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 2013년 1월 13일(일)
산행코스 : 운봉읍 서림공원-북천마을-신기마을-황산대첩비지-비전마을-대덕리조트-흥부골자연휴양림-인월면 월평마을(약 9.3km 4시간소요)
여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함양에서 88올림픽도로 광주방면으로 갈아탄다. 지리산 나들목이 보이고 표지판을 따라 나오면 지리산 길목인 인월이다.
운봉-인월 구간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약 10km의 지리산 길이다. 대부분의 길이 둑방길이라 조금은 단조롭고 지루할지 모르지만 걷는 내내 오른쪽으로는 바래봉에서 고리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이 따라오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함께하니 부담없이 편하게 걸어 갈 수 있는 길이다. 더불어 황산대첩비, 송흥록, 박초월 생가, 국악의 성지들이 자리잡아 역사와 문화를 확인하며 걸어가는 길이다.
구간의 시작점인 운봉읍은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영토였고 삼국시대에는 모산현으로 신라의 국경 요새지였다. 신라 경덕왕에 이르러 운봉현으로 개칭하여 함양의 옛 이름인 천령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때에 남원부에 편입되어 6개 방을 관활하게 된다.
남원 서천리 당산은 운봉읍 서천리 서하마을에 있는 한쌍의 돌장승으로 1970년 중요민속자료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돌장승을 '벅수'라고 부르며 없어진 솟대와 함께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 왔다. 제작연대는 불명이나 조선시대로 추측한다. 두 장승은 마을의 서쪽 길가에 마주보고 서 있는데 각각 진서대장군과 방어대장군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다. '진서'와 '방어'라는 어의로 보아 마을의 허전한 방향인 서쪽을 지켜준다는 풍수신앙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북쪽에 서있는 방어대장군은 남신상이며 남쪽에 서있는 진서대장군은 여신상이다. 주 장승 모두 화강석으로 만들어 졌으며 벙거지를 쓰고 있고 얼굴 형태는 눈이 불거지고 코가 뭉뚱그려져 있으며 이를 드러내 보이는 전형적인 귀면형이다.
이 장승들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기는 하지만 벙거지의 모양과 얼굴 표현 방법이 서로 달라 동일인이 만든것은 아닌것 같다. 두 장승 모두 머리와 몸통부분이 떨어진 것을 이어 붙였는데 전설에는 부부인 두 장승이 가정불화로 싸워 남편 장승은 귀를 물어 뜯겼고, 아내 장승은 목이 부러졌다고 한다.
둘레길은 정면으로 만나는 서림교를 건너지 않고 오른쪽으로 꺽어 람천을 따라 간다. 오늘 길동무를 해주는 람천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인월면, 산내면에서 흐르다가 경상남도 함양군의 임천으로 이어지는 길이 24.2km의 지방 2급하천이다. 발원지는 지리산 고리봉이며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공안리에서 하천이 시작된다.
지리산 둘레길은 신기교를 건너면 왼쪽 둑방길로 이어진다. 람천은 대체로 북동쪽으로 흐르면서 운봉읍 서천리, 북천리, 신기리, 화수리를 통과하는데 이곳 서천리에서 운봉천이 유입된다. 인월면으로 접어들어 서무리를 지나 인월리를 통과할 때는 풍천이 흘러 들어오며 이때부터 급하게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지리산국립공원 서북쪽 능선인 덕두산의 협곡을 통과하면서 구불거리며 흐른다. 신기마을은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들어가 왜군이 잠시 철수 하였을때 전란으로 고향을 떠났던 영남 사람들이 비교적 피해가 적은 호남지방을 유랑하며 자리잡은 마을이다. 멀리 지리산의 영봉들이 바라보이고 운봉고원의 넓은 들판이 풍요롭게 보이는 명당터인지라 새삶을 시작하는 터전이란 뜻으로 신기라 하였다. 소의 형국인 마을 북쪽 쇠잔등이가 잘려 마을의 쇠한 기운을 막고자 주민들이 직접 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둑방길에는 둘레길이 열리면서 벚꽃나무를 심어 몇 년 후에는 벚나무 터널이 만들어 질 것이다.
"백두대간 종주니 지리산 종주의 헉헉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이는 길 잠시 버리고 어머니 시집올 때 울며 넘던 시오리 고갯길, 장보러 간 아버지 술에 취해 휘청거리던 숲길… 그 잊혀진 길들을 걷고 걸어 그대에게 갑니다."(이원규의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사람들이 다녔던 길과, 다니고 있는 길을 잇고 보듬은 길이다. 때로는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야 하고, 한참 지나도 민가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지루한 길도 있다. 걷다보면 '이게 무슨 길이야'라며 투덜대기도 하고, 땡볕 속을 걷다가 다시 돌아가버릴지도 모른다.
