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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숲길

1구간(주천-운봉)

산행일 : 2012년 12월 9일(일)

코스 :  주천면-내송마을-솔정자-구룡치-회덕마을-노치마을-덕산저수지-질미재-가장마을-서어나무숲-행정마을-옛양묘장-운봉읍-서림공원(14.5km)

 

길, 걷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법정스님은 <홀로 사는 즐거움>에서 '땅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제 발로 걷지 않고 자동차에 의지하면서 건강을 잃어간다. 제 발로 걷는다는 것은 곧 땅을 의지해 그 기운을 받아들임이다. 그리고 걸어야 대지에 뿌리를 둔 건전한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요즘 세상 살기가 많이 편해졌다. 문명의 이기(利器) 때문이다. 그런데 '편해졌다'는 것이 '좋아졌다'는 의미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자동차가 있으면 이동이 빠르고 편리하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한다. 그 만큼의 시간을 벌 수 있다. 하지만 놓친 것이 있다. 우리는 자동차 유지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이 시간동안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교통사고나 환경오염의 위험 등에서도 예전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편리해진 것'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지리산숲길에는 이야기가 있다. 임금부터 민초들에 이르는 다양한 삶이 이 길에 투영돼있다. 그래서 혹자는 '올레길이 풍경이라면 지리산숲길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역사와 지역성, 생활상을 고려하고 옛길에 얽힌 이야기와 의미까지 좇다 보니 길을 내는 속도가 더디다. 

 

지난 2008년 4월 시범구간이 개통된 지리산숲길은 복권기금(산림청 녹색자금)의 지원을 받아 2011년 까지 전북 남원, 전남 구례, 경남 하동, 산청, 함양 등 5개 시군 80여개 마을을 통과하며 전구간 총 길이 약 300km가 조성되었다. 참고로 지리산숲길을 관리하는 사단법인 숲길은 '지리산둘레길' '지리산길' 등으로 혼용되던 명칭을 '지리산숲길'로 통일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번 남원 주천~운봉 구간은 지리산길 1구간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과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14.3km다. 지리산 서북 능선을 조망하면서, 해발 500m의 운봉고원의 너른 들과 6개의 마을을 잇는 옛길과 제방길을 걷는다.

 

 

 

풍광이 수려한 구간이 많고 길과 마을에 얽힌 이야기가 풍성한 것이 특징이다. 회덕과 내송을 잇는 길은 옛 화전민들이 장보러 다니던 숲길이 운치 있고, 덕산저수지를 끼고 도는 노치~행정 구간에서는 지리산 정령치, 만복대, 고리봉을 조망할 수 있다. 돌로 담을 쌓아놓은 '사무락다무락', 서어나무숲 등이 볼거리다.

 

 

 

 

 

내송마을(안솔치)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 한양 조(趙)씨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그 후로 경주 김(金)씨, 서산 류(柳)씨 등 여러 성씨들이 차례로 들어와 30여 호 마을을 이루면서 주위의 비옥한 농토와 산림을 토대로 부유한 마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 출신 조경남(趙慶南)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개미정지

임진왜란 당시 구례 쪽으로 침입한 왜군들이 운봉황산으로 들이닥치고 있을 때 남원지역에서 활약하던 조건암장군이 멋진 소나무에 옷을 걸어 놓고 낮잠을 자던 중에 개미가 발꿈치를 물어 일어나보니 왜군들이 아래쪽 서어나무숲까지 밀려 와 있었다 한다. 개미들 덕분에 왜군의 진입 사실을 알게 되어 이곳을 "개미정지"라 부른다고 한다.

 

 

 

 

 

 

 

 

용 아홉마리가 여의주 한 개를 희롱하였다하여 구룡치라 하고 구등치로 부르기도 한다. 또 장꾼들과 마을 사람들이 힘들어 굴러다녔다 해서 구둥굴재로도 부른다.


구룡치는 주천면의 여러 마을과 멀리 달궁마을에서 남원 장을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 달궁마을 주민들은 거리가 멀어 남원 장에 가려면 2박 3일에 걸쳐 다녀와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구룡치를 장길로 이용하는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백중 (음력 7월 15일) 이 지나고 마을별로 구간을 나누어서 길을 보수해서 이용해 왔는데 지금도 예전의 보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주천-운봉구간은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이 지금도 잘 남아있는 구간이다. 특히 구룡치와 솔정자를 잇는 회덕~내송까지의 옛길(4.2km)은 길 폭도 넉넉하고 노면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경사도가 완만하여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솔숲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다.

