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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자료

반야비트

 

박영발의 죽음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기록으로는 전세가 불리해저 54년1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자살설(이태의 남부군, 한국사회주의인명사전, 백과사전)이 있고, 또 하나는 54년 4월 12일자[동아일보] 보도인데 54년 3월 모부대 박상옥 중사 일행이 반야봉부근 수색작업을 벌이던 중 밟힌 인분에 의해 비트가 발견돼 3명을 사살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박영발이었다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가 최근 이 비트를 증언한 박남진옹이 밝힌 내용으로 조국출판사의 필경사 일을 보았던 장본인이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조국출판사의 첫 출발은 반야봉 아래 계곡에 온돌식 비트가 시작이었으나, 53년 12월 15일 반야봉에 대규모 토벌대가 진주하는 바람에 바위비트로 옮겨진다. 여기에 무전사, 의사, 여성비서, 박영발 등 4명이 은거하고 박 옹 등을 포함한 나머지 7명은 보급투쟁 등으로 수시로 출입을 하였다.

한편 박영발과 함께 동굴에서 은신하고 있던 주치의 박모씨는 1953년 5월 토벌대와의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당해 이동이 매우 힘겨운 상태였다. 동굴생활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식량이 떨어지고 토벌대의 수색작전이 비트를 압박해오자 일행 중에서 자연스럽게 비트를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이에 총상으로 이동이 어려웠던 주치의가 '장소를 옮기게 되면 혼자 버려지게 될 것'이라는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다 '혼자 버려지느니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1954년 2월 21일 비트 보초를 보는 중 박 위원장 등 총 3명에게 30연발 칼빈소총을 난사했다. 갑작스런 총기난사로 동굴에 있던 박 위원장과 무전사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이모 여성비서가 몸에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던져 의사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이 여성비서는 부상과 허기로 동굴에서 힘겹게 버티다가 다음날 22일 식량을 전해주러 온 대원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진다.(발췌, 시민의 소리)


이와 같은 증언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자살설은 실질적인 2인자의 죽음이 내부자에 의한 사고라는 것이 알려질 경우 심리적인 타격이 컷을 것을 감안한 소문 퍼뜨리기로 생각되며, 토벌대에 의한 사살설은 이현상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경찰과 군인의 성과주의 사고방식에 의한 전공 부풀리기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 듯 박영발이 죽은 날짜는 각각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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