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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한라산

산행일 : 2006년 1월 14일(토)

 

새벽 6시. 주방에서 딸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다. 제주도 여정 둘째 날이 시작된다.
플러스님이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며 정성껏 준비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달빛님은 점심에 먹을 김밥을 준비하고 투덜이님은 설거지를 하는 사이 보온병에 따뜻한 물을 채우고 간식거리와 김밥을 배낭에 챙겨 넣는다.

 

7시 40분, 처로님의 애마를 타고 숙소를 떠나 제주시에서 한라산 동쪽 허리를 가로질러 서귀포를 잇는, 총연장 43km의 5·16도로(한라산  제1횡단도로)를 따라 50분 이동하여 성판악휴게소에 도착한다. 주차장은 넘쳐나는 차량으로 빈 공간이 없어 길가에 주차하고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며 산행준비를 한다.

 

한라산으로 오르는 성판악 코스는 5·16도로의 최고점인 해발 750m에서 시작된다. 성판악(城板岳)은 남서쪽 인근에 있는 성널오름에서 유래되었다. 특히 수직절벽이 병풍처럼 약 500m 정도 둘러쳐진 모양이 마치 '나무판자로 성을 둘러친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8시 40분. 화장실에 다녀와서 매표소 앞에서 사람 키보다도 높게 쌓인 하얀 눈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줄줄이 이어지는 행렬을 따라 매표소를 지나 평탄한 등산로를 따라 숲 속으로 들어선다.

 

오전 9시 30분 이후엔 입장을 통제를 하고 정상에서도 12시 30분 이후엔 모두 하산을 해야한다. 등산로에 깔린 하얀 눈은 마치 솜이불 같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설경으로 눈이 부시다. 사람들은 한라산을 두고 신의 정원이라 부른다. 계절마다 색깔이 다르고 생태가 다르고, 계곡마다 전설이 서려 있는, 그래서 사람들은 한라산을 동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정상을 향해 다가설 수 있는 여유. 가파른 길에서는 땀을 흘려서 좋고 평탄한 길에서는 잰걸음으로 달려갈 수 있어 좋은 길. 산행은 자신을 거듭나게 만든다.

 

마치 봄날처럼 화창하고 덥기까지 한 날씨 때문에 얼마가지 않아 재킷을 벗어 배낭에 매달고 서어나무 등 활엽수가 우거진 길을 따라 50분쯤 진행하여 속밭에 이른다. 진달래밭 대피소 3.5km 이정표가 보이고 완만한 오름길이 이어진다.

 

속밭을 지나 40분 정도 걸어가니 사라무인대피소가 눈에 파묻혀 지붕만 드러내고 지붕 위에는 2m 가까운 눈이 쌓여있다.

 

뒤돌아보니 멀리 하얀 눈이 산을 덮고 있는 사라오름이 인상적이다. 제주도의 330여 기생 화산 가운데 정상에 화구호가 있는 오름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사라오름 분화구는 예로부터 제주 제일의 명당자리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진달래밭대피소 0.7km이정표를 지나면서 길은 조금씩 가팔라진다. 가파른 길을 10여분 오르면 시야가 열리면서 해발 1,500m고지에 다다른다. 고도가 높아갈수록 구상나무와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이곳에서 만난 구상나무와 좀고채목 등이 눈 속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계절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의 신비를 안겨주는 나무들의 모습이 우직하게 느껴진다. 어떤 구상나무는 이미 고사목으로 둔갑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구상나무는 잎끝이 두 갈래이며 솔방울이 열리고 잎 뒷면은 은빛이다. 반면 주목은 잎끝이 뾰족하고 빨간 열매가 열린다.

 

곧바로 진달래밭 대피소 도착하여 여정을 푼다. 진달래 같은 키가 작은 나무들은 아예 눈 속에 묻혀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구상나무도 눈 때문에 뭉툭해졌다.

