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남쪽에 우람한 자태로 기품 있게 자리잡고 있는 지리산은 한민족의 영산으로, 시대의 영욕을 대대로 묻어온 역사의 산으로, 그리고 이룰 수 없는 그 무엇의 마지막 귀의처였던 회한(悔恨)의 산으로 우리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 있다. 오늘 지리산 한 자락을 품으러 집을 나선다.
8시 25분 보조의자까지 산꾼들을 가득 태운 산악회버스는 남대전요금소로 진입하여 한적한 대진고속도로 거침없이 질주한다. 산악회 회장님이 간단한 인사와 산행 개념도에 대한 설명을 한다. 9시 덕유산 휴게소에서 20분간 정차하고, 10시 5분 단성요금소를 빠져나와 곧바로 만나는 사거리를 지나 10여m 쯤 진행해서 우회전하여 새로 난 19번 국도를 타고 시천 중산리 방향으로 향한다. 왼쪽으로 보이는 덕천강에는 꽤 많은 물이 유유히 흐르고 어린아이들이 한가롭게 물놀이하는 모습이 보인다. 중산리 4km전방에서 왼쪽 1047번 지방도로 들어서 하동 청학동방향으로 향한다. 곧바로 예치터널을 통과하면 잘 정돈된 민박촌 예치마을이 나타난다. 차는 힘들게 고개를 오르고 삼신봉 아래 해발 650m 지점을 관통하는 길이 2㎞의 삼신봉 터널을 따라 하동속으로 들어간다. 터널(차로 약 2분)을 빠져나와 내리막길을 잠깐 내리고 표지판을 따라 우회전하여 청학동으로 들어선다. 굽이굽이 길을 따라 서당간판이 수없이 보인다. 청학(靑鶴)은 중국의 문헌에 나오는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또 운다'는 전설의 새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태평성대의 이상향을 청학동이라 불렀다. 80년대 이후 청학동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어쩔 수 없이 이곳도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도인촌이라기보다 관광촌이라 할 정도로 달라졌다. 10시 50분 청학동 주차장에 정차하여 산꾼들을 내려놓는다. 매스컴으로 유명해진 김봉곤 서당 몽양정이 보인다.
곧바로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오른다.
11시 2분 갈림길이다. 왼쪽은 청학동가는 길이고 오른쪽 지리산 청학동매표소로 들어서면 넓고 약간의 오르막길이다.
키 자란 산죽이 무성한 가운데 청송이 청량함을 더하는 숲길이다. 좁은 오솔길로 바뀌고 약간의 오르막과 평지가 번갈아가며 이어지고 왼쪽 계곡을 흘러내리는 힘찬 물소리가 시원함을 더한다. 바위 틈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은 그 모양이 실타래를 닮은 듯 하고, 주변의 짙은 녹음은 계곡의 깊은 물 속을 한층 신비롭게 한다.
계곡을 따라 심산에서만 들을 수 있는 새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돌길을 따라 오른다. 10시 25분 왼쪽으로 빨치산 공비 토벌에 사용된 것으로 짐작되는 돌로 조성된 참호가 하나 보인다. 길은 흙길로 바뀌고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돌길과 흙길이 번갈아 가며 이어지고 5분 정도 지나 나무다리를 건넌다. 더욱 가파른 돌길을 거친 숨 몰아쉬며 한 발 한 발 오른다. 10시 40분 샘터에 다다른다.
청학동 1.7km 삼신봉 0.8km 이정표가 보이고 청학동 예절학당 아이들이 조잘대며 인사를 건넨다.
11시 43분 통나무로 만든 가파른 돌계단을 숨가쁘게 6분간 치고 올라 갓걸이재 안부에 도착한다.
세석대피소 8km 이정표가 서 있고 조망은 없다.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달래고 3분간 휴식을 취한 후 왼쪽으로 90도 방향을 틀어 오른다. 12시 암봉이 하나 길을 막아선다.
왼쪽으로 돌아서면 삼신봉으로 오르는 선두 일행의 모습이 보인다.
왼쪽으로 시야가 트이고 굽이치는 산줄기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운무가 산을 가리고 먹구름이 산을 넘으며 모습을 감춘다. 12시 5분 삼신봉 (1284m)에 도착한다.
정상은 넓은 암봉이며 사방으로 조망이 탁 트여 지리산을 한 품에 앉은 듯 장쾌한 연봉이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다. 손을 뻗으면 잡힐 듯 다가와 있는 천왕봉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제석봉 촛대봉 영신봉 칠선봉이 오른쪽으로 중봉 하봉이 100리 능선 길을 이룬다. 고봉을 뒤덮은 짙은 운무가 조망을 가려 안타깝다. 멀리 산 아래에 청학동 김봉곤서당이 보이고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은 햇님이 얼굴을 감히 내밀지 못하도록 어깨동무를 하고 흘러가고 있다.
