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주요 18계곡
1.뱀사골계곡. 2.칠선계곡. 3.피아골계곡. 4.장당골계곡. 5.내원골계곡. 6.중산리계곡. 7.백무동계곡. 8.한신계곡. 9.대성계곡. 10.심원계곡. 11.화개골계곡. 12.광대골계곡. 13.연동골계곡. 14.빗점골계곡. 15.단천골계곡. 16.거림골계곡. 17.도장골계곡. 18.구룡계곡
1.뱀사골 계곡
뱀사골하면 한국의 명수(名水)로 통한다. 지리산의 깊고 깊은 산록에서 맑고 깨끗한 물줄기가 빚어져 즐비한 징담을 거쳐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뱀사골의 청정계류는 가히 손색없는 우리나라의 으뜸 물줄기라 부를 만하다.
반야봉,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 사이의 울창한 원시림 지대에서 발원된 물줄기가 기암괴석을 감돌아 흐르면서 절경을 일구어 놓아 뱀사골의 계곡미 또한 장관이다. 우리나라 계곡의 대명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 만큼 잘 알려져 찾는 이도 많지만 그 품이 너무도 넓고 깊어 쉽게 오염되지 않는다.
토끼봉과 삼도봉 사이의 화개재에서 남원시 산내면 반선리 집단시설지구까지 12km의 물줄기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화려한 소(沼)와 징담이 뱀사골의 가장 큰 자랑이다. 대표적인 것만 하더라도 오룡대, 뱀소, 병풍소, 제승대, 간장소가 그림같이 전개돼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뱀사골의 특징은 화려한 소와 징담의 잔치와 더불어 산행을 하다보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힘들이지 않고 어물쩍 길손의 발길을 산마루에 올려놓게 하는 그 완만하고 고른 경사도를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뱀사골에는 연중 등산객뿐만 아니라 가족단위의 행락객들이 많이 찾아든다.
옛날 뱀사골 입구에는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매년 칠월칠석날 밤이면 주지 스님이 사라져 마을 사람들은 스님이 부처로 승천했다고 믿고 있었다. 서산대사가 이 소리를 전해 듣고는 사람이 부처가 되어 승천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 어느 해 칠석날 장삼 속에 비상(극약)주머니를 달아 주지 스님에게 입혀 예년과 똑같이 독경을 하도록 시켰다. 새벽녘이 되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소리를 내며 큰 뱀이 송림사에 왔다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이에 서산대사가 뱀을 따라 올라 가보니 용이 못된 이무기가 뱀소에 죽어 있어 뱀의 배를 갈라보니 주지스님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死)골이라고 하였고 끝내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를 일러 반선(半仙)이라 부르다 어느 때부터인가 반선(伴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전설 속에 등장한 송림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며 그 터에 전적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뱀사골의 유래는 이 외에 여러 이야기가 많다. 옛날 석실(石室) 부근에 배암사라는 절이 있어서 뱀사로 줄여 뱀사골로 됐다는 얘기도 있고 뱀소(沼)에서 유래되어 뱀소골, 뱀사골로 부른다.
또 뱀사골은 수많은 소(沼)가운데 간장소가 있는데 여기에는 화개재를 넘나들며 소금 장사를 하던 운봉 소금장수의 얘기가 있다. 그 옛날 화개장터에서 소금을 사서 화개재를 넘어오던 소금장수가 너무 지친 나머지 발을 헛디뎌 소금과 함께 웅덩이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 후로 이 웅덩이의 물이 간장처럼 짜다고 해 간장소라 불렀다 한다. 그리고 화개재에서 삼도봉을 거쳐 반야봉으로 오르는 길목 왼쪽에 이름 모를 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 무덤이 운봉 소금장수의 무덤이라는 얘기도 있다.
뱀사골의 소와 징담마다 그에 얽힌 얘기가 전해지는데 제승대는 정진 스님이 산을 향해 제를 올렸던 곳이라고 하는 등 뱀과 용에 얽힌 설화가 수두룩하다. 곳곳마다 징담이 이름과 함께 그 유래를 간략하게 소개해주고 있어 찾는 이를 흥미롭게 해주고 있다. 또 간혹 오래된 지도상에 삼차, 막차라고 나오는 지명이 있는데 이는 산간도로를 만들어 지리산의 거목을 나르던 당시의 지명들이다.
뱀사골의 절경은 빼어나지만 이곳에는 잊지 못할 우리나라 근대사의 아픈 흔적이 남아있다. 반선의 옛 송림사 터에 세워져 있는 전적 기념관만이 당시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 전적기념관은 지난 79년 국방부가 조성한 것으로 광복 이후 6·25를 거치는 동안 지리산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역사를 유일하게 상기시켜 주는 곳이다. 기념비와 2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각각의 전시실에는 당시의 각종 무기류와 사진, 모형물들이 전시되어 교육적으로 큰 가치를 갖고 있다.
전적기념관에서 시작되는 뱀사골은 화개재까지 이어지는데 대개 등반객들은 화개재 200m 아래 뱀사골 산장을 목표로 산행을 한다. 12km의 긴 등산로는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데다 지리산 등산로 가운데 가장 완만한 경사를 하고 있는 탓에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뱀사골 등반은 등산이라기보다 산책하듯 즐길 수 있는데 전적 기념관 옆으로 널따란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한동안 이어진다. 큰 길 대신 계곡변 소로를 택해 오를 수도 있다. 두 길은 결국 석실부근 제 3야영장에서 만난다. 감나무와 간이매점을 지나면 용이 머리를 흔들고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는 일명 흔들바위 요룡대가 나타나고 곧 반야교가 나온다. 곧이어 탁용소가 나오는데 긴 암반위로 폭포를 이루며 흐르는 물줄기가 장관이다.
탁용소에서 금포교를 건너면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살던 곳이라는 뱀소가 나오고 병모양의 기묘한 형상을 한 소가 연이어진다. 천장이 아치형인 명선교, 옥류교를 거쳐 계속 오르면 정진스님이 산신제를 올리던 제승대, 소금장수가 빠졌다는 간장소가 이어진다.
화려한 소와 징담을 지나 고목이 뒹굴기도 하는 등산로를 오르다보면 어느 샌가 뱀사골산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78년 반야봉산장으로 탄생했던 뱀사골산장은 그 후 85년 개축돼 8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 89년 12월에는 전화도 개통돼 대피소 기능을 충분히 했다. 풍부한 샘물 덕분에 많은 등산객이 찾았으나 오염을 이유로 2007년 폐쇄되었다.
뱀사골을 찾는 등반객들은 이곳에서 1박 한 뒤 반야봉을 오르거나 산을 넘어 피아골, 멀리 노고단과 화엄사를 거쳐 하산하거나, 또 연하천산장을 지나 세석이나 천왕봉을 오르는 등반객이 많이 이용하던 곳이다.
2. 칠선계곡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면서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는 칠선계곡은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가 펼쳐지는 대 자원의 파노라마처럼 천왕봉정상에서 마천면 의탄까지 장장 18km에 걸쳐 길게 이어져 있다.
지리산자락 가운데 유독 여성을 상징하는 지명이 가장 많으면서도 들어가면 갈수록 골이 더욱 깊고 날카로운 칠선계곡은 그 험준함으로 인해 숱한 생명을 앗아 가기도 해 죽음의 골짜기로도 불릴 정도이다.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칠선계곡을 꼭 등반하고 싶어 하지만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전문 산악인들도 히말라야 등 원정등반에 앞서 겨울철 칠선계곡에서의 빙폭 훈련 등반을 거칠 정도로 겨울의 칠선은 고난이도의 등반 기술을 요구한다. 일반인들의 경우 칠선계곡을 등반하려면 여름철에도 계곡 아래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루트는 피하고 주로 다른 코스로 천왕봉에 올랐다가 하산 길로 칠선계곡을 택한다.
칠선계곡의 총 연장은 18km이지만 등반코스는 추성동에서부터 천왕봉까지 14km이다. 지금은 한 시간 간격으로 추성동-함양읍간을 운행하는 버스 편이 있어 등산로가 4km 줄어든 셈이다.
추성동에서 시작되는 칠선계곡 등반로는 전체적으로 계곡등반의 위험성 때문에 상당 구간이 계곡과 동떨어져 있다. 이는 등산로를 벗어나서는 마음 놓고 발길을 둘 곳이 없을 정도의 험난한 산세 때문이다.
추성동에서 등산로를 따라 곧장 가면 칠선계곡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용소를 놓치기 쉽다. 등산로에 용소 가는 길을 표기해 놓았으나 등산로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계곡으로 거슬러 가면 5백여m 지점에 위치한 용소는 산신제를 지낼 때 산돼지를 집어넣는 곳으로 전해진다. 계곡을 따라 2km 남짓 오르면 두지동(두지터라고도 함)이 나오는데 등산로는 계곡길 떨어져 별도로 나있다. 주로 등산로를 이용하고 있는데 두지동은 마을 모양이 식량을 담는 “두지 같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 화전민들이 기거하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담배건조장과 농막 등만 남아 등산객들의 휴게소로 각광받고 있는데 특히 담배 건조장이 분위기 있는 찻집으로 변해있어 눈길을 끈다.