 

등산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대피소에서는 컵라면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선다. 김밥과 컵라면으로 30분간의 점심식사를 마치고 따끈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커피향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행복감이 밀려온다.

 

11시 50분.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진달래 밭에서 백록담까지는 2.3km 보통걸음으로 1시간 30분 소요. 정상인 백록담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낮 12시까지 진달래 밭에 도착해야 한다. 진달래밭 대피소부터는 오르막길을 걷게 되는데 양쪽으로 전나무가 즐비하고 바위들이 뒤엉켜있다.

 

많은 등산객들로 정체되어 시간이 지체된다. 눈밭에선 모두 아이가 되는 모양이다. 연인도, 아주머니도, 아저씨도 환호성을 터뜨린다. 우리 일행도 걸음을 멈추고 눈밭에 누워 잠시 여유를 부린다.

 

진달래밭대피소를 떠난 지 1시간. 정상 1km 이정표를 지나자 정상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한라산을 멀리서 보면 동그란 산정에서부터 해안지방까지 납작한 접시 아니면 방패를 엎어놓은 것 같으니, 곧 방패 순(楯)자를 쓴 순상화산(楯狀火山)이다. 해발 1750m부터 정상까지 0.8km 올라가는 길은 성판악 등산코스 중에서 제일 가파른 길이다.

 

해발 1800m 지점부터는 나무계단이고 광활한 설원이다. 거기선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세상 천지가 온통 백설이니 머리 속까지 하해지는 느낌이다. 해발 1900m 돌 표지석을 지나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마지막 오르막길은 차라리 이국적인 멋을 풍기고 있어 낭만적이다.

 

 

 

3-4분 정도 진행하여 드디어 한라산 동릉 정상에 도착한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환상의 섬 제주도, 이 섬의 한 가운데 1,950m의 높이로 우뚝 솟은  한라산(漢拏山)이 있다. 능히 은하수를 잡아당길(雲漢可拏引也)만큼 높은 산이란 뜻을 가진 이 산은 예부터 신선들이 산다고 해서 영주산(瀛州山)이라 불리기도 했고 금강산(金剛山) 지리산(智異山)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정상 한 가운데 푹 패인 분화구 안은 흰 눈이 덮여있다. 백록담이다. 백록담은 원래 흰 사슴이 뛰놀며 분화구내의 물을 먹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 사냥꾼이 뛰노는 사슴을 잡기 위해 활을 쏜다는 것이 그만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맞추자 화가 난 옥황상제가 한라산 정상을 뽑아 들어 사냥꾼에게 던졌고, 그 뽑힌 자리가 백록담이 되었으며 던진 것이 산방산이 되었다고 한다.

 

 

한라산 동릉 정상 표지목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관음사지구를 향해 발길을 내딛는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자 서서히 한라산 최고봉인 부악의 외벽이 기괴하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오래 전 스위스 여행에서 오른 알프스의 융프라우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산길로 들어선 지 30분. 왕관릉에 도착한다. 삼각봉에서 보면 왕관 모양의 바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

 

'살아 백년 죽어 천년 산다'는 고사목과 고채목 등 이국적인 나무들이 신비경에 빠지게 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간식을 나누며 휴식을 취한다. 등산객들이 던져주는 먹이에 길들여진 까마귀들이 떼지어 주변을 맴돈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서 용진각 무인대피소에 도착한다. 용진각에는 갑자기 비가 내려 급류가 생길 우려가 있는 곳이어서 무인대피소가 있다.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거리는 짧지만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다.

 

용진각은 삼각봉과 왕관릉 사이의 움푹 꺼진 골짜기를 일컫는 것인데, 예전에 용진굴이라고도 불렸다. 굴이라고 해서 동굴이 있는 것은 아니고 주위가 높은 언덕에 둘러싸여 신비스런 기운이 서려 있는 동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용진각의 동북쪽 언덕은 장구목이라는 고원평지이다. 왕관릉에서 바라보면 영락없는 장고 모양을 하고 있다. 이 곳에 1977년 세계 최고봉 초모룽마(티베트어로 세계의 어머니 여신이라는 뜻. 에베레스트, 8848m)를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올랐으나, 2년 뒤 북아메리카의 최고봉 데날리(일명 메킨리, 6194m)에서 운명을 달리한 제주출신 산악인 고상돈씨를 기리는 케른(돌무덤)이 있다고 한다.

