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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Geographic은 2005년 11월호에서 ‘장수의 비결’이라는 특집을 게재하면서, 세계 3대 장수 지역 중의 하나인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로마린다에 거주하는 ‘안식교인들’을 소개했다. 이 기사와 관련하여 CNN 방송에서 2005년 11월 16일 Anderson Cooper 시간에 안식일교인들의 특별한 신앙과 식생활 등을 취재하여 소개했다.본지에서는 지난 1904년 한국 선교를 시작한 이래 일제시대와 해방, 그리고 6·25 전쟁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과 동거동락하며 그리스도의 박 애정신 실천과 인류 구원이라는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변화·전진·재림'을 바탕으로 한국선교 제2세기를 힘차게 도약하고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탐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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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안식교’로 불려지고 있지만, 공식 명칭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nventh day Adventists)이고, 약칭은 ‘재림교회’이다. 재림교회는 세계적인 교회이며, 매우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는 복음주의 개신교로 최근 통계에 따르면 세계 적으로 하루 평균 약 3천 명씩, 연간 약 1백만 명 이상이 재림교회에 입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재림교회 신자수는 매 12년마다 두 배씩 증가하고 있는데, 특별히 중남미와 아프리카, 필리핀을 비롯한 남아시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신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놀라운 성장은 재림교회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두 국면에 큰 비중을 두고 이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결과이다. 재림교회는 사회적 이슈와 난관은 물론, 종교 자유와 인간의 권리, 인도주의적 원조와 개발, 웰빙(Well-Being)으로 대표되는 라이 프스타일, 전인(全人) 건강, 교육과 개인적 성장 등에 신앙적 가치를 두고 여러 사업들을 전개하여 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복음전파 와 더불어 교육, 출판, 건강, 구호, 복지, 종교자유 사업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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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명칭의 의미와 주요 교리 |
재림교회는 그들의 이름에서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핵심을 나타내고 있다. 재림교회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주일 중 제7일인 토요일이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할 안식일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안식일 계명을 비롯한 십계명이 폐지되거나 변경되었다고 믿지 않는다. 그리고 재림교회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을 최고의 사명으로 삼고 있다. 재림교회는 1860년 설립된 이후 일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재림의 시기를 정한 적이 없다. 그들은 예수 재림의 임박성을 확신하면서도 재림의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행 1:7)는 예수의 말씀을 확고히 믿고 있다. 재림교회는 마르틴 루터가 주창한 개신교 종교 개혁 사상의 핵심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개혁 신앙을 근본으로 하여 철저히 십자가 중심, 성경중심의 신앙을 영위하고자 노력한다. |
한국의 재림교회사 |
한국재림교회는 특이하게 외방인이 아닌 본방인에 의해 한국에 전래되었다. 1904년, 하와이로 이민을 가던 손흥조는 5월 하순, 일본 고베 항에 하선하여 하와이로 가는 배를 기다리던 중 일본인 재림교회 전도사 쿠니야 히데에게 전도를 받고 최초의 한국인 재림신자가 되었다. 그는 수속 불비로 귀국하면서 배 안에서 임기반(본명 형주, 독립운동가)에게 전도하였고, 이 두 사람의 활동으로 한국재림교회가 시작되었다. 1905년 미국 캔사스 출신의 W. R. 스미스(Smith) 목사가 초대 선교사로 부임하여 평안남도 순안에 선교 본부를 정하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선교지가 전국으로 확대되자 1910년에 교단 본부를 순안에서 서울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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