두지동에서는 창암산 능선을 넘어 백무동으로 갈수도 있다. 한동안 계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등산로를 따라 가다보면 암반과 소가 어우러진 곳에 설치된 쇠다리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경사진 도로를 따라 힘겹게 오르다보면 잡초와 감나무, 호두나무가 어지럽게 뒤덮인 마을터를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이 옛 칠선동 마을 터로 한때 독가촌이 산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울창한 잡목 숲을 따라 조금 더 가면 계곡 물 소리는 아득한 발아래서 들릴 듯 말듯 하며 널따란 바위를 만날 수 있는데 여기가 전망 좋은 쉼터인 추성망 바위이다. 여기서부터는 계곡등반이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험난한 산길이 계속돼 추성동에서 4km 지점인 선녀탕까지 계속된다. 일곱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 지금은 돌과 모래 등으로 메워져 전설속의 선녀가 목욕했을 정도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초라하다.
선녀탕의 전설은 선녀에게 연정을 품은 곰과 선녀를 도운 사향노루가 등장하는 동화 같은 얘기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곱 선녀가 이곳에서 목욕하는 것을 본 곰이 선녀들이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옷을 훔쳐 바위틈에 숨겨 버렸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맬 때 사향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주어 선녀들이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곰이 바위틈에 누워있던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알고 선녀들의 옷을 숨겼던 것이다. 그 후 선녀들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노루를 칠선계곡으로 이주 시켜 살게 했으며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는 전설이다.
선녀탕에서 조금 지나면 1백여 평 남짓한 소와 매끈한 암반이 있는데 칠선계곡에서 가장 빼어난 옥녀탕이다. 하늘을 뒤덮은 듯 한 울창한 수림과 넓은 소가 연출해 내 는 옥녀탕의 전경은 위로 무명 소들과 이어져 깎아지른 듯 한 벼랑으로 연결되면서 비경의 극치를 이룬다. 벼랑으로 조심스럽게 오르다 보면 비선담이 또 색다른 모습으로 반긴다. 계곡등반의 묘미를 한껏 맛볼 수 있는 구간이다.
비선담을 지나면 다시 옛 목기막터가 있었다는 산죽밭을 지나 오른편 계곡으로 건너게 되는데 계곡주변에 조그마한 바위굴이 있다. 과거 목기를 만들던 인부들이 지내던 곳으로 청춘홀이라 불리고 있다.
3. 피아골 계곡
피아골의 아름다움은 봄철 진달래, 여름철 우거진 녹음, 가을철 단풍, 겨울철 설화로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 가을의 단풍은 지리산에서 으뜸이다. 눈이 시리도록 선명하고 고운 피아골의 단풍은 찾는 이를 매료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피아골의 단풍은 삼홍(三紅)이라 하여 산이 붉게 불타는 산홍(山紅), 붉은 단풍이 맑은 담소에 비치는 수홍(水紅) , 사람이 들어서면 사람도 붉게 물드는 인홍(人紅)이 절경이다. 그 가운데 표고막터에서 삼홍소 간 1km사이의 빼어난 풍경이 피아골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그토록 아름다운 단풍을 빚어내는 피아골은 연곡천의 상류인 연곡사로부터 주릉을 향해 40여리에 걸쳐 이어져 있다. 반야봉 중턱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주릉과 불무장등릉, 그리고 노고단과 왕시루봉릉 사이의 원시림지대를 누비며 서남으로 돌고 돌아 왕시루봉을 따라 내려가 섬진강에 이른다.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 주릉에서 빚어지는 피아골의 물은 울창한 수림과 아름다운 수석을 감돌아 늘 청정함이 깃들여 있다. 즉 반야봉의 중턱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삼도봉과 노루목, 임걸령, 불무장등 사이의 원시림지대와 기암괴석을 감돌아 내려오다 노고단과 질매재에서 흘러내린 계류와 하나가 되면서 웅장하고 깊고 깊은 계곡을 만든다.
피아골의 어원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계곡 중간의 직전마을이란 지명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연곡사에서 2km정도 오르면 조그마한 마을이 나오는데 바로 직전(稷田)마을이다. 이는 오곡 중의 하나인 식용 피(稷)를 가꾸는 밭, 즉 피밭이 있던 마을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옛날부터 이곳에서 오곡 중 하나인 피를 많이 재배했다는 의미가 바로 피아골의 어원이다. 처음에 피밭골 (稷田谷)이던 것이 피아골로 전화된 것이다.
피아골은 장장 40여리에 이르지만 차량이 직전마을까지 들어갈 수 있는 탓에 그 깊이를 그렇게 크게 느낄 수는 없다. 피아골 등반은 차량이 들어가는 직전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직전마을에서 선유교까지는 30분 정도 걸리는 비포장의 넓은 길이다. 왼쪽의 아름다운 계곡미를 맛보며 거닐면 상큼한 기분이 압도한다.
선유교를 건너면 비교적 너른 야영장이 나온다. 표고막터라 부른다. 일제 강점기 때 이곳에서 표고버섯을 재배했던 곳이라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름철에 한해 이곳에서 야영이 가능하다는 국립공원 안내 입간판이 이색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표고막터에서부터는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선유교를 건너지 않고 그대로 계곡 오른편으로도 등산로가 이어져 있으나 잘 이용되지 않고 선유교를 건너 표고막터를 거쳐 계곡 왼쪽길이 많이 애용된다.
울창한 활엽수림에서 내뿜는 상큼한 산소를 마시며 잘 다듬어진 돌길을 걷는 기분이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평탄하며 완만한 길을 흠뻑 물든 단풍의 정취에다 계류의 청아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피아골 단풍의 백미로 삼홍소까지는 30분 정도면 당도한다. 86년에 가설된 삼홍교가 주변경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삼홍소에서 10여분 오르면 구계포다리가 나오고 여기서 바라보는 피아골의 경치는 극치를 이룬다. 완만한 암반위로 영롱한 오색의 구슬들이 층층 계단을 타고 쏟아지는 장관은 탄성을 절로 나게 만든다. 절경을 뒤로 하고 다시 10여분정도 오르면 남매폭포가 기다린다. 3∼4m의 아담한 쌍폭이다. 여기서 다시 조금 오르면 와폭이 있고 기다리던 피아골 산장이 나타난다.
4. 장당골 계곡
길고 깨끗하며 적막감마저 감도는 지리산 동부의 계곡이다. 써리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의 덕천강에 합류하기 까지 그 길이가 50여리, 20km에 이른다. 기나긴 여정을 요구하는 장당골은 골짜기 속의 골짜기로 곧잘 표현된다. 덕산에서 대원사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대포마을에서 계곡을 거슬러 가다보면 내원사 앞 계곡에서 물줄기가 둘로 나눠지는데 왼쪽은 내원골, 오른쪽이 바로 장당골에 해당된다.
장당골은 다시 바깥장당과 안장당으로 구분되는데 더 상류로 가면 무재치기 폭포로 이어지는 물줄기와 써리봉과 남단부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써리봉∼국사봉을 잇는 황금능선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경상대 연습림 장당보호소 주변에 모여져 내원사까지 흐르다가 내원골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합류, 대포마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상류의 무재치기 폭포는 지리산에서 가장 이름난 폭포수로 물줄기가 쏟아지면서 아래의 바위에 부딪쳐 아름다운 무지개를 빚어내는 폭포로 유명하다. 무재치기폭포 이외에 장당골에는 이렇다 할 명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장당골의 속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배어나오는 태곳적 신비감과 순수함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독특한 형태의 물줄기는 하류, 다시 말해 경상대 연습림이라는 널찍한 산판도로와 8차례나 엉키며 이어지고 있어 등산로라기보다는 산책로 정도로 평가되고 있으나 상류는 전혀 판이한 형국을 하고 있다. 울창한 수림이 뒤엉켜 넘어지면 넘어진 대로 그대로 썩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자연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이 바로 장당골 상류이다. 아직은 사람의 때를 덜 탄 때문이다.
등산로는 치밭목 산장과 무재치기 폭포에서 내원사 주차장까지 17km구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대포마을에서 내원사까지는 차량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버스 편으로 등반을 시작하려면 대포마을까지를 등산로로 간주해야 한다.
내원사 주차장 오른편 위로 계속되는 산판도로 입구에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차량운행을 통제하는 시설을 설치, 차량운행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등산로의 시발점을 이곳으로 본 것이다. 내원사에서 경상대 연습림 장당보호소까지 도로가 잘 다듬어져 있는데 8번이나 계곡과 만나는 탓에 지프차 이외의 일반차량은 운행이 불가능하다.
내원사∼장당보호소간은 대략 10km거리로 두 시간 가량 걸어야 된다. 등산로라기보다는 호젓한 산책로 같은 이 구간은 장당골 특유의 깨끗하고 짙푸른 계곡수로 유명하다. 거대한 폭포수가 있는가 하면 산중호수를 연상케 할 정도의 넓고 깊은 소등 오밀조밀 계곡의 풍치는 일품이다. 이런 탓에 이 일대는 아직 덜 알려져 있는데도 매년 여름철이면 피서 인파들로 붐빈다.