12시 13분 휴식을 끝내고 기념 사진을 촬영한 후 내림길로 내려선다. 잠깐 내려서면 쌍계사 8.9km 세석대피소 7.5km 청학동 2.5km 이정표가 반긴다. 오른쪽 쌍계사 방향으로 향한다. 부드러운 흙길은 산죽나무 사이로 한사람이 다닐 정도로 좁고 오붓한길이다. 표지기가 많이 매달린 안부를 지나 석문 바위를 통과한다. 12시 35분 바위 협곡을 1분 정도 오르면 삼신산정(1454.7m)이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내삼신봉이다.
짙은 운무로 조망은 없다. 왼쪽 바위로 자리를 옮겨 바위에 앉아 운무가 걷히기를 기다리며 점심 식사를 한다. 좀처럼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날씨가 바쳐주지 않아 아쉽지만, 우리가 수 십 년을 살아가면서 똑같은 날은 하루도 없는 것처럼 흐린날은 나름대로의 멋을 한껏 보여준다.
내삼신봉부터 상불재까지는 기암절벽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능선길이다. 부드러운 길을 따라 10분간 내려서자 등산로 아님 표찰이 보이고 그 뒤로 널찍한 관통굴이 보인다. 길이 20여m, 너비 10여m 높이 2m 정도 되는 너른 굴로 '송정굴'이라 불린다. 조선중기 학자였던 송정 하수일 선생이 임진왜란 당시 이 굴로 피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내림길이다. 13시 30분 마치 자물쇠가 얹혀져 있는 모양의 거대한 바위를 만난다. 쇠통바위다. 쇠통바위는 두개의 큰 바위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 그 사이로 큰 구멍이 생겼는데 옆에서 보면 바위 가운데가 뻥 뚫려 마치 열쇠구멍을 연상케 한다. 학동마을에 있는 자물쇠 바위를 이 구멍에 꽂으면 천지개벽과 함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흥미로운 전설을 갖고 있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선다. 잠깐씩 만나는 오르막길이 숨을 가쁘게 하고 더욱 힘들게 한다. 13시 40분 가파른 오르막길을 5분 정도 치고 올라 청학봉에 다다른다. 쌍계사 5.8km 이정표가 서 있다.
8분간 휴식을 취하고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달랜다. 산길은 아래로 급격히 떨어진다. 3-4분 동안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면 산죽나무 사이로 평탄하고 오붓한 길이 이어진다. 14시 15분 상불재에 도착한다. 삼거리 갈림길로 왼쪽길은 청학동(2.5km)으로 원점회귀하는 길이고, 쌍계사는 불일폭포(3.1km) 방향으로 직진한다.
가파른 돌길을 따라 4-5분 동안 내려서면 너덜지대가 이어지고 4분 정도 지나 완만한 내림길을 3분 정도 내려오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계곡길이다. 식수로 손색이 없는 청정수가 힘차게 흘러내리고 있다. 숲의 맑은 공기와 계곡물 소리 그리고 잔잔히 들려오는 새 노래 소리를 벗삼아 이곳의 분위기에 취한다. 잠시 배낭을 벗어놓고 세수를 하고 물 한 모금을 마시며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다.
14시 32분 휴식을 끝내고 길을 재촉한다. 14시 35분 쌍계사 4.1km 삼신봉 4.8km 이정표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조그만 폭포가 보이고 곧바로 계류를 건넌다. 아름드리 잡목 숲이 온통 계곡을 뒤덮고, 우렁찬 물소리를 내는 물줄기는 넓어졌다 좁아졌다 지리산 일대의 산자락을 휘감아 돌면서 적잖은 소와 폭포를 만들어낸다. 산꾼들의 표지리본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산죽나무 사이로 오붓한 길이 이어진다. 14시 45분 계류를 건너면 하늘 높이 쭉쭉 뻗은 소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14시 50분 계류를 건너고 14시 53분 너덜지대를 지난다. 왼쪽으로 시원한 계곡물이 힘차게 아래쪽으로 흘러내린다. 14시 57분 계류를 건너 평지처럼 부드러운 길을 10분간 이어간다. 잠시 내림길을 내려서 나무울타리가 쳐진 문을 빠져나오면 불일폭포 0.3km 이정표가 보이는 삼거리에 도착한다. 16시 12분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무계단을 내려서고 나무다리를 건너 가파른 돌길을 힘겹게 오르고 다시 내려선다. 미끄러운 바위길이라 쇠난간이 설치돼 있다. 지리산 제일의 폭포라 부르는 불일폭포(佛日瀑布)는 고려 희종때 보조국사 지눌이 이 폭포 근처에서 수도하였는데 입적한 후 왕이 내린 '불일시조'라는 시호를 따서 불일폭포라 하였으며, 지눌이 수도하던 암자를 불일암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폭포아래 용소에 살던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살짝 쳐서 청학봉, 백학봉을 만들고 그 사이로 물이 흘러 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 계곡의 60m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계곡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깊은 산중에서 울려 퍼지는 폭포소리는 울창한 원시림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한층 기운을 더한다.