인간은 길을 걷는 존재다. 불도저로 땅을 밀고 아스팔트를 깔고 숲을 없애고 산에 구멍을 내며 오늘도 길을 낸다. 하지만 편리함을 찾은 인간은 걸음을 잃었다.
더 빠르고 더 짧게 움직이려는 욕망의 길 위를 육중한 자동차가 굉음을 내며 달리고 달릴 뿐이다. 우리는 빨리 달릴 필요도 없고 산을 정복할 이유도 없이 그저 터벅터벅 걷다 보면 삶을 되새김질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둘레길은 그렇게 침묵으로 웅변한다.
굽이굽이 휘어진 둘레길을 걷다 보면 왜 삶은 직선이 아닌 곡선인지, 왜 옛 선인들이 걷고 걸어 만든 길을 다시 걸어야 하는 존재인지를 스스로 되묻게 된다. 잃어버린 걸음의 의미를 되찾게 하는 둘레길.
정상으로 향하는 수직 형태의 길이 '등산로'라면 마루금을 지나지 않고 산자락을 잇는 수평한 길이 '트레킹길'이다. 등산의 매력이 '도전과 정복'이라면, 트레킹은 '사색'이다. 숲길을 걸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감을 느낀다.
길 곳곳에 한국전쟁과 왜구의 침입 흔적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산업화의 뒤안길에서 묵묵히 농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간직한 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무한 경쟁과 질주하는 물질문명에 눈멀고 귀먹어, 향락과 소비가 마치 최고의 미덕처럼 되어버렸다. 이런 일상적인 삶을 되돌아보자며, '온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평화가 되자'는 생명평화운동의 시작점에서 제안된 순례길이 지리산 둘레길이다.
전촌(前村)마을은 황산대첩비가 세워져 있는 마을이므로 앞마을 또는 앞몰이라고 칭하였는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전촌리라 표기하였다. 조선조 숙종 초에 운봉읍에 살던 밀양박씨가 황산대첩비 입구의 소나무 숲이 너무 아름다워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된 것이 마을의 시초이며 그 후로 김, 강, 이씨 등이 차례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 하였다.
대첩교를 넘는 지점에 '내 소리 받아 가시오'라는 팻말이 이채롭다.
남원 황상대첩비지는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 터다. 사적 104호로 고려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한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서 있던 곳이다.
황산은 운봉면 소재지로부터 동쪽으로 약 8km 떨어진 해발 695m의 바위산이다. 바로 이 황산의 협곡에서 1380년 고려 우왕 6년에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배극렴, 이두란 등 휘하의 여덟 원수를 거느리고 함양으로부터 공격해 오는 왜구들과 전투를 벌려 적장 아지발도를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던 곳이다.
☆황산대첩비지의 정문인 삼문
황산대첩은 고려말 왜구와의 전투 중에서는 가장 큰 승전이어서 그 내용이 <용비어천가>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대첩비는 승전 당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약 200년 후인 1577년 선조 10년에 호조판서 김귀영이 글을 짓고 여성군 송인의 글씨로 새겨졌다.
파비각은 황산대첩비지 안에 있는 비각으로 1977년 건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고려 말 이성계가 남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를 황산에서 격퇴한 전공을 기록한 황산대첩비를 파괴 하였는데 파비각에는 그때 파괴된 대첩비의 일부 파편들이 보관되어 있다.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는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라는 공문을 각 도의 일본 경찰부장들에게 발송해 조선의 일본 관련 비석들을 찾아내 없애라고 지시했다. 그때, 황산대첩비를 포함하여 전국의 일본 관련 전승비와 대첩비 20여기를 깨부수고 비문을 정으로 쪼아 글씨를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비전(碑殿)마을은 마을 앞에 황산대첩비각이 있다하여 비전(碑殿)으로 불리게 되었다. 1380년 고려 우왕 6년에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1577년 선조 10년에 운봉현감 박광옥이 대첩비를 세웠고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이 비를 파괴하였으며 지금의 비가과 비석은 1957년 10월 27일에 다시 세운 것이다.
비전마을의 형성은 대첩비각을 세운 후, 참봉과 몇 사람의 관원들로 관리하게 하였는데 그 식솔들이 모여 살게 되고 후로 다른 사람들까지 모여 살게 되어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서편에는 하마정이 있어 모든 사람이 말을 내려 비 앞에서 절을 하였다고 하며, 구한말까지는 이곳에 2층 정자가 있어 주변 주막의 기녀와 소리꾼, 가마꾼이 상주하던 곳이었다.
