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 : 2012년 2월 19일(일)
라오스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나라는 아니다. 1975년 공산화된 뒤 우리와 외교관계가 끊어졌다가 20년 만에 복원했다. 한반도 크기의 면적(23만6800㎢)에 인구는 660만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조용하고 자연환경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은둔의 수도 비엔티엔
메콩강을 끼고 서북 평야지대에 위치한 비엔티안은 라오스의 수도이다. 현지 발음으로는 비엔찬 또는 위엥짠 정도로 들리는데 프랑스어식 발음으로는 비앵티앵이다. 그 뜻이 `백단 숲의 도시`라니 낭만적이다.
라오스 최대의 도시로, 16세기의 중반, 세타티랏왕King Setthathirat(1548-1571)에 의해 수도에 정해졌고 현재도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항공이나 육로 출입국의 주요 통로가 되고 있다. 거리풍경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원형을 간직한 건물과 가로수, 그리고 수많은 불교사원이, 아시아와 서구 문화의 융합을 볼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북동쪽에서 남서쪽까지 최대길이가 1,050km이고 동서 최대 너비가 470km이다. 북쪽으로는 중국, 북동쪽과 동쪽으로는 베트남, 남쪽으로는 캄보디아, 서쪽으로는 타이, 북서쪽으로는 미얀마와 국경을 이룬다. 메콩강이 미얀마와 국경을 이루고 있으며 타이와의 국경 대부분도 메콩강을 경계로 한다.
1975년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차례로 공산화되자 빠텟라오는 무혈혁명을 일으켜 왕정을 폐지시키고 “라오스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라오스 인민 혁명당이 정권을 잡아 라오스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라오스는 베트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1980년대 베트남이 이끄는 인도차이나동맹(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부터 베트남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1989년 최초의 총선이 있었으며, 1991년 새 헌법이 공포되었다. 1975년 공산주의자들이 라오스를 지배한 뒤, 전체 국민의 1/10 이 이웃 타이로 탈출했기 때문에 정부는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라오스인들은 원래 중국 윈난성 지방에 거주했던 타이족의 일파이다. 7세기 무렵 타이족은 “난 짜오 왕국”을 건설 점차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남쪽으로 세력을 넓혀 가다가 1253년 몽고 “쿠빌라이칸”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타이족 사람들은 지금의 라오스, 미얀마, 중국의 해남도, 베트남, 인도의 아쌈 등지로 퍼져 나갔다. 라오스 지역에는 여러 개의 소국들이 세워 졌는데 14세기 초 무렵 “므앙쓰와”의 “파 응움” 왕은 이 소국들을 통합하여 라오스 최초의 통일 왕국인 “란쌍 왕국”을 건립하였다.
라오스는 동남아에서 관광지로서 개발이 가장 덜 된 나라다. 하지만 순박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자연환경 덕에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통화 단위는 킵(kip)이다. 태국의 바트와 미국의 달러가 통용된다. 달러와 킵을 함께 사용하면 좋다. 1달러는 약 8천킵 정도다. 환전은 방비엥보다 비엔티안에서 하는 것이 환율이 가장 좋다.
라오스는 대통령을 수장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로 인도차이나 국가 중 가장 낙후된 나라지만 가장 자연이 아름다운 나라이기도 하다.
유네스코가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라오스의 북부 도시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에는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이 공존한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는 것을 말해주듯 곳곳에 사원과 불상 등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2500여개 사찰에 스님만 2만5000명이고, 국민 95%가 불교신자인 ‘불국정토’다.
이제 라오스다. 라오스 출입국 사무소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와 대기하고 있던 허름한 미니버스에 오른다. 버스를 타고 약 20분 정도 달려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 도착한다. 한나라의 수도가 마치 우리나라의 시골 읍 같다. 라오스의 인구는 650만 명 정도지만 국토의 면적은 남한의 2배가 넘는다. 수도인 비엔티안이 가장 큰 도시이다.
유유히 흐르는 메콩강, 푸르름이 넘치는 산과 정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한 걸음 발을 디디면, 시간의 흐름을 잊고 어딘가 다른 행성에 온 듯 한 나라, 그곳이 라오스이다.
라오스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1인당 국민소득 : 800-1000불) 평균수명이 약 50세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보건상태는 형편없다. 아직도 인구의 16%가 문맹자다.
