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지리산 사랑 못 잊어` [중앙일보]
30년 전 실종된 선배 유해 찾는 은발의 산악인들
"술을 좋아했으니 술병이 나올 수도 있는데…." "비닐의 상태가 30여 년 전의 것은 아닌 것 같아."
4일 오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 중산리 계곡. 10여 명의 등산객들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산죽 숲을 오르내리며 무언가를 찾는다. 토굴 등 사람이 기거했던 흔적이 나타나자 주변을 샅샅이 뒤져 나온 술병이나 비닐조각 등을 유심히 살펴본다.
이들은 한평생 지리산 보호에 앞장서다 30여 년 전 실종된 뒤 '지리산 산신령'으로 불리는 허만수(1916~?)씨의 흔적을 찾아 나선 산악인들. 이날 행사는 인터넷 등산모임 '지리산 산길따라'가 창립 6주년 기념 등반을 하면서 허씨와 함께 지리산을 누볐던 성산(74.부산 대륙산악회 고문).성락건(62.지리산 옹고집들 대표).이광전(65.대한산악연맹 부산시 연맹 자문위원).송철기(65)씨 등 원로 산악인 10여 명을 초청해 이뤄졌다.
관절염으로 불편한 다리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수색에 나선 성산씨는 "그동안 '내가 사라지더라도 찾지 마라. 지리산 산신령이 돼 지리산을 보호할 것'이라는 허씨가 생전에 남긴 말 때문에 찾지 않았지만 하루도 그를 잊은 적이 없다"며 숙연해했다.
이날 중산리 계곡을 먼저 찾은 것은 허씨를 실종 몇 달 전에 만났던 성씨의 기억 때문이다. 성씨는 1976년 초 천왕봉에서 내려오다 만난 허씨를 따라 중산리 계곡의 토굴에 와서 함께 하루를 묵었다. 그날 허씨는 "내가 안 보이면 이곳에서 죽은 줄 알아라. 흔적 없이 지리산 품에 묻히고 싶으니 찾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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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사라진 허만수씨의 흔적을 찾아 나선 원로 산악인들이 지리산의 곳곳을 뒤지며 수색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김상진 기자] |
| 허씨를 찾으려는 노력은 후배 산악인들에 의해 개인적으로 이뤄져 왔지만 이번처럼 본격적으로 벌어지기는 처음이다. 지리산 산길따라 운영자 조용섭(52)씨는 "만약 흔적을 찾는다면 과학적인 검증과 원로 산악인들의 확인을 거친 뒤 모금운동을 벌여 추모 공간을 만들어 모시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다음달부터 허씨가 자주 다녔던 세석고원과 칠선계곡.도장골.내대 등 흔적을 발굴할 때까지 매달 지리산 전역을 정기적으로 수색할 예정이다.
세석고원은 허씨의 본거지였다. 움막을 짓고 살면서 조난자를 구조했다가 하산시켰던 곳이다.
수색대는 세석 주변 영신대(해발 1630m) 바위굴을 주목하고 있다. 이곳 12개의 바위굴을 최근 답사했던 성락건씨는 호미.운동화.가죽방석 등을 발견하기도 했으나 허씨와의 관련성을 찾지 못했다.
허씨의 딸인 덕임(61.경남 사천시 완사초등 교감)씨는 "아버지는 1년에 한 번쯤 학교로 찾아왔지만 76년 6월께 꿈에 햐얀 옷을 입고 여러 마리의 학과 함께 나타나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덕임아 나는 간다'고 말한 뒤로는 지리산에서 본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허씨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 온 성락건씨는 "자연보호에 관심이 전혀 없던 시절 홀로 지리산에 들어가 보존에 앞장섰던 그의 정신과 자연의 품에 흔적 없이 안긴 그의 생태적 죽음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진 기자
◆허만수씨=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11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한 뒤 22세 때 귀국해 결혼했다. 31세이던 1947년 가족을 남겨놓고 혼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지리산 관리주체가 없던 시절 샘터 10여 곳과 등산로를 뚫고 조난자 구조를 도맡았다. 지금도 등산로에 간혹 보이는 나무 사다리와 안내판 등은 그가 만든 것이다. 지리산 지도를 처음으로 직접 만들어 판매한 돈으로 안내판을 만들었다. 76년 6월 이후 그를 봤다는 사람은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