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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행일지

천태산

2003년 12월 20일(일)

오후에 약속이 있어 가까운 천태산에 다녀오려고 아침 6시 15분 일찍 집을 나선다. 6시 35분 대전요금소로 진입하여 새벽 공기를 가르며 10분 동안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옥천 요금소로 빠져나간다. 4번 국도를 타고 어두움을 밀어내며 양산 방면으로 15분 정도 달리다가 천태산 11km 표지판이 보이는 곳에서 501번 지방도로 무주 양산 방면으로 빠져 15분 정도 달리자 천태산 영국사입구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천태산 주차장까지는 2.5km로 5분 정도 소요된다. 이른 아침이어서 주차장 매표소와 입산 매표소가 텅 비어있다. 7시 25분 주차료와 입장료가 굳어 기분 좋게 산행을 시작한다.


매표소에서 3-4분을 걸어가면 충북의 설악, 정상 2.2km 안내판이 보이고 이곳이 등산로 초입이다. '天台洞天(천태동천)'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 바위를 지나 아무 인적 없는 산길을 혼자 걷는다.


천태산 계곡을 오른쪽에 끼고 1-2분 오르면 갈림길이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쭈글쭈글한 삼신바위를 지나 돌계단과 침목으로 만든 계단을 차례로 오르면 왼쪽으로 반들반들한 바위를 타고 얼음 속으로 수정처럼 맑은 물이 떨어지는 삼단폭포(옛 용추폭포)가 보인다.


이어지는 침목 계단을 올라 둔덕에 이르면 새로운 모습으로 전개되는 별천지가 나타난다. 제법 넓은 평지에는 논과 밭이 자리잡고, 그 품안에 천년고찰 영국사가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둔덕 갈림길에서 왼쪽은 망탑(250m)으로 가는 길이다. 영국사 일주문 노릇을 하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이 곳을 다녀간 전국 산악회의 표시기가 길 옆 울타리에 만국기처럼 달려있는 길을 따라 은행나무로 향한다.


천연기념물 223호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는 높이가 31m, 가슴 높이의 둘레는 11m이며, 나이는 대략 1000년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천태산의 역사요, 터주대감인 셈이다. 가지는 2m 높이에서 갈라져 그 중 하나는 땅으로 늘어져 새로운 줄기를 만들어내고 여기서 자란 새로운 나뭇가지의 높이도 5m가 넘는다. 이 은행나무는 국난이 있을 때 소리를 내어 운다고 하며, 가을에는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고 한다. 격년마다 많은 양의 은행이 열린다고 한다.


영국사는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창건한 절로 원래 이름은 국청사였는데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서 국난을 극복했다 하여 영국사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전한다. 대웅전이 특이하고 경내에는 신라후기의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보물 533호)을 비롯하여 원각국사비(보물534호), 부도(보물532호)등의 문화재가 있다. 산책 나온 스님 한 분이 뒤따른다. 천태산을 오르는 길은 영국사에서 정면으로 산을 바라보아 오른쪽부터 A, B, C, D 4개의 코스가 있다. 현재는 B코스와 C코스는 생태계 보호를 위하여 폐쇄해 놓았기 때문에 A코스로 올랐다가 D코스로 내려오기로 하고, 은행나무 옆 논두렁을 타고 가다 누교당(한옥집)을 바라보면서 A코스(미륵길) 숲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7시 50분이다.


왼쪽으로 송판서묘가 있고 몇 발자국 걸으면 천태산 지킴이 배상우씨가 제작한 천태산 등산 안내도를 비치한 통이 보인다. 예전에는 밥통에 넣어 두었다고 한다. 천태산의 등산코스 개발부터 시작하여 암릉 곳곳에 설치된 로프, 등산안내판 등도 모두 양산면 가곡리에서 금호약방(011-9401-9028)을 경영하고 있는 배상우씨라는 분이 손수 하였다고 하니 그 분의 천태산 사랑에 절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앙증맞은 침목 계단을 따라 점점 가파라지는 경사길을 10여분 올라 전망 좋은 바위에 도착한다. 온몸으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품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물 한 모금으로 거칠어진 숨을 달랜 후 다시 오름을 재촉한다. 뒤늦게 따라 오르던 스님이 잘 다녀오라며 인사하고 내려간다. 로프가 설치된 암릉을 두 군데 지나서 또 다시 만나는 암릉은 만만치 않은 암벽 등반로다. 오른쪽으로 노약자를 위한 안전 등산로가 있다. 75m에 달하는 암벽을 로프에 매달려 오른다. 중간 중간에 약간 평평한 부분을 만났다가 다시 로프를 타고 오른다. 로프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매듭이 지어져 있어 미끄러질 염려는 별로 없지만 오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한참 올라가다가 앉아 아래쪽 세상을 바라본다. 잡념이 끼어 들 여지가 없다. 헛된 아집이나 집착이 가슴속에 자리잡을 여유도 없다. 마음이 그지없이 평화롭다. 암벽을 다 오르고 8시 25분 바위에 붙어있는 정상 500m 표지판부터 눈 덮인 암릉을 10여분 숨가쁘게 오르자 안부 갈림길이다. 왼쪽은 C, D 코스 하산로이고 오른쪽은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부터 정상까지는 0.2km이며 약간 경사진 오름길이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굴참나무 숲을 지나 8시 47분 천태산(天台山 7147m) 정상 표지석을 안는다.


