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1일(일)
성판악-정상-관음사
아침 6시. 알람소리에 눈을 뜬다. 제주도 여정 셋째 날이 시작된다. 6시 30분 숙소를 출발하여 제주공항에서 렌터카를 반납하고 시외버스터미널 가는 시내버스를 탄다. 요금은 1천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성판악 가는 버스는 약 10분 간격으로 있다. 요금은 1천5백원.
빵과 커피로 허기만 달랜다. 제주시에서 한라산 동쪽 허리를 가로질러 서귀포를 잇는 총연장 43km의 5·16도로(한라산 제1횡단도로)를 따라 40분 이동하여 성판악에서 하차한다.
한라산을 오르는 성판악 코스는 5·16도로(한라산 제1횡단도로)의 최고점인 해발 750m에서 시작된다. 성판악(城板岳)은 남서쪽 인근에 있는 성널오름에서 유래되었다. 수직절벽이 병풍처럼 약 500m 정도 둘러쳐진 모양이 마치 '나무판자로 성을 둘러친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7시 50분 기념사진을 찍고 들머리로 들어선다. 숲길은 짙은 녹색의 길로 아침 산책을 하는 기분이다. 투명한 가을 햇살이 우거진 나무 잎사귀 사이로 스며든다. 포근한 느낌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정상을 향해 다가설 수 있는 여유. 평탄한 길에서는 잰걸음으로 달려갈 수 있어 좋고 가파른 길에서는 땀을 흘려서 좋은 길. 산행은 자신을 거듭나게 만든다.
서어나무 등 활엽수가 우거진 길을 따라 진행하여 속밭을 지나 화장실과 대피소가 있는 쉼터에 이른다. 1시간 20분 소요.
진달래밭 대피소 3.5km 이정표가 보이고 완만한 오름길이다. 길 오른편 숲속에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이 이용하는 모노레일이 보인다.
사라악 약수에는 시원한 약수가 흐른다. 한바가지 떠서 갈증을 달랜다.
진달래밭대피소 0.7km이정표를 지나면서 길은 조금씩 가팔라진다. 가파른 길을 10여분 오르자 시야가 열리면서 해발 1,500m고지에 다다른다. 고도가 높아갈수록 구상나무와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이곳에서 만난 구상나무와 좀고채목 등이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계절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의 신비를 안겨주는 나무들의 모습이 우직하게 느껴진다. 어떤 구상나무는 이미 고사목으로 둔갑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구상나무는 잎끝이 두 갈래이며 솔방울이 열리고 잎 뒷면은 은빛이다. 반면 주목은 잎끝이 뾰족하고 빨간 열매가 열린다.
10시 25분 진달래밭 대피소에 닿는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30분이 지났다. 대피소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진달래 밭에서 백록담까지는 2.3km 보통걸음으로 1시간 30분 소요. 정상인 백록담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12시 30분까지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해야 한다. 진달래밭 대피소부터는 오르막길로 양쪽에 전나무가 즐비하고 바위들이 뒤엉켜있다.
뒤돌아보니 멀리 사라오름이 시선을 잡아끈다. 제주도의 360여 기생 화산 가운데 정상에 화구호가 있는 오름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사라오름 분화구는 예로부터 제주 제일의 명당자리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예전 비좁고 울퉁불퉁한 곳에 최근 나무 계단을 설치해 오르기가 한결 수월하다.
해발 1700m 표지석을 지나자 정상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한라산을 멀리서 보면 동그란 산정에서부터 해안지방까지 납작한 접시 아니면 방패를 엎어놓은 것 같으니, 곧 방패 순(楯)자를 쓴 순상화산(楯狀火山)이다. 해발 1750m부터 정상까지 0.8km 올라가는 길은 성판악 등산코스 중에서 제일 가파른 길이다.
해발 1800m 지점부터는 나무계단이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스쳐 지나간다. 해발 1900m 돌 표지석을 지나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마지막 오르막길은 이국적인 멋을 풍기고 있어 낭만적이다.
12시 정각. 드디어 한라산 동릉 정상에 도착한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환상의 섬 제주도, 이 섬의 한 가운데 1,950m의 높이로 우뚝 솟은 한라산(漢拏山)이 있다. 능히 은하수를 잡아당길(雲漢可拏引也)만큼 높은 산이란 뜻을 가진 이 산은 예부터 신선들이 산다고 해서 영주산(瀛州山)이라 불리기도 했고 금강산(金剛山) 지리산(智異山)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정상 한 가운데 푹 팬 분화구 안 한쪽은 물이 고여 있다. 백록담이다. 백록담은 원래 흰 사슴이 뛰놀며 분화구내의 물을 먹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 사냥꾼이 뛰노는 사슴을 잡기 위해 활을 쏜다는 것이 그만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맞추자 화가 난 옥황상제가 한라산 정상을 뽑아 들어 사냥꾼에게 던졌고, 그 뽑힌 자리가 백록담이 되었으며 던진 것이 산방산이 되었다고 한다.