 

 

 

 

길을 걷다보면 큰 소나무와 돌탑을 만난다. 구룡치를 넘어 남원장 가는 길에 무사히 장을 보고 올 수 있도록  무사함을 빌고 액운을 막아 화를 없애고자 지날 때 마다 돌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사무락다무락은 사망(事望)다무락(담벼락의 남원사투리)이 운율에 맞춰 변천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무락은 事望의 운봉지역 사투리라 하며 다무락은 담벼락 혹은 돌무더기를 가리키는 역시 사투리이다. 즉 일이 잘 풀리기를 기원하는 돌무더기라는 뜻이다.

운봉의 욕심 많은 부자가 죽은 후에 남에게 돈이 넘어가는 것을 보기 싫어 돈궤를 묻었다 하나 아직까지도 그 돈궤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한다.

 

 

 

 

 

 

회덕마을 - 임진왜란 때 밀양 박(朴)씨가 피난하여 살게된 것이 마을을 이룬 시초라고 한다. 회덕마을의 옛 이름은 남원장을 보러 운봉에서 오는 길과 달궁쪽에서 오는 길이 모인다고 해서 "모데기"라 불렀는데 이는 '사람들이 모였던 마을'이란 의미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을 한 곳에 모아 이 마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노치마을 - 조선초에 경주 정(鄭)씨가 머물러 살고 이어 경주 이(李)씨가 들어와 살게 되어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노치마을은 해발 500m의 고랭지로서 서쪽에는 구룡폭포와 구룡치가 있으며 뒤에는 덕음산이 있고 지리산의 관문이라고 말하는 고리봉과 만복대를 바라보고 있으며 구룡치를 끼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마을 이름을 "갈재"라고 부르는데 이는 고리봉과 만복대에 갈대가 많은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재는 백두대간이 관통하는 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노치마을은 고리봉에서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위에 있어, 비가 내려 빗물이 왼쪽으로 흐르면 섬진강이 되고 오른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는 마을이다.

 

 

 

 

주천면부터 이곳까지는 20년 전까지 운봉, 산내 사람들이 남원장을 보러 다니던 옛길이다.

 

 

 

 

 

가장마을 -풍수지리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화장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가장리(佳粧里)라 불렀다 한다. 지금은 들녘에 농사짓는 움막터를 뜻하는 농막장(庄) 자를 써 가장리(佳庄里)로 쓰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옥녀봉 아래에 옥녀가 베를 짜는 옥녀직금의 천하명당이 있다고 믿고 있다. 300여 년 전 이곳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동복 오(吳)씨와 강릉 유(劉)씨라고 하며 그 후 창녕 조씨와 김씨, 박씨 등이 입주하게 되었다. 마을이 뱀 형국으로 마을 앞에 입석을 세워 뱀의 기를 눌러 마을의 액 막음을 하고 있다.

 

 

행정마을은 원래 마을 가운데 은행나무와 우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행정마을에 있는 서어나무 숲은 '제1회 아름다운 숲' 대상을 받은 곳으로, 수백 년 된 서어나무들이 아름드리 줄지어 서서 마을을 지켜주는 곳이다.

 

 

 

 

 

 

전북에서 돌장승이 제일 많은 곳이 운봉지역인데 남원시 안에 있는 돌장승 16기중 15기가 운봉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예로부터 운봉은 온갖 세력들의 전략적 요충지였고 그 만큼 부침이 심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돌장승을 세우고 마을의 평온을 비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운봉들판은 황산쪽으로 람천이 흘러나가 뻥 뚫려 있는 모양인데 그 허한 기운을 보충하려고 한가운데에 서림과 동림을 조성하고 장승을 세웠다. 현재 서림공원에는 부부장승이 마주 서있는데 부인의 목이 부러져 보수한 흔적이 있다.

 

 

 

 

생각보다 포근한 날씨와 하얗게 수 놓은 멋진 설국으로 더욱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던 지리산 숲길이었다. 살아가는 날의 기쁨과 잃어버린 감동을 찾아 떠난 오랫만의 여행이 행복한 시간으로 마무리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