사방이 고요하다. 간간이 찬바람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간다. 천태산은 충남 금산군과 충북 옥천군 사이에 솟아 있는 명산으로, 서쪽으로는 금산의 서대산이, 남동쪽으로는 마니산과 성주산이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멀리 덕유산과 진안 마이산이 자리잡고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시계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표지석 뒤에는 조그만 돌무더기가 있고,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가 있다. 뒹구는 돌 속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뿐, 눈 여겨 살펴보지 않으면 그 흔적마저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특이하게 정상방명록이 설치되어 있다. 한쪽 면에는 나옹선사의 "바람같이 물같이"라는 시가, 또 다른 한쪽 면에는 노산 이은상 시인의 "산악인의 선서"가 적혀있다.


"황태자"라는 이름 석자를 남기기 위해 방명록을 펼치자 눈에 들어오는 글이 있다.


TO.
부모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홀로 산을 찾았습니다.
그냥 미친 듯이 헐떡이며 산을 올랐고
이 자리에서 맘껏 소리도 질렀습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힘든 일을 겪고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 때문에 가슴이 너무 아프고
닥쳐올 날들이 너무도 두렵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산을 내려가면서부터는 다시 현실에
부대끼며 힘겨운 싸움을 계속 할 것입니다.
현실에 절대 굴하지 않고 언제나 가족과 함께
어려움을 이겨낼 것을 이산과 제 자신에게
약속합니다. 주님 부디 저희를 버리지
말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부모님 힘내세요...사랑합니다.
          2003. 12. 20 학산에서 온 아브라함

 


힘내세요.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9시 5분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하산길로 접어든다. 왼쪽은 대성산 종주코스(5시간 소요)길이고, 하산은 D코스를 택한다. 5분 정도 내려와 갈림길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주능선을 따라 3-4분을 내려오면 점심 먹기 좋은 넓은 공터의 안부가 나온다. 터벅터벅 내려서 9시 20분 헬기장에 도착하고 헬기장에서 5분도 채 못 가서 B코스 갈림길이 있으나 현재는 폐쇄 상태다.


9시 35분 '전망석'이라고 표시된 바위에 서서 잠시 천태산 풍광의 진수를 맛본다.


천태산 남쪽 능선의 최고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평범한 산길이 이어진다. 조망석에서 10여분 내려와 앙증맞은 침목으로 만든 계단을 내려서면 영국사 1km  주차장 2km 라고 쓰인 표지판이 보인다.


9시 50분 곧바로 남고개에 이르게 되고 오른쪽으로 옥새봉 육조골로 이어지는 등산로 표시가 보인다.


요술램프처럼 생긴 바위 틈 사이를 지나고 소나무 숲 사이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10시 15분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피난 왔던 고려 공민왕의 옥새를 숨겨 놓았던 옥새봉에 도착한다. 특징 없는 암봉에 올라 주위를 조망한다. 반대쪽 천태산 정상에서 한 무리의 등산객이 "야호"를 토해낸다.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 등 6조가 자리 잡았던 육조골의 계곡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길은 눈이 덮여 있고 경사도 가파르다.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없어 길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간간이 보이는 표시기를 따라 한 발 한 발 조심조심 내려선다. 반대쪽 산 중턱에 묘 1기가  눈에 띤다. 무엇을 위한 정성인가?


능선은 주차장으로 뚝 떨어진다. 11시 망탑을 들리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산행을 마무리하고 귀가길을 서두른다. 돌아오는 길에 개심저수지에 비춘 햇살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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