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23일(일)
7시 30분 시민회관을 출발한 소월산악회 버스는 7시 50분 남대전요금소로 진입하여 대진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미쳐 아침식사를 하지 못한 등산객들을 위하여 20여분간 정차하고 9시 5분 서상요금소를 빠져나간다. 26번 국도를 타고 안의를 거쳐 9시 30분 용추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백두대간의 산줄기 소백산맥이 덕유산과 남덕유산을 치솟게 하고 다시 남덕유산에서 뻗어 내린 산세가 월봉산(月峰山)을 거쳐 기백산·금원산·거망산·황석산을 옹골차게 빚어 놓았다. 이들 산에서 흘러내린 골짜기 물이 용추계곡을 지나 지우천을 이루고 흐른다.
산행은 장수사터에서 시작하여 능선을 타고 거망산 정상에 오른 뒤 다시 황석산 정상을 거쳐 우전 마을을 지나 봉전 마을 거연정으로 하산하는 코스다.
버스에서 내리자 장수사 조계문이 눈에 들어온다. 장수사는 신라시대의 원효와 의상을 비롯해, 조선시대의 무학, 서산, 사명 등 여러 고승이 수도한 이름 있는 절이었고 용추사는 원래 장수사에 딸린 암자였으나 6.25전쟁으로 불타고 "덕유산 장수사 조계문"이라고 쓰여 있는 일주문 현판만이 장수사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천년 된 기둥은 여느 일주문과 달리 깍지 않고 나무의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 투박하고 그 규모가 장대하다.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의 지붕 때문에 기둥이 오히려 작아 보인다.
평지 흙길을 조금 걸으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기백산(4.2km)으로 오르는 길이다. 이정표를 따라 용추사 방향으로 직진하여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는 길을 따라 걷는다. 길 왼쪽 용추계곡에는 흰 속살 드러낸 바위사이로 계곡물이 힘차게 흘러내린다. 아치형 쇠다리를 건너면 용추사 가는 길이고 직진하여 조금 걸으면 산행 안내도가 보인다.
이곳에서 거망산 3.25km 표지판을 따라 바위를 딛고 계곡물을 건너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바위가 미끄러워 앞서가던 일행중 한 사람이 물에 발이 빠지는 모습이 눈에 띤다. 조금 후에 또 한 사람이 빠진다. 계곡길을 10여 분 걸어 오르면, 황석산 거망산에서 가장 큰 폭포라는 높이 15m의 용추폭포가 나온다. 가뭄에도 수량이 풍부하고 물살이 힘차 마치 용이 우는 듯하다고 전해지는 용추폭포를 지나면서 산길은 조금씩 험해진다. 얼음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울퉁불퉁 돌밭길을 어느 정도 오르자 걷기 좋은 평탄한 흙길이 시작된다. 4명의 젊은 대간꾼들이 큰 소리로 노래부르며 하산한다. 도전하는 젊음이 한없이 부럽다. 계곡 물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10시 30분 거망산정상 1. 35km 표지판이 보이고 산은 급경사로 변한다. 5분 정도를 숨가쁘게 오르자 다시 평탄한 돌길이 이어진다. 이마에 땀이 흐른다.
언젠가 교통사고 화재로 화상을 입고 얼굴에 피부 이식 수술을 한 이지연양이 땀샘이 막혀 땀이 흐르지 않았는데 수 차례의 피부 이식 수술 끝에 목 부분에서 땀이 흐르자 기뻐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간절한 소망이 될 것이다. 출근길에 똥 밟은 사람이 똥 밟을 수 있는 건강한 다리가 자기에게 있음을 감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바꾸면 감사하지 못한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산을 오를 수 있는 건강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10시 40분 다시 급경사로 바뀐 오름길은 얼었던 땅이 녹아 질퍽해져 미끄럽고 산오름을 더욱 힘들게 한다. 산죽과 잡목이 우거진 길을 20여분을 힘들게 오르자 억새밭 사이로 갈림길 안부가 나타난다. 말 잔등처럼 남북으로 부드럽게 뻗은 거망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술래로 놓고 숨바꼭질하듯 아기자기하게 펼쳐진 능선으로 억새가 햇빛에 반짝거린다. 모든 세상이 갈색으로 여위어 가는 늦가을. 억새는 스산한 만추를 가장 화려하게 빛내주는 들꽃이다. 산이나 구릉에 지천으로 피어 세상을 환한 은빛으로 비춘다. 한 발씩 천천히 겨울로 들어서듯 오른 걸음 끝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볼 수 있다. 꽃인 듯 바람인 듯 빛깔 고운 그 바람꽃 억새를…. 물 한 모금 마시고 매끈한 능선을 반짝이는 억새밭을 스치며 7∼8분 오르면 거망산 정상에 도달한다.
덕유산과 지리산의 연봉들이 거대한 연꽃잎처럼 뚜렷이 보이는 주 봉우리에 서면 황석산(黃石山) 정상 밑까지 이어진 능선이 한 눈에 펼쳐진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황석산, 백운산, 덕유산, 월봉산, 금원산, 기백산 등이 거망산을 중심으로 한바퀴 빙 돌아 있다. 6·25 때 빨치산 여장군 정순덕의 활동 무대가 바로 거망산이다. 정순덕에게 잡힌 국군 1개 소대가 무기를 빼앗기고 목숨만 건져 하산한 사건이 최근에야 밝혀졌다고 한다.