한라산 동릉 정상 표지목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한 장 남기고 휴식을 취한다. 정상에서 맞는 가을 햇살이 따스하다. 30분 동안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고 관음사지구를 향해 발길을 옮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자 서서히 한라산 최고봉인 부악의 외벽이 기괴하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장관이다. 오래 전 스위스 여행에서 오른 알프스의 융플라우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산길로 들어선 지 40분. 왕관릉에 도착한다. 삼각봉에서 보면 왕관 모양의 바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살아 백년 죽어 천년 산다'는 고사목과 고채목 등 이국적인 나무들이 잘 꾸며놓은 정원 같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40분 정도 내려서 예전 용진각 무인대피소 자리에 도착한다. 용진각에는 갑자기 비가 내려 급류가 생길 우려가 있는 곳이어서 무인대피소가 있었는데 태풍으로 사라졌다.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거리는 짧지만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다. 예전에 없던 나무계단에 설치되어 있어 운치도 있고 맞은편 경치를 감상하며 안전하게 산행할 수 있다.
용진각은 삼각봉과 왕관릉 사이의 움푹 꺼진 골짜기를 일컫는 것인데, 예전에 용진굴이라고도 불렸다. 굴이라고 해서 동굴이 있는 것은 아니고 주위가 높은 언덕에 둘러싸여 신비스런 기운이 서려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용진각의 동북쪽 언덕은 장구목이라는 고원평지이다. 왕관릉에서 바라보면 영락없는 장고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에 1977년 세계 최고봉 초모룽마(티베트어로 세계의 어머니 여신이라는 뜻. 에베레스트, 8848m)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올랐으나, 2년 뒤 북아메리카의 최고봉 데날리(일명 메킨리, 6194m)에서 운명을 달리한 제주출신 산악인 고상돈씨를 기리는 케른(돌무덤)이 있다고 한다. 골짜기 건너편 산 중턱에 우뚝 선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끈다.
△사진 중앙에 노루가 보이시나요?
조금 더 내려서면 계곡을 가로지른 출렁다리가 설치되어 있고 출렁다리를 건너면 약수가 있다. 이곳 약수는 제주도가 자랑하는 삼다수보다 훨씬 물맛이 좋다.
낙석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철조망 아래 사면으로 난 등산로에 서면 왕관바위가 멋진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오고 멀리 파란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어우러져 부악의 외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곧이어 삼각봉을 만나고 개미목을 지나 개미등이 시작된다. 두 골짜기 사이에 툭 튀어나온 모양이 개미의 등 같아서 그런 명칭이 붙은 것이라고 한다. 백록담에서 1시간 50분소요. 개미등에는 올해 5월에 완성된 멋진 삼각봉대피소가 자리잡고 있다.
삼각봉에서 1시간 10분. 탐라계곡대피소에 도착한다. 이곳 역시 폭우로 인한 기상악화시 계곡물이 갑자기 불어났을 때를 대비해서 지어놓은 무인대피소이다.
△올라가는 게 아니고 뒤로 내려오는 모습
한라산 계곡 중 가장 길다는 탐라계곡을 끼고 계속해서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약간 험하다. 계곡이 깊을수록 마음도 깊어진다더니, 계곡은 인기척이 거의 없다.
탐라대피소에서 20분 지나면 만나는 무덤처럼 보이는 숯가마터에는 안내판 있다. 이곳은 한라산 참나무로 숯을 만들던 숯가마터라고 한다.
다시 20분을 더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안전 울타리와 구린굴 표지판이 보인다. 구린굴은 용암동굴로 한라산 화산폭발 당시 백록담 분화구로부터 흘러나온 용암에 의해 형성된 동굴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만이 갖고 있는 소중한 자원이라고 한다. 관음사지구 1.5km 이정표가 반긴다.
△일요일 나들이 나온 가족
16시 10분 야영장에 도착하여 약 8시간 20분 동안의 한라산 종주 산행은 끝이 난다. 5.16도로(제1횡단도로)와 1100도로(제2횡단도로)를 잇는 제1산록도로 변에 있는 관음사코스는 코스 명칭이 관음사라해서 절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고, 등산로 입구에서 동쪽으로 약 1.2km지점에 관음사란 사찰이 있기 때문 붙여진 것이다.
산행을 끝낸 아내는 정상 쪽을 바라보며 눈길을 돌리지 못한다. 8시간이 넘는 산행은 처음이었기에 힘들고 지루했을 텐데 잘 참고 무사히 완주해 준 아내가 고맙다. 아마 본인도 성취감에 뿌듯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될 것이다. 아내는 거의 일주일동안 산행 후유증으로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했다.
등산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잡다하고 복잡한 생각은 잠시 접어 머리를 쉬게 하고, 대신 온몸으로 자연의 기를 받으며 마음으로 느끼기 때문에 몸은 피곤할지라도 기분은 좋아지는 것이다. 결국은 피곤했던 몸도 더욱 건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