 

갑자기 사야가 밝아진 느낌을 받아 정신을 차려보니 왕관릉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벗어놓은 선글라스를 그대로 두고 온 것이다. 오랫동안 정이 들었던 때문인지 허전하다. 

 

용진각대피소에서 20분 정도 내려서면 삼각봉을 만나고 곧바로 개미목을 지나 개미등이 시작된다. 두 골짜기 사이에 툭 튀어나온 모양이 개미의 등 같아서 그런 명칭이 붙은 것이라고 한다.

 

16시 정각. 탐라계곡대피소에 도착한다. 이곳 역시 폭우로 인한 기상악화시 계곡물이 갑자기 불어났을 때를 대비해서 지어놓은 무인대피소이다.

 

한라산 계곡 중 가장 길다는 탐라계곡을 끼고 계속해서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약간 위험하다. 계곡이 깊을수록 마음도 깊어진다더니, 겨울 산의 계곡은 인기척이 없다. 동물들도 겨울잠을 자기 때문이 아닐까.

 

탐라대피소에서 20여분 지나면 흰눈을 뒤집어쓰고 무덤처럼 보이는 숯가마 터는 안내판만이 이곳이 한라산 참나무로 숯을 만들던 숯가마 터임을 알려준다.

 

다시 10분을 더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구린굴 표지판이 보인다. 구린굴은 용암동굴로 한라산 화산폭발 당시 백록담 분화구로부터 흘러나온 용암에 의해 형성된 동굴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만이 갖고 있는 소중한 자원이라고 한다. 등산로를 계속 따르면 구린굴 나오는 구멍과 다시 만난다. 관음사지구 1.5km 이정표.

 

탐라대피소를 출발한지 1시간이 지나서 관음사코스 등산기점인 넓은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은 끝이 난다. 5.16도로(제1횡단도로)와 1100도로(제2횡단도로)를 잇는 제1산록도로 변에 있는 관음사코스는 코스 명칭이 관음사라해서 절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고, 등산로 입구에서 동쪽으로 약 1.2km지점에 관음사란 사찰이 있기 때문 관음사코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차를 회수하기 위해 처로님과 투덜이님은 택시를 합승하여 성판악으로 향하고 나머지 일행은 관음사 휴게소에서 따끈한 어묵을 안주 삼아 좁쌀막걸리 한 병으로 갈증과 허기를 속인다.

 

처로님이 도착하고 탑동 수산물시장에 들려 홍삼(제주도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붉은 해삼)과 싱싱한 낙지는 토막내고, 방어는 회를 뜨고 머리는 매운탕을 위해 야채와 함께 준비하여 모두들 뿌듯한 마음으로 숙소로 향한다.

 

술잔이 오고가며 함께 나누는 삶의 얘기에는 쉬 흘려버리지 못하는 끈적끈적한 휴머니즘이 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르고 조금씩 조금씩 삶의 편린들이 서로의 가슴 턱을 넘나들기도 한다. 살갑기만 시간들이다.

 

입맛을 사로잡은 환상적인 매운탕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감기 기운이 있는 처로님은 숙소에서 쉬시기로 하고 나머지 일행은 제주여행의 마지막 밤의 끝을 잡기 위해 노래방으로 향한다.

 

신나는 댄스곡에서부터 애잔한 발라드곡까지 1시간 30분 동안 이어진 플러스님의 리사이틀은 모두를 즐겁게 했다. 숙소로 돌아와 씻는 둥 마는 둥하고 새벽 1시가 넘어 자리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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