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피아골 산장지기 함태식옹. 사람들은 그를 ‘노고단 호랑이’ 또는 ‘지리산 털보’라고 불렀다. 지리산에 혼을 빼앗겨 입산한 지 30년이 넘었다. 눈을 들면 늘 지리산 자락이 보이는 구례가 그의 고향이다.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순천중과 연희전문학교를 수학했다. 인천기계제작소에서 10년간 근무했고 연탄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생의 절반을 내맡긴 곳은 아홉 살 때부터 오르내렸던 마을 뒷산, 지리산이었다.
그는 1957년 ‘연하반’이라는 산악회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지리산을 찾았다. 연하반은 이후 지리산악회로 이름을 바꿔 지리산을 ‘국립공원 1호’로 만드는 등 지리산 보존에 앞장섰다.
30년 전, 당시에는 산행객도 많지 않고 웬만한 준비 없이는 지리산을 찾기도 어려웠던 시절 홀몸으로 노고단에 올라갔다. 전란 중에 불 타 벽만 남은 외국인 별장을 개조해 산장으로 삼으려 했던 그의 노력은 자재를 구하지 못해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 71년, 노고단에 무인산장이 지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내려갔다. 아무도 관리하는 이가 없어 쓰레기더미로 뒤덮인 무인산장을 청소하고 새롭게 보수해 다음해 8월 노고단 산장지기로 정착했다. 당시 무인산장에서 새우잠을 자며 겨울을 난 결과 훗날 그는 폐 한 쪽을 잘라내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88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산장 직영화 조치로 노고단 산장에서 쫓겨나 하산할 결심까지 했다. 하지만 다행히 피아골 산장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 왕시루봉과 피아골을 오가며 지금껏 지리산을 지켜왔다. 그 사이 44세 중년 사내는 머리가 하얗게 센 팔순의 노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노인은 이제 지리산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누구나 지리산은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말은 많이 한다. 그러나 그 말의 진심을 따져보기 전에 얼마나 많이 지리산에 애정을 갖고 자연을 지키려 애써 왔는가를 되짚어볼 일이다. 30년을 지리산에서 살고 지리산 골짜기 구석구석 손금 보듯 훤히 아는 그가 옳다면 옳은 것이고 그르다면 그른 것이다.
그에게 있어 지리산은 어떤 의미일까. “그거 다 부질없는 거시여. 그냥 좋은 거여.” 노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렇다. 그에게서 뭔가 특별한 대답을 바랐던 것은 ‘산 아래 사람’의 어리석은 욕심이었다. ‘도시의 언어’를 쓰는 우리가 ‘산의 언어’를 쓰는 그를 이해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는지 모른다. 그는 다만 산에 대해 보고 느끼고 깨달을 뿐이다. 산은 그의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했다. 그는 이 같은 무애(無碍)의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피아골 산장 옆 간이휴게소도 ‘무애막’(無碍幕)이라 이름 붙였다.
“사는 게 뭐 별 거 있어. 사람이 태어나서 죄 안 짓고 나보다 약한 사람 좀 도와주며 사는 거제.”
하지만 세월의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지리산을 타던 많은 벗들이 세상을 등졌다. 그 역시 수차례 병원에 입원했다. 구조대에 업혀 산을 내려간 적도 있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소망이 있다.
하나는 지리산에서나 지리산에서 살고 지리산에 묻히는 것이다. 이미 두 가지는 이루었으니 '살다가 고꾸라진 곳'이 바로 무덤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조용히 있다가 갈 거여. 그래서 내가 죽으면 저 계곡 옆에서 태우라고 할 거여.”
영원한 ‘지리산 지킴이’ 함태식옹. 그는 이제 지리산 구석구석에 스며있는 아련한 전설로 남으려 하고 있었다. 〈글 김진우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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