송흥록은 생몰년은 미상이나 조선 말기의 명창으로 우리나라 8명창 가운데 한 사람이다. 판소리의 중시조라고도 하고 가왕이라고도 불린다. 바로 이곳, 운봉읍 비전리에서 태어났으며 판소리의 진양조를 창시한 김성옥은 그의 매부이고 광록은 동생이다. 그는 역대의 판소리 명창 가운데 기량이 가장 뛰어날 뿐 아니라 판소리에 그때까지 없었던 진양 장단을 도입하여 소리를 짜고 평타령으로 일관하였던 원초적인 판소리 선율 우조와 계면조의 선율을 오늘날과 같이 발전 시켰다.
송흥록은 진양조의 완성을 통해 양반들의 음악적 요소를 판소리 속에 도입하고 산유화조의 개발을 통해 다른 지역의 음악적 요소까지 판소리 속에 도입함으로써 판소리가 계급적,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민족의 음악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송흥록을 가왕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러한 데에 있을 것이다. 송흥록의 소리는 남원, 구례, 순창, 고창 등으로 퍼져가며 동편제 소리라는 큰 가닥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송흥록은 동편제 소리의 시조로도 추앙 받는다.
박초월(1913~1983)은 판소리 여류 명창으로 본명은 삼순, 아호는 미산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갈계리에서 성장하였다. 김정문(金正文), 송만갑(宋萬甲), 임방울(林芳蔚), 정광수(丁珖秀) 에게서도 배웠는데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은 목소리에 성량도 풍부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다. 1930년 전주에서의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 뒤 여러 음반회사와 계약을 맺고 <흥보가>, <심청가>, <춘향가> 등을 취입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참가하여 여러 선배명창들과 창극운동에 참여하다가 광복 후 여성국극동지사(女性國劇同志社)를 창단하였고, 1955년에는 현재의 서울국악예술학교의 모체인 한국민속예술학원을 박귀희(朴貴姬)와 함께 설립하고 교사로서 많은 신인을 양성하였다.
1966년부터는 집에 당대의 명창 156위의 신주를 모셔놓고 매년 제사를 지내는 정성을 보였으며, 1964년 10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춘향가>의 보유자로 지정을 받았고, 1973년 11월에는 <수궁가>의 보유자로도 지정을 받았다.
소리정원에서는 남원 출신 국창 박초월, 안숙선 명창들의 녹음판소리가 방문객들을 맞는다.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인 歌王 송홍록 생가
군화(軍花)동 마을은 1961년 대홍수 때 화수리 마을의 이재민들의 가옥 13채를 군인들이 이곳에 새로 지어 주면서 군인들이 만들어준 화수마을이란 뜻으로 군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리산 둘레길'은 길을 걸으려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다르고, 마음의 크기에 따라 느끼는 것도 다르다. '걷기'는 결국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내면과 마주 대하는 시간이다.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본 사람들은 그 길에서 살아온 시간을 반추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걷기는 인류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이다. 걷는 행위를 통해 인간다운 삶을 찾아야만 한다.
☆옥계호의 제방을 가로지르는 둘레길
옥계호는 옥계청류란 이름으로 운봉의 비경으로 이름 높던 옥계계곡을 막아서 만든 댐이다. 더 멀리는 신라시대 거문고의 대가였던 옥보고가 자리를 잡고 50년동안 초야에 묻혀 30곡의 거문고곡을 만들어낸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남원군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옥계호는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축조한 저수지로 1991년에 착공하여 1997년에 준공되었다. 2003년에는 저수지 바닥의 모래와 자갈을 파내는 준설작업을 하였다. 총저수량 103만톤, 유역면적 410만 m2, 수혜면적은 117만 m2에 이른다. 댐의 길이는 261m, 높이는 41.8m로 국도 24번에 접해 있다.
'지리산 둘레길' 구간 개념은 하루 정도 피곤하지 않을 만큼의 여정을 감안해 구분했다. 특히 대중교통이 들고나는 곳을 중심으로 나누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걷기 여행의 출발선이라는 믿음에서다. 각 구간은 마을과 마을 이름으로 연결된다. 주천~운봉, 운봉~인월, 인월~금계…. 따라서 자신의 여정에 따라 반대로 발걸음을 내디딜 수도 있다.
지리산 '이야기 표지판'과 '이정표'는 모두 나무로 만들었다. 이야기 표지판은 현재 주천~수철 70㎞ 구간에 서 있고, 장승처럼 생긴 이정표는 전 구간에 버티고 있다. 장승의 날개는 방향을 나타낸다. 검정과 빨간색으로 방향을 구분해놓았다. 검정 방향을 따라 한 바퀴 돌면 자신의 출발지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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