모터보트를 타고 압록강을 달린다. 타이어공장이 있는 북한 땅 10여m 전방까지 접근하면  잠시 시동을 끈다. 가이드가 중국인 보트 기사에게 북한 땅에 정박할 수 있냐고 묻자, 택도 없는 소리라며 일축하고 방향을 튼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우리의 또 다른 민족이 있었다. 철책선과 지뢰밭으로 무장된 남과 북보다도, 중국에서의 압록강은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저 강 너머에서도 고구려의 문화는 찬란한 꽃을 피웠건만, 가볼 수 없음이 못내 안타까웠다.


12시. 북한식당인 ‘묘향산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복무원들의 공연을 관람한 후 압록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한 다음 버스를 타고 환인으로 이동한다.


 집안에서 환인으로 가는 길은  수해로 도로가 끊기고 곳곳에 수마가 할퀴고 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16시 20분. 환인(桓仁)도착

오녀조각상이 서 있는 로터리에서 잠시 정차한다. 멀리 천연요새인 졸본성(오녀산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10여분 지나 오녀산성 주차장에 도착한다. 이곳 가이드는 한족 처녀가 맡았다.

"기원전 2-3세기경 고주몽은 비류수가에 나라를 세우고,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


광개토대왕비와 삼국사기에 나온 이야기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 물의 신인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 태어난 동명성왕(고주몽)의 신화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졸본성

하늘에 우뚝 솟아난 바위 절벽 위에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이 있었다.

대제국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첫 걸음은 이렇게 신비스러운 곳부터 시작되었다.


고구려 건국신화에 따르면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하여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추격병을 물리치고 정착한 첫 도읍지라 한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넓은 공터와 우물이 있어 천연의 요새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절묘하게 이용하는 고구려인들의 혜안이 놀랍다.


해발 800m의 오녀산 꼭대기에 동. 남. 북쪽 삼면을 돌로 쌓았는데 남쪽은 절벽이며, 길이가 약 1,000m이다. 서쪽 편에는 성벽 없이 산봉우리가 장벽을 대신한다. 성안에는 마르지 않는 천지(天池)를 비롯하여, 곡식을 저장했던 대형 창고터, 온돌방, 비류수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점장대 등 수많은 유적들이 널려있다.


한국과 북한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졸본성(오녀산성)은 집안의 고구려 유적지와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중국은 통일한국을 대비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동북공정(고구려역사편입 전쟁)에 무려 1조원을 쏟아 부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어 오녀산성은 A가 4개인 국가등급 여행지다. 만리장성, 자금성, 계림 등도 4A급.


입장권(60元)을 끊고 셔틀버스를 타고 졸본성으로 향한다.

서문주차장에서 내리면 까마득한 계단길이 하늘로 이어진다. 직선의 계단길이 힘든 사람들은 ‘18반'이라고 불리우는 지그재그 길을 이용한다.


2천 개의 계단을 20여분쯤 올라가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드넓은 하늘이 펼쳐진다고 하여 ‘천창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해발 800m 정상에 남북 600m, 동서 200m, 둘레 1km의 평지가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졸본성에서 내려다본 비류수(혼강)는 S자로 굽이도는 수태극과 산태극이 절묘하게 그림을 그려놓았다.


왕궁터는 주몽과 유리왕의 거처였으나 주춧돌 7개만 늘어선 형태로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토기와 철기, 돌칼 등 중요한 고구려 초기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청나라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도교사원터는 1966년 폐쇄되었다고 한다. 안내판에는 옥황관으로 되어 있다.


이틀동안 백두산 천지를 3번이나 봤는데 졸본성에서도 천지를 만났다. 800m 석산위에 샘물이 솟는 것은 하늘의 선물이었다. 이 샘물이야말로 생명수다.

지름 1.5m 정도 되는 거대한 맷돌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구려 시대에 실제 사용하던 것이란다.

18시 15분. 발부리에 걸리는 돌의 흔적을 지나면 경계를 하기 위한 전망대인 점장대(点將臺)가 나온다. 선돌에는 ‘요령성 제 1경’이라고 쓰여있다. 환인댐을 만들어 놓아 인공호수가 시원한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하산은 남문 쪽으로 한다. 남문으로 내려가는 길 일선천(一線天)은 만만치 않는 경사다. 바위절벽 사이에 한사람만 간신히 내려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놀랄만하다. 계단을 내려서면 황산의 허공다리를 연상시키는 길이 이어진다.


말에게 물을 먹이던 음마만(飮馬灣)이라는 연못에는 한국인 관광객을 위한 태극문향의 돌이 놓여있다. 손수건에 물을 적셔 얼굴을 씻는다.


고구려 성벽은 2천년이 지났건만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조심히 다가가 성돌을 어루만졌다. 고구려인의 체온을 느껴지는 듯하다. 점점 어두움이 짙어 가는 산성의 오솔길을 따라 남문에 도착한다.


19시 50분. 현지식 만찬은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푸짐하다. 음식 인심은 매우 후하다. 환인 특산품인 포도주로 건배하고 마지막 만찬을 즐긴다.


 

숙소인 호텔에 여장을 풀고 샤워를 끝낸 다음 노래방(KTV)에서 마지막 밤 아쉬움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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