실제는 여름한철 뿐 아니라 장당골에는 사시사철 색다른 자연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일반인들이 잘 몰라 아직은 여름 한철만 애용되곤 한다. 그래서 장당골을 잘 아는 산꾼들에게만 지리산의 아름다운 자연 세계를 보여 주는 [소중한 비밀]로 아직 남아 있다. 이는 아마도 장당골이 천왕봉과 다소 동떨어진 탓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5. 내원골 계곡
지리산의 비극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채 우리에게 많은 부분을 시사해 주는 곳이 있다. 갈색 수풀 사이로 푸름이 하나 둘 움을 돋아내고 분홍빛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4월 중순. 우리 한민족 역사에 있어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이었던 역사의 현장인 지리산 내원골은 아직도 을씨년스럽다 못해 황량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음침한 갈색 수림은 당시의 비극을 말해 주듯 했으며 어둠의 대지를 뚫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 연분홍 진달래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남긴, 아니 못 다한 삶을 계속 영위하려는 듯 핏빛처럼 선명하게 갈색 숲속에서 돋보였다. 그리고 햇푸름을 보일락 말락 하고 있는 고목들만이 변함없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수십여 성상을 버티고 있었다. 폐허가 된 채 잡목과 잡초만 무성히 자리한 그 옛날 빨치산의 생가와 살던 집, 그리고 끝내 붙잡힌 장소는 아직도 흉물스런 모습을 하며 남아 있는 내원골.
초라하고 처참한 당시의 흔적을 내원골은 그대로 부여 앉고 있으나 세상은 이제 한 세기를 마감하며 "이데올로기"를 역사의 낡은 단어로 뒤꼍에 미련 없이 내팽개치고 있음은 무얼 의미하는가.
이제 관광지로 겨우 각광받고 있지만 수년전 까지만 해도 인적이 드물었던 곳이다. 내원사에서 바깥 내원마을을 지나 배양이, 안내원 마을에 이르기까지 다소 잘 닦여진 도로를 따라 주변 곳곳에 중장비가 들어와 집들을 짓고 단장하고 있는 모습은 개발의 전주곡처럼 보였다. "외탑이" "쌍탑이" "큰 절골" "작은 절골" 등등의 지명이 그것이다.
장당골과 나누어지는 내원사에서 왼쪽으로 연결한 도로를 따라 계속되는 내원골은 국사봉으로 이어지는데 승용차를 이용해도 해발 8백m인 안내원 마을까지 쉽게 갈 수 있다.
내원골은 별다른 세련된 운치를 풍기는 풍광은 없으나 고산지대에서 보기 드문 "분지"가 이색적이며 옛날 불교문화가 꽃피었던 사실과 근대 빨치산들의 활동무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두고 찾아가 볼만한 곳임에 틀림없다.
6. 중산리 계곡
지리산에 있어서 중산리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거대한 지리산자락 어느 지역 보다 중요시되며 많은 등반객들이 중산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마도 주봉인 천왕봉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고 오를 수 있다는 지리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인 지리산 등반의 시발점인 중산리는 천왕봉을 가까이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장 사랑받는 자리를 차지 할 수 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천왕봉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오르려면 중산리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다.
충청이북 사람들은 흔히들 지리산을 오르면서 구례나 남원, 함양 등지를 시발점으로 천왕봉을 등정하는 탓에 중산리의 의미를 하산하는 종착지쯤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이는 자신들의 편의에 의한 것일 뿐이며, 지리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천왕봉으로 가는 길은 많다. 그리고 지리산 등반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중산리를 기점으로 천왕봉을 오르고 지리산을 등반하는 것만큼 지리산 등반의 묘미를 느끼는 산행은 드물다.
이른 새벽 여명을 등지고 중산리를 출발해 멀리 운해위에서 용솟음하는 아침햇살을 천왕봉에서 맞이하는 기쁨은 중산리를 거치지 않은 등반객은 결코 알지 못한다. 지리산행의 진미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등산로의 전진기지가 중산리인 셈이다.
몽블랑과 알프스의 수많은 산군들을 조망할 수 있고 등정하기 위한 시발점인 샤모니와 중산리가 곧장 비유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천왕봉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중산리,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올려 볼 때면 한걸음에 달려가고픈 충동을 느낀다. 그래서 지리산을 사랑하고 즐겨 찾는 이들은 중산리를 마음의 고향으로 정해 두기도 하며, 중산리 입구에 들어서기만 해도 마음이 설렌다고들 말하고 있다.
이 곳 사람들의 지리산(천왕봉) 사랑은 몇 해 전에 있었던 천왕사 성모석상 소유권을 둘러싼 법정 공방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산마을 뒤편에 위치한 천왕사 혜범스님이 현몽했다고 자처하며 찾아낸 천왕 성모석상을 천왕사에 안치한 사실을 두고 이 곳 중산리 사람들은 "안된다"며 성모 석상을 천왕봉으로 다시 모셔야한다는 논리로 법정공방을 벌인 것이다. 물론 소송에서는 천왕사의 기득권이 인정돼 중산리 사람들이 졌으나 이들이 지리산 , 특히 천왕봉을 신성시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중산리에는 노고단 못지않은 급속한 개발이 진행 중에 있다. 산청군이 이 일대에 대단위 집단시설지구 조성을 시작했다.
중산리의 개발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며 오히려 다른 지리산자락 보다 뒤늦게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일부에서도 차제에 중산리에서 지리산 중턱까지 케이블카나 모노레일을 가설하자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이니 개발도 중요 하지만 편의에 앞서 생태계 보전 문제가 가장 우려되고 있는 현실이다.
5백 년 전 김일손이 그의 일행들과 다시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중산리를 찾는다면 뭐라 할까. 옛 선조들의 두류산 기행문을 한번쯤 탐독하고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중산리 일대가 현대화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중산리 계곡 일원은 여전히 우리의 토속 신앙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거대한 바위 벽면에 어지럽게 페인트로 이름을 적어 놓고 온갖 음식들을 차려 치성을 드리는 치성객의 행렬은 하루도 빠짐이 없는 지경이다. 특히 천왕봉이 마주 보이는 계곡 지점에는 길일이면 서로 좋은 기도처를 차지하러 밀어닥칠 정도로 중산리 계곡이 붐빈다. 이곳을 찾는 치성객들은 대개 밤을 새워 가며 굿판을 벌이기 일쑤여서 조난사고까지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바위마다에는 치성객들이 써 내린 글씨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으며, 바위 틈새에는 치성에 쓰다 남긴 음식물들이 틈틈이 버려져 있다.
급속한 개발과 지리산으로 향하는 등반객들의 끊임없는 행렬과 함께 극성스러울 정도로 몰려드는 치성객들의 행렬, 이 세 가지가 오늘날 중산리의 현실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정서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7. 백무동 계곡
지리산의 북쪽 자락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거리는 곳이 백무동이다. 이곳은 남쪽의 중산리처럼 천왕봉을 오르는 북쪽의 들머리이자 세석고원과 10km 거리로 가장 가까이 자리한 마을이다.
세석고원에서 철쭉제가 열릴 때의 백무동 일대는 등산객들로 파시를 이룬다. 세석고원으로 오르는 길은 주능선 남쪽의 경우 거림, 청학동, 대성리로 나뉘어져 있으나 북쪽은 백무동이 유일하다. 또 백무동은 우람한 폭포가 연이어 있는 한신 계곡과 백무동계곡의 매력 때문에 한 여름철엔 지리산 최고의 피서 명당이다.
경남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강청이란 이름은 대부분 모르고 있지만 백무동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강청리는 상백무, 중백무, 하백무와 도촌, 송알, 강청 등의 여러 마을로 이뤄져 있으나 요즘은 강청리란 행정명칭 보다 백무동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백무동이 너무 아름답다 보니 지난 60년대까지 북쪽 지리산 관문이던 인월, 이어 70년대까지의 관문이던 마천면 소재지 가흥리가 이제는 그 자리를 백무동에 넘겨주고 통과지역으로 자리바꿈을 하였다.
백무동은 교통이 불편하던 옛날에도 많은 기도객이 붐비는 곳으로 이름나 있다. 전국 무당들의 우두머리가 천왕봉의 성모사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언제나 1백 명의 무당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원래의 이름은 '백무동(百巫洞)' 으로 불렸다. 주로 '지리산 굴바위' 주변에서 많이 활동하고 한때는 휴천계곡의 용류담, 한신계곡의 가내소폭포와 하동바위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또 다른 뜻으로 '백무동(白霧洞)'으로 일컬어진 때도 있었는데 안개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썼다.
현재는 이도 저도 아닌 백무동(白武洞)으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도 '백무'는 여전히 사라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8. 한신계곡
지리산 북부의 깊고 넓은 한신계곡은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에서 세석고원까지의 험준하면서도 수려한 계곡미가 일품이다. 계곡미의 극치인 폭포를 수 없이 빚어내며 백무동에서 세석까지 10km의 여정을 자랑하는 한신계곡은 영롱한 구슬이 구르듯 맑고 고운 물줄기가 사철 변함없이 이어지는 폭포수의 계곡이다.