버스는 여행자들의 랜드마크인 남푸 분수대 앞에 멈추고 비엔티엔 여행자들을 내려놓고 방비엥으로 떠난다.
지도를 보고 숙소인 독참파레스토랑(한국식당) 2층 도미토리를 찾아간다. 길가에 툭툭 기사들이 툭툭을 타고 가라고 유혹하지만 꿋꿋하게 걸어간다. 10분 정도 거리다. 배낭을 놓고 점심식사를 위해 거리로 나선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근사한 라오국립문화원과 그 앞에 자리한 역사박물관을 지나 탓담을 향한다.
탓담(That Dam)이 눈에 들어온다. 위치가 도심인 데다 주변 다른 건물 풍경과는 달리 외양이 검은색인 까닭에 총리 집무실 앞 대로를 차지한 개선문과 더불어 비엔티안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꼽힌다. ‘탓’은 라오스 양식의 불탑을 뜻하고 ‘담’은 잠자는 7개의 머리를 가진 용을 뜻한다고 한다.
원래는 금을 씌웠지만 태국 시암 왕조가 1827년에 침입해 그것을 긁어가는 바람에 검은 탑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어느 때 어떤 과정으로 누가 건립했으며, 언제 보수나 수리를 했으며, 규모는 어떠한지는 고사하고 탑 이름이 '탓 담'임을 알려주는 문화재 안내판조차 없다.
부다파크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탈랏사오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탈랏사오라 불리는 아침시장은 이름과 달리 낮에도 열리는 상설시장으로 싸구려복제 DVD부터 실크, 의류, 신발, 과일 등 각종 물건을 파는 비엔티안의 명물이다.
터미널에서 시엥쿠안(Xieng Khuan-부다파크)로 향하는 14번 버스에 오른다. 약 1시간이 소요된다.
왓 씨엥쿠안(부다파크) Wat Xieng Khouane
비엔티안 시내에서 약24킬로 떨어진 우정의 다리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분르아 수리랏이라는 힌두, 불교에 정통한 불자가 1958년 만든 곳으로, 힌두와 불교의 전설을 표현한 콘크리트제의 여러 가지 불상 등이 있다. 호박모양의 건물의 옥상에 올라서면 부다파크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비엔티엔의 유적은 사람을 두 번 놀라게 된다. 한번은 그 정교함에 놀라고, 그 정교함이 시멘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란다. 시멘트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시내로 돌아와 천천히 걸어서 빠뚜사이(Patouxay)로 향한다. 대통령궁 정면의 란쌍로드(Lane Xang Ave) 중간에 있는 빠뚜싸이는 라오스어로 승리의 문이라는 뜻으로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어졌다. 원래는 전몰자의 위령비로서 1960년부터 건설을 시작했는데, 신공항 건설에 사용될 시멘트로 지어졌기 때문에, 이를 비유해서 「서있는 활주로」라는 재미있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기념문 천장에는 힌두 신화에 나오는 천사 압살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는 계단을 통해 정상의 전망대에 오를 수 있어, 꼭대기에 오르면 비엔티안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척에 있는 황금빛 사원 탓루앙 스투파도 눈에 들어온다.
루앙프라방이 시간이 정지된 목가적 풍경이라면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에선 세찬 변화의 기운이 느껴진다. 유럽풍 건물과 옛 사원들 사이로 수입차 대리점이 자리 잡았고 도로에는 한국산을 비롯한 외제차가 툭툭과 함께 달린다.
파탓루앙(Pha Tat Lang)
비엔티안 북서쪽에 위치한 황금색의 사라탑 파탓루앙은 ‘위대한 불탑’이라는 뜻이다. 걷기엔 조금 멀다. 툭툭(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삼륜택시)을 흥정하여 툭툭을 타고 간다.
넓은 광장 뒤로 빛나는 금빛 사원 파탓루앙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처의 사리가 모셔진, 라오스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위대한 불탑’이다. 사원의 입구에는 칼을 쥐고 앉은 장군의 동상이 있는데 그가 1566년 파탓루앙을 세운 셋타리랏 왕이다. 그가 세운 파탓루앙은 18세기 시암과 미얀마에 의해 약탈당했고 지금의 모습은 19세기 차오아누왕에 의해 재건된 것이다.
