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태평양 전쟁에 돌입한 일제는 한국 기독교를 박멸하거나 일제의 어용단체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1943년 12월 28일 재림교회가 첫 희생제물이 되어 강제 해산됐다. 그 다음날인 29일에는 성결교회, 이듬해인 1955년 5월 10일에는 침례교회가 각각 강제 해산됐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재림교회는 그해 10월 신도총회를 열어 교회를 재건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구호위원회를 조직, 세계본부인 대총회의 지원을 받아 활발한 활동을 폈다. 1958년 명칭을 구호봉사회로 개칭하고 한미구호협정 결과 국내 10개 구호 단체로 지정돼 매년 약 8만명의 극빈자를 도왔다. 정부는 1963년 8·15 광복 기념식에서 공익포장을 수여했다. 아울러 수십개의 고아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돌봐, 그 중 성애원이 역시 공익포장을 수여받았다.
현 서울위생병원은 1908년 순안에서 개원 후 1931년 서울로 이전했다. 1·4 후퇴 때 제주도 성산포로 피난해 하루 평균 100~350명의 전염병 환자들을 무료 치료했고, 피난 수도 부산에 분원을 시작해 오늘의 부산위생병원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아울러 서울위생병원은 주한 미국인과 미 대사관 직원의 보건 치료병원으로 위촉돼, 세브란스 병원과 함께 미국 입국 사증(Visa) 신청자들의 X-레이 검사 병원으로 지정됐다. 정부는 6·25 전후의 서울위생병원 루(Rue) 박사의 노고를 치하해 1954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했고, 1957년 루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로 위촉됐다.
6·25 이후, 활발한 선교 활동에 나선 재림교회는 1960년대 중반까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타 교파 목회자들과 신도들이 집단 개종하는 경우가 많아 경계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재정 압박과 교역자 감원 등 변혁기를 거치면서 교세가 약화됐으나 1970년 이후 과감한 선교정책으로 성장 추세로 돌아섰고, 1983년에 이르러서는 자양 합회로 승격되면서 교세가 더욱 확장됐다.
1994년에는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한국 선교 90주년 기념식과 더불어 3천명 헌혈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아 위성전도회, 헌혈 및 장기기증 행사 등을 벌였고, 서울 올림픽공원 제1체육관에서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라”는 주제로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2005년부터는 한국선교 제2세기를 맞아 기독교의 정체성 회복과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기 위한 야심찬 계획들을 수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