한신계곡은 수많은 폭포수만큼이나 많은 명명 사연을 갖고 있다. 우리네 선조들이 나무 한그루, 돌 하나, 물줄기 하나에도 깊은 사연을 만들고, 그것을 즐겨 얘기해 왔듯이 계곡도 마찬가지로 예외가 아니다.
하나는 「깊고 넓은 계곡」의 의미로 한신계곡이며 다른 하나는 한여름에도 몸에 한기를 느낀다 해서 한신계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계곡의 물이 차고 험난하며 굽이치는 곳이 많아 한심하다고 해서 한심계곡이라 불렀으나 발음이 변해서 한신계곡이 됐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 옛날 한신이란 사람이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으로 가다가 급류에 휩쓸려 떼죽음을 했다 해서 한신계곡이 되었다는 사연이 있는데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계곡에서 꽹과리 소리가 들린 다는 게 이 지방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신계곡의 본류는 세석으로 이어지지만 이 계곡 주위에는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형성돼 있다. 하부 백무동 앞의 계곡을 백무동계곡으로 지칭할 때 백무동계곡은 크게 네 갈래의 큰 계곡을 안고 있다. 백무동 위로 세석까지의 한신계곡과 덕평봉 북쪽에서 발원하는 바른재골, 칠선봉 부근에서 내려오는 곧은재골, 장터목 방향에서 흘러내리는 한신지계곡 등 네 갈래가 그것이다. 여기서 한신계곡을 중심으로 한 네 개의 계곡이 백무동계곡을 만들어 엄천으로 흘러 남강의 상류가 형성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한신계곡은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의 협곡으로 만들어져 가네소폭포에서 한신지계곡과 합류, 백무동으로 이어진다. 한신계곡과 한신지계곡은 잘 다듬어진 등산로를 통해 누구나 쉽게 등반할 수 있으나 바른재골, 곧은골은 아직도 범접하기 힘든 미지의 계곡으로 남아 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한신계곡의 등반기점은 백무동이다. 백무동까지 차량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으며 여기서 야영장을 지나 널따란 길을 따라 첫나들이 폭포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백무동 - 첫나들이 폭포까지 2km구간은 계곡과 절벽을 사이에 두고 평탄한 오솔길이 있는데 울창한 숲의 터널을 이뤄 계곡에서 울려오는 물줄기 소리와 어우러져 환상의 등산코스로 불린다.
여름철이면 싱그러운 녹음과 시리도록 차갑고 맑은 물줄기로 최고의 피서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늦은 가을이면 어지러이 나뒹구는 낙엽과 단풍물결로 만추의 서정을 빚어내 찾는 이를 감동케 한다. 백설이 쌓이면 빙벽과 설벽을 만들어 모험을 즐기는 산꾼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백무동에서 첫나들이폭포까지의 널따란 오솔길은 가족등반을 가능하도록 해주고 있을 정도로 잘 닦여져 있는데 이 도로의 생성 동기는 의외로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1963년 9월 삼성흥업 주식회사란 벌채업소가 서울 영림서로부터 마천면 강청리, 삼정리, 추성리 일대 국유림내의 고사목 등에 한해서 벌목허가를 받았다. 그 당시 목재 운반을 위해 산판도로를 만든 것이 이 오솔길인데 벌목허가가 그 후 남선목재와 서남흥업이란 회사로 전매되면서 무차별 도벌이 자행된 아픈 과거사의 현장이다.
숲속 길을 한참 지나다보면 처음으로 등산로와 계곡이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이곳이 첫나들이 폭포이다. 20여개의 물줄기를 자랑하는 이 폭포는 바람폭포로도 불리고 있다. 계곡을 가로 지르는 철제다리 아래로 쏟아지고 있는데 다리 위에서 보다 아래서 위로 보는 폭포수가 더욱 장관이다.
등산로만 따라가다 보면 놓치기 쉬운 폭포수로 바람처럼 물방울이 흩날리면서 물안개를 피어 올리기도 해 환상적이다. 철제다리를 지나 등산로를 따라가면 곧장 또 다른 철다리 3개를 더 만날 수 있는데 출렁이는 다리 위에서 발아래 계곡류를 구경하는 것도 일품이다.
첫나들이에서 1km남짓한 거리를 두고 있는 가네폭포까지의 계곡미는 한신계곡의 진수로 평가되고 있다. 이름 없는 폭포수며 널따란 반석들과 울창한 수림은 바로 선경이다. 가네소폭포 바로 아래 지점 에서 물줄기는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바로 한신계곡과 한신지계곡이다.
지계곡은 내림폭포를 따라 장터목으로 이어지며 한신계곡은 오층폭포 한신폭포를 따라 세석으로 연결된다. 가네소는 15m높이의 폭포이며 50여 평의 검푸른 소를 만들고 있어 우선 그 웅장함에 압도당한다. 사철 수량이 변함없어 예로부터 기우제 장소로 많이 이용돼왔다. 기우제의 전설을 안고 있는 가네소는 요즘 들어 연중 수많은 등반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러한 조건으로 백무동 - 가네소구간은 한신계곡의 서막이다.
한신계곡의 본격적인 산행은 가네소에서부터 세석가지의 7km구간이다. 가네소 왼쪽 흙비탈길을 올라 조금만 가다 보면 계곡을 만나 건너게 되는데 계곡주변 숲길을 가면 5단계의 폭포가 길게 이어지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오층폭포가 나온다. 오련폭포라고도한다.
오층폭포에서 산죽과 잡목터널을 따라 계곡을 건너고 등반로를 따라가다 보면 다소 벅찬 경사길이 나타나기를 몇 차례 한 뒤에야 한신계곡을 상징하는 한신폭포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폭포는 이정표에서 80여 m 우측 계곡으로 내려가야 볼 수 있을 정도로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다.
한신계곡은 수많은 폭포수를 빚어 놓은 채 마지막으로 1km거리를 칼날 같은 바위길을 따라 세석으로 이어진다. 백무동을 출발해 원시림과 수려한 물줄기를 지나 철쭉의 향연이 베풀어지는 세석에서 마무리되는 한신계곡 루트는 여름에 한번쯤 등반할만한 환상적 등산코스다.
9. 대성계곡
대성계곡은 오랜 옛날부터 보기 드문 기도처로 뭇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근세에 들어서는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피의 제전의 역사를 간직한 길고 깊은 골짜기로 잘 알려져 있다. 화개동천 맨 안쪽에 숨어있는 협곡의 수림과 남향으로 배치된 기암절벽, 그리고 그 위용의 품위를 한 단계 높여주려는 듯 흐르는 물줄기는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로 손색이 없다.
세석평전을 거느리는 영신봉의 위엄은 세석과 더불어 대성골을 이상향의 대상으로 삼게 만들어 오랜 옛날부터 과학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성골을 찾아나서는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대성골 가운데서 가장 깊숙이 숨겨져 있는 영신봉 아래 영신대는 지리산에서 최고의 기도처로 각광 받으면서 치성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 영험스런 자태는 금방이라도 소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듯해 치성객의 애간장을 태우기에 충분하다.
우리 민중의 정서를 방증하는 대성골은 그러나 온 산하가 동족상잔의 전란을 겪으면서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변하기도 해 우리에겐 비운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성골은 빨치산 투쟁의 최대의 비극으로 이곳에서 수백여 명의 빨치산이 몰살당했다.
정충제씨가 기록한 "실록 정순덕"과 이기형씨가 쓴 "죽음의 골", 그리고 이태의 "남부군" 등은 1950년대 초 지리산 일대에서 치러진 군·경과 빨치산의 처참한 격전을 기록으로 전해주고 있는데 그 가운데 대성골의 비극이 가장 격렬하고 처절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들 기록마다 빨치산 몰살 규모와 일시 등이 조금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대체로 그 시기는 1952년 1월 17일과 18일이 최대 격전기였으며 그 해 1월 한 달 동안이 백야전사령부 3기 토벌작전 시기로 보인다.
토벌대의 작전이 시작되면서 1월 17일 무렵 지리산 온 골짜기는 함박눈이 퍼붓고 있는 가운데 날이 저물자 빗점골, 거림골, 신흥등지에 있던 빨치산이 대성골로 모였다. 다음날 새벽 무렵 눈 덮인 대성골에는 적게는 1,000명에서 많게는 1만 명에 이르는 빨치산이 모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른바 백야전사령부의 제3기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대성골에 모인 빨치산은 사면초가 격으로 수백 명이 처참한 최후를 맞은 사실이 전해진다. 당시 몰살당한 빨치산의 규모는 각 기록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1952년 1월께 남은 빨치산 수를 미뤄볼 때 이기형씨의 "죽음의 골"에 나오는 수백 명(대략 800여명)이 근사치에 가깝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빨치산 몰살 사건이 이 곳 대성골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대성골이 갖는 지형적 특성에서 비록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계곡중 대성골이 가장 깊은 협곡인데다 지세가 험난해 도피하기엔 안성맞춤이어서 궁지에 몰린 빨치산이 이곳으로 숨었고 때마침 토벌대의 정보와 작전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불과 40여 성상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대성골엔 당시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무심한 대자연은 수천 년 변함없이 그대로 인간이 하는 일을 모른 듯 지켜만 보고 있을 따름이다.