탓루앙(That Luang)은 라오스 불교의 최고의 사원으로 라오스의 국가 문장에 들어가 있으므로, 라오스의 상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파탓루앙은 일반적인 둥근 불탑이 아닌 사각 불탑과 비슷하다. 크메르와 인도, 라오스 양식이 골고루 섞여 있기 때문이다. 중앙 탑은 높이가 45미터이고 3층의 기단으로 이루어졌다. 중앙 탑 주위를 작은 탑들이 둘러싸고 있는 연꽃모양이다. 2층 기단에는 여러 부처의 모습을 상징하는 30개의 작은 스투파가 놓여있다.
▲라오스를 대표하는 상징물인 탓루앙(Thatlaung stupa) 사원 전경. 비엔티안에 위치해 있으며 국가 화폐에도 들어가 있을 정도로 특별한 사원이다.
툭툭을 타고 호파깨우로 이동한다.
호파깨우(How Pha Kaew)는 1565년에 세타티랏왕의 명령으로 건립되었고, 왕국의 수도를 루앙프라방으로부터 비엔티안으로 천도 할 때, 에메랄드불상(파케오)을 구왕도로부터 옮겨 안치한 사원이다.
원래는 왕이 기도를 올리는 장소로서 건립된 사원이었지만, 1779년, 샴 왕국(현 태국)과의 전쟁에서 건물은 소실되었고, 에메랄드불상은 태국으로 가지고 가서 현재 방콕의 에메랄드 사원에 안치되어 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서 사용되어 국내 각지로부터 모아진 불상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
라오스인들이 태국에 있는 에메랄드 사원의 원조라며 자랑스러워하는 호파케오는 사원 건물 좌우 벽을 따라 배치된 불상들이 인상적이다. 사원 벽면과 기둥은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돼 있고 문은 힌두교 색채가 강한 부조로 조각돼 눈길을 끈다. 동서양의 조화, 서로 다른 종교의 조화. 이것이 라오스 문화의 매력이다.
호파깨우 앞에 있는 왓시사켓(Wat Sisaket)은 1818년 차오아누 왕이 만든 사원으로 비엔티안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군주들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곳으로 사원 안에 전시된 여러 불상과 회랑에 안치된 120개의 불상이 볼거리다.
사원 내부 벽에 안치된 6,890개의 토기 불상을 포함, 1만 여개의 불상이 있는데 그 대부분은 거듭되는 주변국의 약탈에 의해서, 눈에 끼워 넣고 있던 보석류나 머리 부분의 금세공 등이 제거된 채로 있다.
라오스 남자들은 일생 동안 한번은 출가해 스님이 된다. 또 부모상을 당하면 7일간 삭발하는 전통이 있다. 일단 출가하면 절도, 거짓말, 살인, 음주 등을 완전히 끊어야 된다. 오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 오후불식의 전통도 있다. 그 대신 한국불교에 비해 출가와 환속이 자유롭다. 라오스에서는 환속은 개인의 자유다.
라오스 불교의 자부심은 엄격한 수행생활의 전통에서 나온다. 몸에 돈 한 푼 지니지 않고 탁발에만 의지해 살아가는 라오스 스님들의 삶은 청정 그 자체다. 스님들의 일과는 오전4시에 시작돼 밤11시면 끝난다.
특히 오후 12시30분 이후에는 물 이외에는 절대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는 혹독한 수행을 한다. 때문에 스님들의 사회적 위상이 높고 일반인들의 존경심도 크다.
일시적인 단기출가와 달리 ‘정식출가’는 매우 까다롭다. 스님들의 사회적 위상이 높고 일반인들의 존경심이 높기 때문에 지방행정기관과 라오인민혁명청년동맹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만 출가가 가능하다.
라오스는 아직까지 다른 동남아 국가에서 흔히 보는 교통혼잡, 대기오염, 범죄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밀려드는 관광객과 외국문물 속에서 그들만의 여유로운 생활방식을 잘 지켜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수도 비엔티안조차도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 같은 라오스는 자연과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여행자의 천국이다. 그러나 여행자들이 많아지면서 여유롭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밀려드는 외국문화로 점점 바뀌어가 아쉬움이 크다.
라오스는 시간을 느낄 수 있는 나라이며, 항상 긴장속에서 바쁘게 살아온 우리에게 "아무것도하지 않는 시간"의 가치를 일깨워, 몸과 마음의 휴식을 얻을 수 있는 쉼터다. 라오스는 우리에게 행복은 편리함이나 물질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라오스 최초의 통일왕국인 란쌍왕국을 건립한 파응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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