정상에서 다시 되돌아 내려와 주능선을 따라 5분쯤 진행하면 정상과 높이가 엇비슷한 조망 좋은 봉우리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황석산의 모양새가 더욱 일품으로 보인다. 언 땅이어서 오르기에는 수월하다.
좌우로 심하게 꿈틀거리면서 이어지는 완만한 능선이 갈라지는데 주 능선길은 좌측으로 한 굽이 휘돌아 내려선다. 그리고 마지막 오름길에 힘을 내면 1100봉이 되는데 이곳이 거망산의 마지막 봉이 된다. 이후의 내리막 안부로부터는 황석산이라 부른다. 1100봉에서 약 7∼8분 내려서면 지장골 사이의 능선길로 하산길이 형성되어 있고, 가던 길을 계속 걷다보면 황석산정상 2.9km 표지판이 서 있는 곳에서 장자벌로 내려가는 불당골 갈림길이 나타난다. 바람 한 점 없고 따사로운 햇살이 너무 좋아 산행에 속도를 줄이고 새소리 들으면서 능선길을 걷는다.
12시 20분 뫼재 삼거리에 도착한다. 왼쪽으로 탁현으로 내려가는 산내골 갈림길이다. 멀리서 보는 황석산 정상은 기품이 있다. 정상 아래로는 발달한 슬랩(치마바위)을 치렁치렁 늘이고 칼날 같은 암벽 능선을 거느리고 있다.
정상부의 능선으로 오르기 전까지 비교적 평탄한 산길이다. 10여분 정도 더 걸으니 황석산의 첫 번째 암봉이 시야 가득히 들어오고 억새밭 사이 넓은 공터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산행 선두가 자리를 비운다.
찌개를 끓이던 일행이 함께 식사하자고 권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자리를 잡고 점심식사를 한다. 함께 식사한 일행이 건네는 사과 한 조각으로 후식을 하고 황석산으로 향한다.
황석산은 정상에 두개의 커다란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봉은 북봉보다 더 뾰족하다. 암봉 오른쪽으로 나 있는 우회도로를 이용해서 오른다. 이 길도 험한 편이다. 두 개의 암봉 사이로 최근에 보수했는지 잘 정비된 성벽 위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등산객들이 보인다.
15분 정도 암릉을 오르는 재미를 느끼며 북봉에 오르자, 마치 거북이를 연상시키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가 반갑게 맞이한다. 바위 아래에 전망대가 부셔져 나뒹구는 모습이 보기 흉하다.
정상으로 가는 암릉길은 바위도 가파르고 제대로 된 안전장치가 없어 다소 위험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지리산까지 막히는 것 없이 조망이 매우 좋다.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서 50m 암봉을 두 번의 밧줄을 잡고 기어올라 황석산 정상(해발 1190m)에 오른다. 황석산은 거창 남녘에 솟은 범상치 않은 바위산이다. 백두대간 줄기에서 뻗어 내린 네 개의 산 기백·금원·거망·황석 가운데 가장 끝자락에 흡사 비수처럼 솟구친 이 봉우리는 덕유산에서도 선명하게 보인다고 한다.
13시 30분 하산을 시작한다. 암봉을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 보다 위험하다. 밧줄을 타고 조심조심 내려 이정표에서 왼쪽으로 조금 내려서면 급경사 험한 내림길이다. 7∼8분 뛰듯이 내려오면 갈림길이다. 왼쪽은 유동으로 오른쪽은 우전(5.6km)마을로 가는 길이다. 산행은 서하면 봉전리 우전 마을을 날머리로 한다. 가파르던 내림길은 평탄한 길로 바뀌고 샘터(30m)표지판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내려가 보았으나 물이 마른 채 방치되어 있다. 14시. 황석산성문에 다다른다. 황석산 중턱에 있는 황석산성은 정상에서 뻗어 내린 암릉에 걸쳐 있다.
고려시대의 석축산성이며 육십령으로 통하는 관방 요새에 축조된 삼국시대부터의 고성이다. 황석산성은 함양 땅 "안의" 사람들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이들이 성이 무너지자 죽음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천길 절벽에서 몸을 날려 지금껏 황석산 북쪽 바위 벼랑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어 피바위라 부른다.
황석산의 봉우리와 계곡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조선 초에 수축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과 큰 싸움이 있었던 곳이다. 황암사는 절이 아니고 정유재란때 왜군과 싸우다 순국한 안의 현감 곽준 일가를 추모하기 위해 2001년에 세워진 사당이다.
5분 정도 내려가면 갈림길이다. 직진하면 신하산길(4.3km)이고 왼쪽은 구하산길(3.5km)이다.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낙엽이 수북히 쌓인 급경사 흙길을 밧줄을 타고 내려온다. 수령이 20-30년 정도 되는 비교적 작은 소나무 숲으로 솔잎 떨어진 산길을 걸으며 스며든 늦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맞는다. 묘지가 보인다. 얼마를 내려서자 우전 마을이다.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가 여기 저기 보인다.
마침 감 따던 아낙이 먹어 보라며 감을 건넨다. 이것이 우리네 인심이 아니었던가. 일손이 없어서 감을 못 따고 있단다. 곶감을 만들어도 품삯도 안나온단다.
우전 마을 가운데 길을 거쳐 봉전 마을로 내려가면 난계천에 아름다운 명소, 거연정이 있다. 원래 산행 코스는 봉전마을 거연정까지 였는데 산악회 버스가 우전 마을까지 들어와 있어서 3시가 조금 넘어서 산행은 끝이 난다. 일찍 하산하여 산행을 마친 사람들의 뒤풀이가 이어지고 버스 한 대가 먼저 대전을 향해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