비운의 사연을 간직한 대성골을 찾아가는 길은 화개동천을 따라 잘 포장된 길을 올라 대성교에서 시작된다. 등산로는 대성교에서 시작되는 길과 조금 위의 의신 마을에서 시작되는 두 갈래다. 세석까지 12km, 대성교에서 등산로는 시작부터 가파른 길이지만 의신부터는 평탄한 길이 시작돼 1km만 지나면 하나로 된다. 이곳이 옛날 능인사가 있었다는 절터이다. 해발 500m지점이기도 하다.
능인사 터에서 완만하고 뚜렷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후박나무가 우거진 대성동 마을에 도착한다. 대략 대성교에서 2km거리에 위치한 대성동에는 2가구만 남아 민박도 하고 토종닭, 산채, 동동주 등을 팔고 있다. 자가발전으로 전깃불을 이용해오다 95년 12월에야 한전에서 전기를 공급했다. 원래 대성동은 이곳에서 4km 더 들어간 곳에 있었으나 60년대 후반 정부의 배려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4km 위의 집터가 있는 곳을 원대성이라고 부른다.
대성동에는 대성골이 으뜸 기도처임을 입증이라고 하듯 지금도 아무 하는 일없이 정신수양을 하거나 요양을 위해 장기간 민박하는 사람이 10여 명씩 된다고 한다.
대성동 마을에서 세석까지는 10km.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등산은 험난한 코스가 별로 없이 비교적 평탄한 길이 계속된다. 남부 능선과 갈라지는 1,400m 갈림길에 못 미쳐 조금 힘들 뿐 등산에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조금 지루한 산행은 각오해야 하는 게 대성골 등반의 특징이다. 대략 오르는데 4시간 30분에서 5시간은 걸리며 내려오는데도 3시간 30분은 각오해야 한다.
10. 심원계곡
지리산 서쪽 자락에 가면 천년 수목 사이를 운무가 감도는 천혜의 절경이 늘 반긴다. 반야선경과 노고단의 그윽한 정취와 풍경이 곁들여져 마치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감도는 곳이 바로 심원(深源)계곡이다.
칠선계곡, 문수계곡과 더불어 지리산의 3대 계곡으로 손꼽히는 심원계곡은 굽이굽이 청산녹수요, 사방이 영봉이니 지리의 깊고 깊은 그 오묘함이 서려있는 곳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반야봉과 노고단 사이의 깊고 깊은 계곡인 심원계곡은 담(潭)과 소(沼)가 50여개나 연이어 펼쳐지는 골짜기로 계곡을 거슬러 오를수록 산행을 한다는 느낌보다 선경에 몰입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곳이다.
심원계곡은 마한의 피란 도성터인 달궁 마을에서부터 시작되는 달궁계곡과 이어져 펼쳐진다. 달궁 마을에서 20여분 오르면 쟁기소가 나타나고 다시 20분가량 가면 둘레가 80m나 되는 쟁반소가 눈에 띄는데 여기서 부터 심원계곡의 신비가 시작된다. 옛적에 비가 오면 수천마리의 두꺼비가 모여 울었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두꺼비소가 있는가 하면 이름 모를 수많은 징담이 즐비해 찾는 이를 매료시킨다.
반야봉에서 달궁마을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지나가기도 하는 쟁기소에서 500여m 더 계곡을 거슬러 가면 반야봉 서북 능선 자락과 만복대 사이로 지나는 전남과 전북의 경계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 아래까지는 전북 남원시 산내면이며 그 위로는 전남 구례군 산동면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곳부터가 심원계곡이라 할 수 있고 그 아래는 달궁계곡으로 봄이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심원마을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는 노고단까지 대략 2시간∼2시간 30분이면 오를 수 있다. 그리고 반야봉으로 바로 오르려면 노고단 방면으로 오르다 왼쪽계곡, 즉 대소골을 거슬러 이어진 등산로가 잘 열려져있다.
또한 심원마을에서 임걸령까지도 오를 수 있는 등 다양한 등산로가 열려 있다. 그러나 심원계곡의 신비함을 찾아 힘들게 등산을 한다는 것은 근래 들어 별다른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달궁에서 계곡을 따라 이어진 도로망이 쉽게 하늘 아래 첫동네인 심원마을에 이를 수 있게 해주는가 하면 성삼재에서 30분이면 노고단에 이를 수 있다는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노고단과 반야봉에서 내려다보는 심원계곡의 깊고 깊은 원시성은 위에서 쉽게 한눈에 내려다보는 것보다 힘들게 걸어야만 심연에 빠져들 듯 한 느낌을 맛볼 수 있음은 분명하다.
11. 화개골계곡
지리산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가장 풍성한 볼거리와 먹거리 그리고 소중한 문화유적과 그에 따른 얘깃거리가 담겨져 있는 곳이 화개골이다. 사시사철 색다른 모습으로 변하면서 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풍경이 화개동천만이 가진 특성이라면 특성이다. 그 옛날 선조들이 지리산의 이상향을 찾아 나섰던 들머리가 바로 이 곳 화개골이고 보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는 까닭을 알 수 있다.
이른 봄이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화개 10리 벚꽃 길은 일제 때부터 내려온 고목의 벚나무들이 길 좌우로 늘어서 있다. 그 나무에서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은 하늘을 가릴 듯 벚꽃터널을 만들어 장관을 이룬다. 봄 냄새를 물씬 풍기는 화개천의 옥류와 10리 벚꽃길이 빚어내는 화개의 봄 풍경은 생동감이 넘치며 대자연의 신비함을 느끼게 한다.
해마다 4월 초순께면 이곳의 벚꽃 장관을 즐기려는 상춘객들이 줄을 잇는 까닭은 지리산 자락의 봄기운이 화개천변의 벚꽃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있는 탓이다. 갈수록 벚꽃 인파가 늘어나면서 93년부터 하동군에서는 상춘객의 흥을 돋우기 위해 화개장터 벚꽃제 행사를 마련했다. 화개장터 벚꽃제는 4월 중순께 환상적인 벚꽃의 향연이 극치를 이뤄 이무렵 전국에서 몰려든 벚꽃 인파로 화개골은 터져 나갈듯하다.
화개 벚꽃과 함께 화개골 들머리의 화개장터 역시 아직도 그 명성을 충분히 떨치고 있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무대이며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 주 무대로 더 알려진 이 곳 화개장터는 그 옛날 우리나라 3대 장터 중의 하나였다. 해안지방의 해산물과 내륙의 산나물, 약초 따위를 거래하기 위해 1일과 6일 닷새마다 열렸던 그 옛날의 화개장터 모습은 이제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지만 지리산을 찾는 이들에겐 소중한 향수를 일깨워주는 장터임엔 틀림없다.
화개골의 또 다른 진면목은 수많은 불교 유적들이다. 조선시대 까지 만해도 이 계곡 안에는 100개가 넘는 절과 암자가 있었다 한다. 이들 불교 유적들은 대부분 빼어난 절경을 끼고 있어 당대의 고승들과 유학자들이 탐승의 발길을 끊지 않았다. 쌍계사와 칠불사의 대비되는 불교문화를 음미해 볼 수도 있으며 이들 사찰을 배경으로 한 고승들의 발자취, 그리고 융성했던 신라불교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래돼온 과정을 살필 수도 있다.
화개골의 사찰은 특히 신라시대의 고운 최치원과 조선시대 서산대사의 행적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는가 하면 가락국 일곱 왕자의 성불에 얽힌 사연을 전해 주기도해 더더욱 흥미를 끌게 하고 있다.
화개골에 사찰이 많았음을 보여 주는 것은 쌍계사와 칠불사 이외에 화개장터 주변의 마을이름이 탑리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곳에 탑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도 화개장터 건너편에 3층 석탑이 남아 있어 이 일대의 불교문화가 번창했음을 엿볼 수 있다. 가락국과 신라시대의 융성했던 불교문화는 가히 이곳 화개골에서 그 깊이를 더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범패음곡 등 불교음악의 원류가 이 곳이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화개골의 불교는 또한 우리나라 차(茶)문화의 발달과도 연관지어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흥덕왕 3년(828)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김대렴(金大廉)이 차 종자를 가지고 오자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했다고 한다. 아울러 차는 이미 선덕 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번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대렴이 차를 처음 심은 곳이 지리산에서도 쌍계사 근처의 화개골이냐 화엄사 부근이냐는 논란이 있으나 여러 정황과 현재 화개일원의 야생 차밭 등으로 미루어 화개골이 시배지라 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12. 광대골 계곡
광대골이라는 넓고 커다란 계곡이 지리산에 있다. 지리산 계곡 중에서 그 규모나 비경이 다른 계곡에 결코 뒤지지 않으면서도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지리산의 골짜기로 남아있다. 인근의 백무동이나 칠선계곡, 뱀사골의 명성은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반해 넓고 커다란 광대골은 그저 묵묵히 자연의 흐름을 쫓아 조용히 숨겨져 있었던 탓에 그 값어치는 더욱 돋보이기에 충분하다.