5분 동안 넋을 잃고 폭포를 감상하고 정신을 차려 불일폭포에서 되돌아 나와 하산로를 따르면 곧 봉명산방에 닿는다. '봉명산방'은 지리산에 들어왔던 소설가 정비석씨가 이름지었다고 한다.
국토 모양의 연못인 반도지(半島池)와 소원을 빌 수 있는 소망탑이 보이고 그 아래에 샘물이 있다.
이곳에서 20년 이상을 터 닦고 살고 있는 변규화씨는 예식장에 가고 보이지 않았다. 휴게소를 겸하고 있어 캔맥주와 시원한 음료수를 비롯한 간단한 간식거리를 판매한다. 5분 정도 휴식을 취한다. 불일평전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사이에 두 개의 천지동장군이 함께 있는 목장승 일가족이 눈길을 끈다. 1970년대 말까지 농사를 지었던 이곳은 1980년 야영장으로 조성되어 지금은 야영장으로 사용된다.
돌 박아 잘 정비된 길을 따라 내린다. 나그네들의 다리 쉼을 위한 나무의자가 놓여있다. 15시 47분 환학대에 도착한다.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최치원이 이곳에서 쌍계사 대웅전 앞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바로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에 세수하고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달래며 잠시 쉬어간다. 세석대피소 15.3km 쌍계사 1.2km 이정표가 서 있다. 15시 50분 길을 재촉한다. 잘 정비된 길이다. 길이 넓어지고 평탄하다. 나무다리를 두 번 건넌다.
16시 5분 해발 250m 국사암 이정표가 보인다. 쌍계사 0.4km라고 적혀있다. 국사암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출입을 금한다. 조금 더 내려서면 쌍계사 금당과 팔상전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4) 의상의 제자 삼법(三法)이 창건하고 문성왕 2년(840) 진감선사가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정강왕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며 인조 10년(1632)에 중건되었다.
대웅전(보물 제 500호) 앞마당과 연결되는 계단 아래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가 눈길을 끈다. 77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입적한 신라말의 명승 진감선사 혜소의 덕을 기려 세운 탑비이다. 귀부의 머리는 용머리로 검은 대리석 비석을 등 중앙에 업고 있다. 비문은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쓴 것으로 우리나라 4대 금석문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며, 최치원의 사산비명(지리산의 쌍계사 진감선사 부도비, 만수산의 성주사 낭혜화상 부도비, 초월산의 대숭복사비, 희양산의 봉암사 지증대사 부도비)가운데 하나이다. 진감선사의 일대기와 업적 등이 적혀있다.
진감선사가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범패인 어산(魚山)을 작곡했다고 하여 이름을 붙인 누문인 팔영루를 왼쪽으로 돌면 1990년에 세운 쌍계사 구층석탑이 보인다.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석가 진신사리 등을 봉안하고 있는데,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을 닮았다.
곧바로 천왕문을 지나고 문수·보현 동자(문수동자는 사자를 타고 보현동자는 코끼리를 타고 있다)가 있는 금강문을 지나 '삼신산쌍계사' 라는 현액이 걸려 있는 화려한 다포집인 일주문을 빠져나온다. 뒤돌아보면 이들 건물은 모두 거의 일직선상에 가깝게 놓여 있다.
16시 25분 석문교를 건너면 왼쪽으로 지리산 국립공원 쌍계사매표소(입장료 3400원)가 보인다.
어느 절에서처럼 불교용품을 파는 가게와 기념품을 파는 가게 그리고 음식점과 노점상이 즐비하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내려서고 쌍계교를 건너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주차장이다. 16시 30분 하산 완료. 간단한 산행 뒤풀이를 하고 버스는 19번 국도를 타고 구례-남원으로 향한다. 왼쪽으로 섬진강이 유유히 흐른다. 구례에서 하동까지 섬진강을 곁에 끼고 달리는 19번 국도는 강 건너 마을을 두고 산자락에서 달리기 때문에 차장 밖으로 내다보이는 섬진강은 전설 속의 강처럼 곱고 아름답다. 한낮이면 초록빛이 짙게 깔리고 저녁이면 검푸른 빛에 노을이 머금어 황홀한 빛을 발하는 섬진강은 신비롭기조차 하다. 구례를 지나 남원에서 88고속도로 남원요금소로 진입하여 대구/남장수 방면으로 향한다. 18시 34분 남장수요금소를 빠져나가 곧 우회전하여 다시 19번 국도를 타고 장수로 향한다. 수분령휴게소에서 10분간 휴식을 취한다. 수분령을 섬진강과 금강의 분수령으로 알고 있으나, 분수령은 수분령 조금 북쪽에 위치한다. 19시 17분 대진고속도로 장수요금소로 진입하여 20시 남대전요금소로 빠져나온다
Bobby Vinton - Sealed With A K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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