광대골은 뱀사골과 한신계곡 사이의 커다란 물줄기다. 지맥으로는 덕평봉 ∼ 벽소령꼭대기 ∼ 형제봉 ∼ 삼각봉과 덕평봉에서 강청마을 뒤편의 오송산(669m)을 잇는 산줄기, 그리고 삼각봉에서 삼정산(1225m)을 연결하는 지맥사이의 계곡이다. 흔히들 벽소령의 이름을 따 벽소령계곡 이라고도 하지만 넓고 커다란 골짜기란 의미의 광대골이 본래 이름이다. 벽소령 북쪽에 10여개에 달하는 지류를 하나로 만들어 임천강으로 흘러 강청리에서 백무동의 물줄기와 합류한다.
광대골의 수많은 지류와 능선 사이사이에는 벽소령 군사도로라는 구절양장의 꼬불꼬불한 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이러한 탓에 광대골은 계곡미를 음미하며 찾아나서는 등산객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대부분 비포장도로지만 비교적 잘 닦인 군사도로를 등산로 삼아 벽소령을 오르내렸을 뿐 그 아래 원시수림과 함께 어우러진 광대골의 비경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하고 외면해 왔다.
반면 광대골 가운데 삼정산에서 흘러내리는 지류방면에는 천년고찰 영원사와 상무주암 등 숱한 불적들이 많아 벽소령 군사도로 못지않은 도로가 삼정마을에서 영원사 입구까지 잘 만들어져 있는데 이 구간은 삼정산 등산로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결국 광대골은 삼정산 기슭은 불적들과 벽소령도로 등 인위적으로 조성된 일부분은 잘 알려진 반면 계곡 깊숙이 숨겨진 비경은 전인미답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베일에 가려졌던 광대골은 이제 더 이상의 신비감을 숨겨놓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
풍부한 수자원에다 울창한 원시림을 최대한 활용한 자연 휴양림을 산림청에서 조성했기 때문이다. 산림청이 굳이 광대골에다 지리산 자연 휴양림을 조성하게 된 것은 광대골의 빼어난 수림과 수자원을 간파했음은 물론 아직도 그러한 비경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산림청 남원영림서 함양관리소가 조성한 지리산 자연휴양림은 광대골 일원 142ha에다 6억여 원의 사업비를 들여 32개의 시설물을 설치했으며 삼정마을에서 2개의 연결도로망을 구축해 놓았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삼정마을의 입구에서 왼쪽으로 2개의 진입도로가 있는데 하나는 마을 못 미쳐서 계곡을 건너 이어지며 다른 하나는 마을을 돌아 연결된다. 휴양림 입구 못미친 곳에는 대규모 주차장과 야영장이 만들어졌으며 휴양림 안에는 야외학습장, 삼림욕장등의 시설물이 있다.
13. 연동골계곡
섬진강변의 화개장터에서 화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신흥마을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따라가면 범왕리 목통마을이란 곳이 있다. 물레방아 도는 지리산의 전형적인 산간마을이다.
목통마을을 휘감고 도는 물줄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가 연동골(일명 목통계곡)이다. 골짜기 안에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연동마을이 있었다고 해 연동골이라 불린다. 지금은 오히려 목통마을의 이름을 따 목통계곡으로 더 알려져 있다.
연동골은 화개재 가는 길목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그 물줄기는 화개재를 좌우로 해 두 봉우리를 타고 이어지는 두 줄기 능선에서 흐른다. 해발 1,360m의 화개재 동쪽으로는 1,533m의 토끼봉 정상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1,550m의 삼도봉이 솟아있다.
토끼봉 정상에서 흘러내린 능선은 칠불사까지 내려와 목통마을에서 꼬리를 감춘다. 이 능선을 칠불사 능선으로 부른다. 삼도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은 불무장등(1,446m), 통꼭봉(904m), 당재를 거쳐 황장산(942m)으로 이어진 뒤 화개장터가 있는 탑리까지 내려와 섬진강에 닿는다. 불무장등 능선이라 부른다. 칠불사 능선과 불무장등 능선사이의 골이 연동골이다. 물론 연동골은 화개동천의 지류에 해당된다.
화개동천은 크게 신흥마을에서 두 계곡으로 나누어지는데 왼쪽이 범왕계곡 연동골로 이어지며 오른쪽으로는 의신계곡(대성골, 빗점골, 절골, 산태골 등등)이 있다. 지리산 최대의 계곡답게 화개동천에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계곡미를 간직하고 이름까지 독립적으로 갖고 있는 지계곡이 최소한 10개에 이를 정도로 많은 지류를 거느리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지류를 형성하는 연동골은 해안지방과 내륙 산간지방을 잇는 최단거리 역할을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화개재가 지리산 능선가운데 가장 낮은 해발인 만큼 넘나드는 길목으로 유용하게 활용된 것이다. 그 화개재를 기점으로 해 연동골과 내륙의 뱀사골은 훌륭한 길목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조상들의 삶과 애환이 담겨져 있는 길이었던 셈이다.
경남과 전북의 경계지점이기도 한 화개재는 옛날부터 화개장터가 크게 번창한 탓에 그 지명이 화개재로 불렸다. 그런데 그 화개재의 지명이 지금은 이상하게도 "뱀사골 정상"이란 얼토당토않은 지명으로 등장해 있다. 이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이정표를 세우면서 오랜 옛적부터 전해져 오고 있는 화개재 대신 "뱀사골 정상"으로 표기한데서 비롯됐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지명은 나름대로의 사연과 지형지세,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 명명 돼왔던 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구태여 말도 되지 않는 지명을 만들어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국립공원 관리 공단 측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도 화개재에 가면 지리산 이정표에 뱀사골 정상, 반야봉 4km, 노고단 10km, 토끼봉 2km, 천왕봉 35km라고 표기해놓고 있다.
뱀사골 계곡의 정상이란 의미의 뱀사골 정상은 우리 어법상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모든 계곡의 끝을 계곡의 정상이라 한다면 칠선계곡이 끝나는 천왕봉 역시 칠선계곡 정상이라고 해야 한다는 논리와 다름없다는 어느 산악인의 주장을 빌지 않더라도 이는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순수한 우리말인 "재" 대신 골짜기의 정상이라 고쳐 쓴 모순을 바로 잡아야 할 때로 여겨진다. (확인이 필요한 내용)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두 지역 주민들이 오랜 옛날부터 오고 가면서 남겨진 역사와 발자취, 그리고 화개재에 얽힌 전설 등을 오늘에 다시 발굴해 전함으로써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화개재에 얽힌 설화 중 "운봉무더미"란 얘기가 있다. 운봉사람 소금장수 3대의 조상이 일흔 살 나이에 화개에서 소금을 지고 운봉으로 넘어가다 화개재에 이르러 힘에 지쳐 소금을 진채 쓰러져 죽었는데 손자가 할아버지를 그 자리에 묻고 정성을 다해 큰 묘를 만들었다 한다. 화개재 언저리의 큰 무덤을 두고 그 소금장수의 무덤이라 해 운봉무더미라 부르고 있다.
이 설화에서 보듯 화개재는 해안지방의 소금이나 수산물과 내륙지방의 삼베를 비롯한 농산물을 서로 교역했던 삶의 고갯마루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지리산에는 화개재와 비슷한 역할을 한 고갯마루가 많다. 그만큼 지리산이 광활하다는 증명 이기도하며 이에 따른 조상들의 삶의 얘기들도 다양하게 서려져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목통마을에서 출발해 연동골을 거쳐 화개재로 가는 길은 오랜 도로기능의 역사 덕분에 잘 열려 있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며 칠불사 아래의 첫 마을로 사하촌(寺下村)이기도 한 목통마을은 10여 가구가 사는 조그마한 산촌이다.
지금은 승용차가 쉽게 오를 수 있으며 물밀듯 들어오는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을 앞 계곡에는 옛정취가 물씬 풍기는 물레방아가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그리고 물레방아 와 함께 산 너머 직전마을로 넘어가는 좁다란 길을 이어주는 돌다리가 이채롭다.
여기서부터 연동골 산행은 시작된다. 물레방아와 독특한 양식의 돌다리를 살펴본 뒤 마을을 지나 잘 열려져 있는 등산로를 따라 화개재까지는 대략 8km 남짓하다. 아직은 일반 등산객에게는 덜 알려진 연동골은 아기자기한 경관과 조용한 것이 특징이다.
목통마을을 출발해 30여분 가량 오르면 연동골의 으뜸 명소인 스님소(沼)가 나온다. 칠불사 스님들이 목욕하는 곳이라 해 붙여진 지명인데 늘 옥류가 흐르며 싱그러운 분위기가 가히 세속의 때를 씻을만하다는 느낌이 간다.
계곡을 따라 한동안 가면 풀밭과 잡목지대로 변해있는 마을 터를 만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사람들이 살았던 연동마을 터다. 마을이 사라진 것은 1967년 여름 서해안으로 침투한 무장공비 9명이 지리산에 들어와 이 일대를 무대로 활약하다 모두 사살된 사건이후 연동마을이 없어지게 됐다.
연동마을 터를 지나 30여분 가량 지나면서 부터 화개재까지 급경사로 힘든 코스지만 쉽게 화개재에 오를 수 있다. 산행시간은 2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하산은 토끼봉∼칠불사, 또는 뱀사골∼반선 등 다양하게 열려 있어 시간만 잘 조절하면 어느 곳으로 하산해도 좋다. 하동지역에서 짧은 시간에 반야봉을 올랐다가 하산 할 수도 있는 등산로가 연동골 코스이기도 하다.
14. 빗점골계곡
빗점골이라는 숨은 골짜기가 있다. 지리산의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아마도 가장 깊고 깊은 곳에 숨어있는 계곡으로 짐작된다. 그 빗점골은 또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절터골과 산태골, 온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더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 놓고 있다.
"지리산의 빗점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남부군"이다. 한 시대의 획을 그을만한 빨치산의 행적이 가장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곳이 바로 빗점골이다. 남부군 사령관 이 현상이 최후를 맞이했던 곳이기에 이곳 빗점골이 갖는 한국 현대사의 의미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이른바 빗점골 회의를 갖고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되며 그리고 그 자신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곳은 빗점골의 너덜지대로 알려지고 있다. 이 너덜지대는 "합수내 흐른바위"라고도 하는데 지리산의 가장 깊은 골짜기인 빗점골이 다시 절터골과 산태골을 빚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현지 주민들은 의신마을 상단부 계곡에서부터를 빗점골로 부르고 있는데 일부는 삼정마을까지를 의신계곡으로 부른다. 의신에서 삼정까지는 3km 남짓한 거리로 비포장도로 변으로 좁은 계곡이 이어진다.
수만 여 평에 달하는 넓은 초지대를 염소방목장으로 활용하며 3가구가 살고 있는 삼정마을을 지나 비포장도로는 2km 남짓 더 계속된다. 이 도로는 벽소령까지 연결되는 작전도로를 마을 주민들이 보수, 정비한 것인데 이는 주민들이 고로쇠 수액채취와 수송을 목적으로 보수한 것이다. 아마도 머지않아 삼정에서 7km지점인 벽소령 꼭대기까지 어떤 모양이던 도로가 정비될 것만 같다.
이미 삼정마을에서 방목하는 염소무리들은 벽소령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며 그 활동 영역을 넓혀 놓고 있는 상태이고 보면 머지않아 차량까지 오르리란 추측은 어렵지 않다. 더욱이 산 너머 마천면 삼정에서는 등산객들을 상태로 지프형 택시가 10만원을 받고 벽소령 꼭대기까지 영업하고 있는 사실은 하동지역 역시 곧 인위적으로 보수될 것임을 예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삼정에서 조금 지나면 차량의 진입이 더 이상 불가능하고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는데 차가 언제든지 몇 대씩 세워져 있다. 이 주차장 조금 못 미쳐 계곡과 도로 사이가 꽤 넓은 곳이 있는데 사람이 살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이곳이 바로 옛날 빗점마을이다. 빗점마을은 한때 지리산 화개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으나 지금은 모두 이주하고 집터만 남아 있다. 전란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면서 당국이 삼정 또는 의신마을로 집단 이주시켰다 한다.
빗점골은 빗점마을 위 주차장에서부터 본격 산행을 시작 할 수 있다.
15. 단천골 계곡
지리산 화개동천 깊숙이 감춰진 곳에 단천골이 있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무대로 등장하기도 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장터로 전해지고 있는 화개장터에서 섬진강과 합류하는 화개 동천은 지리산 줄기에서 장장 50여리에 걸쳐 흐른다. 그 화개천 속에는 크고 작은 골짜기들이 수도 없이 많다.
신흥 마을에서 크게 둘로 나누어지는 화개 동천은 동쪽으로는 촛대봉과 영신봉 칠성봉 덕평봉 형제봉 그리고 삼신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하나로 모여 내려온다. 서쪽으로는 토끼봉과 불무장등 능선의 물줄기가 범왕골을 타고 내려와 신흥에서 모인다.
신흥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선유동천 단천계곡 대성계곡 빗점골 등을 거느리고 있다. 그 가운데 단천계곡은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선유동 계곡과 영험이 깃들여 있다는 대성계곡 사이에 있다. 인접한 두 계곡과 함께 단천골은 남부능선에서 서북 방향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특히 단천골은 남부능선상의 박단샘과 삼신봉 사이에서 발원해 지계곡 이라기보다는 독립된 계곡과 같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단천골은 그러나 화개동천의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이렇다 할 특징을 보이지 않고 평범한 지리산 계곡중의 하나로 조용히 남아있다. 하물며 지도를 펴놓고 보아도 인접한 선유동, 대성계곡 등은 등산로와 함께 표기돼 있으나 단천골은 단천마을 이외의 표기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만큼 단천계곡은 지리산 계곡 가운데 일반에 덜 알려진 무명계곡으로 남아 오래도록 등산객들의 발길도 뜸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천계곡을 따라 등산을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요즈음엔 교통의 발달과 등산 인구의 급증에 힘입어 이 계곡을 찾는 등산객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는 평범하면서도 찾아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고 매력이 넘치는 계곡의 정겨움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선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찾아 나섰던 화개동천 어느 언저리에 있을 것으로 여겼던 청학동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을 만큼 살기 좋은 느낌이 드는 곳이 이 계곡의 입구 단천마을 이다.
단천골 가는 길은 화개천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 고운 최치운의 숱한 행적이 남아 있는 신흥마을에서 잘 포장된 오른쪽 도로를 따라 국립공원 간이 매표소를 지나 선유동 계곡 입구를 거쳐 단천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단천골 입구가 나타난다.
급커브 포장도로를 돌아서면 곧장 오른편에 콘크리트 도로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2km 남짓 차량을 이용해 오르면 광활한 계곡과 함께 단천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병목처럼 좁다란 계곡 안에 비교적 넓은 농경지를 끼고 남향으로 위치해 있는 마을 풍경이 그저 정겹고 풍성하다.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이렇게 큰 마을이 숨어 있으리란 생각은 쉽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해 보인다. 단천교에서 시작되는 단천계곡은 다시 단천마을 입구에서 도로와 만난다. 계단식 논과 개간한 밭, 그리고 우리네 전형적인 농촌마을을 연상케 하는 죽림이 어우러져 이곳이 바로 청학동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
20여 가구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따사로운 해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리산에서 보기 드물게 포근함을 느끼게 만드는 마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계곡 언저리의 비교적 넓은 면적의 농경지와 산비탈을 이용해 벼농사와 가축사육, 송이와 산채를 채취하고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을 상대로 민박을 해주면서 삶을 영위해가고 있다. 예전에는 숯도 구워 화개장터에 내다팔기도 했으며 산 너머 덕산까지 이어지는 길목에서 오가는 길손을 위한 주막역할도 했으리란 짐작은 쉽게 간다. 단천골은 예부터 산청 덕산방면으로 가는 삶의 고갯마루 입구 역할을 했다한다.
산을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있으면서도 화개에서 덕산을 가려면 멀리 진주를 거쳐야 했던 탓에 단천골을 따라 삼신봉에 올라 거림골로 내려가 덕산장으로 가는 길은 우리네 선조들의 애환이 깃들여 있다. 단천골에는 그래서 계곡 곳곳에 집터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단천마을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는 마을 오른쪽 대밭을 따라 이어진다. 마을을 지나면 노송과 기암이 우뚝 선 쉼터가 나오는데 단천교에서 시작되는 계곡은 벌써 3km남짓 지난 위치다. 2km는 차편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곳 쉼터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널따란 계단식 논과 그 사이로 흐르는 계곡미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멀리 남부능선의 스카이라인을 올려보며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금방 계곡과 만난다. 단천계곡에는 지도상에 표기될 만큼 명소가 많은데 그 첫 번째가 단천교를 조금 지나 도깨비소가 있으며 단천마을에 이르기까지 독아지소, 종개지소 등 이름까지 특이한 소가 즐비하다. 이들 명소는 그러나 등산로와 떨어져 있어 찾아보기 위해서는 단천교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16. 거림계곡
거림계곡은 세석고원의 남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흘러내린다. 촛대봉과 영신봉 두 봉우리 사이로 광활한 고원지대를 형성하는 이 고산대의 세석과 남부능선 사이로 아기자기한 골을 만들며 거림마을까지 이어진 계곡이다. 촛대봉과 연하봉 사이에서 만들어진 도장골과 거림마을에서 합류한 거림계곡은 변해 8km아래 곡점까지 계속된다.
거림계곡은 깊은 물줄기와 울창한 원시림을 따라 세석고원까지8km 가량 계속되면서 중간 중간 남부능선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받아들인다. 거대한 수림으로 뒤덮인 골이란 뜻의 거림계곡은 세석고원으로 가는 길 가운데 가장 가까운 길이다.
거림마을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를 따라 8km 3시간가량 걸으면 철쭉이 장관을 이루며 만발해 있는 세석에 도달한다.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에서 시작되는 한신계곡 루트의 10 km의 거리보다 가까운 데다 등반로도 완만해 철쭉시즌이 되면 거림계곡은 수많은 등산객들로 붐빈다.
등산로 입구 마을의 어지러운 현실과는 달리 등산로에 들어서면 억만 겁의 세월을 두고 보내온 수림과 계곡의 청류는 모든 일들을 망각케 해준다. 계곡을 건너면 등산로를 가운데 두고 들어선 음식점 집 뒤 편에서부터 본격적인 등산로가 나온다.
5월말까지 통행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문구와 함께 등산로는 철조망으로 폐쇄돼 있지만 누구든 이를 개의치 않고 왼편 계곡을 이용 등산로를 잘도 찾아 오르고 있을게 현실이다. 형식적인 산화예방조치임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등산로가 시작되자마자 노송과 어우러진 신선바위가 반긴다. 그 옛날 고운 최치원선생이 넘나들면서 시한수를 읊었을 법한 풍류와 운치가 있는 곳이다. 계곡 건너편에는 빼어난 경관을 방증하듯 굿당이 있어 거의 매일 치성객들이 밀려와 굿판을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등산로는 싱그러운 녹음과 함께 호젓한 오솔길처럼 이어지며 길을 따라 계속되는 계곡에선 녹음을 찬탄하듯 우렁찬 목소리가 한 편의 장엄한 교향곡처럼 들려온다.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에 취해 등산로를 따라 걷다보면 표고 "850m, 세석 5.5km, 거림2.5km" 지점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그리고 한쪽에는 "통행금지"표시를 해 놓았다. 이 곳 통행금지 표시의 길이 바로 남부능선으로 연결 되는 "자빠진 골"을 따라 한벗샘으로 가는 등산로다. 세석과 삼신봉을 잇는 남부 능선의 중간지점에 해당되는 한벗샘까지 이곳에서 갈 수 있다.
거림에서 세석으로 곧장 가는 것보다 거림계곡으로 가다가 남부 능선을 일부 걸어 음양수샘을 거쳐 세석으로 가는 코스도 색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다. 거림계곡의 단조로움을 해소할 수 있는 등산로나 이용객은 드물다.
거림 세석간 등산 코스의 묘미를 더할 수 있는 부분에서 오른편 계곡을 따라 깊숙한 수림을 따라 가다 보면 다소 험난하고 희미한 산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암층이 시작되는 시루봉이 나온다. 시루봉에서 왼편으로 보면 세석고원의 광활함을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아기자기한 암층을 따라 붉게 물든 철쭉을 보며 촛대봉에 이를 수 있다. 촛대봉에서 바라보이는 세석의 묘미는 사뭇 대자연의 신비가 느껴지는 듯하다.
17. 도장골 계곡
5월의 철쭉 향연이 베풀어지는 세석가는 길목, 거림마을에서 오른편으로 인적 드문 길로 접어들면 도장골이 나온다. 촛대봉과 멀리 연하봉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크고 작은 골을 이뤄한데 모여 거림마을까지 이어지는 계곡이다. 지리산 억겁의 신비가 담겨있는 듯 한 골짜기로 알려져 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웅장함의 계곡미를 자랑하며 일반의 발길을 좀처럼 용납치 않고 비경을 간직한 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물론 지리산 대다수 계곡이 그러하듯 이곡 도장골 역시 등산인구가 급증하면서 차츰 차츰 사람들의 발길에 멍들어 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여름철 피서인파들은 이미 도장골 입구인 밀금폭포까지 진입, 천하제일의 피서지임을 찬탄하며 이곳을 찾은 현명함을 자랑삼아 늘어놓고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니 머지않아 다른 모습으로 둔갑할 것은 명백한 현실이다.
도장골은 거림마을 주민들이 식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놓고 있어 마을주민들은 등산객들이 이골을 오르는 광경을 매우 싫어하고 있다. 주민들은 지리산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이골만큼은 자연 그대로 남아있기를 원하며 갖가지 경고성 문구를 등산로어귀에 내걸어놓고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조치 덕분에 그동안 잘 보전돼 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갈수록 줄을 잇는 등산객들의 무차별적인 입산은 마을 주민들의 소극적인 보존 책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으니 도장골의 운명도 여느 계곡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을주민들이 자신들의 식수원인 도장골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소극적으로 일관할 경우 도장골도 이제 더 이상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남기 힘든 지경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을주민들이 등산로를 개방해 놓고도 말로만 출입통제를 외칠 뿐 특별한 제한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다 국립공원 관리공단 역시 분명한 입장 정리를 해주지 않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실제 도장골을 가려면 거림마을에서 왼쪽 거림계곡으로 가는 것 못지않게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것은 물론 가는 길도 잘 만들어져 있어 한번 가본 사람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며 다른 동료들까지 동행해 오고 있다. 도장골의 묘미가 다른 어느 골짜기보다 더 압도적임을 쉽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는 길은 누구든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와룡폭포까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편이다.
계곡 초입부터 거대한 수량의 밀금폭포가 버티고 있으며 용소, 윗용소를 지나다 보면 반들반들한 반석들이 푸른 녹음과 어우러져 청량감을 맛볼 수 있다. 두어 시간 가량 오르면 깊은 계곡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높이의 폭포수를 맞이할 수 있다. 이 폭포는 와룡폭포라 한다.
대다수 등반객들이 주로 거림마을에서 와룡폭포 구간까지 산책정도로 등반하고 하산하고 있다. 이곳부터 다소 험난한 등산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와룡폭포에서는 촛대봉으로 올라 세석펑전까지 갈 수 있으며 멀리 연하봉까지 오를 수 있으나 연하봉으로 가는 길은 거의 찾는 이가 없다. 전문 등반가들이 가끔 연하봉으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서지만 쉽지는 않다. 촛대봉으로 가는 길은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쯤 시도할 만한 등산코스다.
18. 구룡계곡
구룡계곡은 용호구곡 또는 구룡폭포 라고도 한다. 이처럼 이름을 달리 하는 것은 옛날 음력 4월 8일이면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 군데 폭포에서 한 마리씩 자리 잡아 노닐다가 다시 승천했다는 전설 때문이다.
용호구곡을 곡별로 소개하면
제1곡 : 주천쪽 지리산 국립공원 매표소에 조금 못 미치고 있는 송력동폭포를 1곡이라 하며, 이곳을 흔히 약수터로 불린다.
제2곡 : 매표소를 조금 오르면 높이 5m의 암벽에 이삼만이 썼다는 용호석문 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는 절벽아래 흰 바위로 둘러싸인 못이 2곡으로 불영추라 한다.
제3곡 : 육모정에서 300m 지점에 있는 황학산 북쪽에 암석층이 있는데 이 암벽 서쪽에 조대암이 있다. 이 조대암 밑에 조그마한 소가 바로 4곡인데, 학들이 이곳에서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해서 학서암이라 한다.
제4곡 : 학서암에서 300m쯤 오르면 유난히도 흰 바위가 물에 닳고 깎여 반들거리고, 구시처럼 바위가 물살에 패여 있다. 또 거대한 바위가 물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가 하면 건너편 작은 바위는 중이 꿇어 앉아 독경하는 모습 같다 하여 서암이라고 하며, 일명 구시소로 더 알려져 있다.
제5곡 : 구시소에서 1km지점에 45도 급경사를 이룬 암반을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곳에 깊은 못이 5곡인 유선대이다. 유선대 가운데에 바위가 있는데 금이 많이 그어져있기 때문에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 신선들이 속세의 인간들에게 띄지 않기 위해서 병풍을 치고 놀았다 하여 은선병 이라고도 한다.
제6곡 : 유선대로부터 500-600m쯤 거리에 구룡산과 그 밖의 여러 갈래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계곡 물이 여기에서 모두 합류한다. 그 둘레에 여러 봉우리가 있는데 제일 뾰족한 봉우리가 계곡물을 내지르는 듯 하여 그 봉우리 이름을 지주대라 하고, 이곳을 6곡이라 한다.
제7곡 : 지주대로부터 왼쪽으로 꺾이면서 북쪽으로 1km 지점에 거의 90도 깎아지른 듯 한 문암이라는 암석층이 있는데, 이에 속한 산이 반월봉이고 여기서 흘러내린 물은 층층암벽을 타고 포말려 비폭동이라 하며 이를 7곡이라 한다.
제8곡 : 비폭동에서 600m쯤 올라가면 거대한 암석층이 계곡을 가로질러 물 가운데 우뚝 서 있고, 바위 가운데가 대문처럼 뚫려 물이 그 곳을 통과한다 해서 석문추라 하는데, 바로 이곳이 8곡이다. 경천벽이라고도 부른다.
제9곡 : 경천벽에서 500m 상류 골짜기 양편의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있다. 멀리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두 갈래 폭포를 이루고, 폭포 밑에 각각 조그마한 못을 이루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용 두 마리가 어울렸다가 양쪽 못 하나씩을 차지하고 물속에 잠겨 구름이 일면 다시 나타나 서로 꿈틀 거린 듯 하므로 교룡담이라 하고, 이곳이 바로 9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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