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에게 등정(登頂)의 욕심은 강렬한 것이지만 산은 늘 그 자리에 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올라갈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
이번에 실패하면 원정 경비를 벌어 다시 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설령 못 올라간들 어떤가. 산 정상에 올라간다고 인생이 바뀐 적이 있었는가.
꼭 정상을 밟아야겠다는 욕심이 화를 불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는가.”
--넘버3 산악인 한왕용씨 글--
여유롭게 걷는 산행도 즐겁지만 갖고 있는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붓는 극한 상황에의 도전도 생활의 희열과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묘약이다.
호남정맥 2구간 :
토끼재 - �비산 - 갈미봉 - 헬기장 (512.3m봉) - 매봉 - 1030m봉 - 백운산 - 한재 - 논실 마을.
호남정맥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전라도 땅을 지난다. 전주와 나주의 합성 지명인 전라도의 또 다른 이름이 호남(湖南)인데, 이는 호강(湖江 : 금강의 옛 이름)남쪽에 있는 지방이라는 뜻이다. 또 삼한시대 만들어진 김제 벽골제의 남쪽에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새벽 3시 50분. 그리매님의 전화소리에 눈을 뜬다. 허둥지둥 배낭을 챙겨들고 승차하기로 약속한 장소로 뛰어간다. 버스에 오르니 여기저기서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는데 몸둘 바를 모르겠다.
4시 20분. 18명의 산꾼들을 태운 버스는 유성나들목으로 진입하여 잠시 후 대진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전조등으로 어두움을 밀어내며 거침없이 달린다. 차내가 고요해지고 모두들 단잠에 빠져든다. 기사 아저씨의 안내방송에 눈을 뜨니 버스는 호남남해고속도로 섬진강휴게소로 들어서고 시계는 6시 35분을 가리키고 있다.
섬진강 휴게소 오른편에 화합을 상징하는 조형물인 돌탑이 보이고 그 뒤로 25m 높이의 기념탑이 우뚝 솟아있다. 이 탑은 1973년 11월 1일 호남남해고속도로 준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호남과 영남의 중간지점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승전 유적지인 이곳에 조국 번영의 상징으로 승리의 여신상과 함께 세워진 것이다. 육교를 통해 반대쪽 휴게소로 건너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40분 동안의 아침식사와 휴식을 끝내고 3-4분간 진행하여 진월나들목을 빠져나간다. 곧바로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진월방향으로 향하다가 신소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2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향으로 향한다. 버스가 힘겹게 산길을 오르다보면 왼쪽으로 규모가 큰 수어저수지가 시원하게 보인다.
7시 45분 진상면-다압면을 잇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토끼재에 도착하여 간단하게 산행 준비를 마치고 단체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산행을 시작한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15분 정도 오르자 약간 전망이 트이는 330봉에 닿는다. 잠시 거치러진 호흡을 고른다. 길 왼쪽으로 목장용으로 생각되는 철조망이 쳐져있고 평탄하고 부드러운 길이 이어진다. 소나무 숲 속 나무사이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산행을 시작한지 50분. 쫓비산(536.5m)에 도착한다. 삼각점이 엉성하게 박혀 있고 조망은 거의 없으며 쉴만한 공터도 없는 좁은 공간이다. 쫓비산은 쪽빛으로 물든 섬진강 푸른물에 비친 봉우리를 쪽빛봉으로 부르다가 자연스럽게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9시 20분. 전망이 트이면서 갈미봉이 눈에 보이는 조망 좋은 바위 쉼터에서 휴식을 취한다. 왼쪽으로 억불봉이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고 오른편엔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의 푸른 물결과 백사장의 모습이 뿌연 시야에 들어온다. 하동 읍내를 감도는 강물이 여유롭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후미 일행이 도착하고 여기저기 배낭에서 꺼내 놓은 간식을 나누며 휴식을 취한다. 10분 정도 휴식을 마치고 길을 이어간다. 정맥길은 왼쪽으로 확 꺾이어 내려선다. 5월의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부드러운 숲 속 오솔길에 새소리가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무덥지 않은 날씨도 산행속도를 빠르게 한다.
낙엽 쌓인 참나무 숲길을 올라가자 옛 참호인 듯 움푹 패인 공터에 잡초가 무성한 곳이 나타난다. 조망바위에서 20분 정도 지나 갈미봉(해발 530m)에 도착한다. 나뭇가지에 조그만 갈미봉 표지판이 보이고 사방이 나무에 가려 조망은 없으며 답답하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6-7분 정도 내려서고 이어지는 평탄한길을 지루하게 걷는다.
갈미봉을 떠난 지 20분. 천황재에 닿는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5-6분 정도 숨가쁘게 치고 오르자 511봉에 닿는다. 삼각점이 박혀있고 넓은 헬기장이다. 불쑥 솟아오른 매봉이 어서오라 손짓하고 지나온 갈미봉도 잘 보인다.
그늘에 자리잡고 간식을 나누며 휴식을 취한다. 헬기장을 가로질러 왼쪽 숲길로 들어선다. 완만한 내림길이 뚝 떨어졌다가 급경사로 바뀌면서 510봉을 넘는다. 다시 뚝 떨어졌다가 완만한 오르막길은 점점 고도를 높이면서 가팔라진다. 한발한발 천천히 15분 정도 오르자 삼거리 갈림길이다. 양쪽으로 모두 표지리본이 많이 붙어있다. 지도를 꺼내 확인해보니 정맥길은 왼쪽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선 바람소리님과 한솔님이 알바를 했다고 한다. 걸음을 멈추고 물 한 모금으로 거치러진 호흡을 가다듬고 매봉을 향해 급경사 오르막길을 계속 치고 오른다.
11시 50분. 토끼재를 출발한지 4시간이 지나서 매봉에 도착한다. 매봉은 헬기장으로 85년에 재설한 삼각점이 박혀있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고 연릉을 따라 백운산까지 한 눈에 조망된다. 매봉을 내려서자 나무 그늘에서 점심식사를 위해 자리를 잡고 휴식중인 선두일행이 보인다. 후미일행이 도착하고 점심식사가 끝날 때쯤 알바를 했던 두 사람이 도착한다.
한 시간 동안의 점심식사와 휴식을 마치고 길을 재촉한다. 몇 걸음 옮기자 50여평의 넓은 공터에 헬기장이 나타난다. 백운산이 보이는 오른쪽으로 길을 잡고 7-8분 내려선다. 왼쪽 내회마을쪽에 많이 걸려있는 표지리본은 탈출 코스인지 아니면 지름길인지 이해가 안가나 백운산 방향은 오른쪽이므로 표지리본을 매달고 진행한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10여분 오르자 첫 번째 헬기장이 나타난다. 다시 20분 정도 진행하자 두 번째 헬기장에 도착한다. 햇빛을 피해 그늘로 내려서서 휴식을 취한다. 천사님이 건네는 얼린 요거트가 꿀맛이다. 10분간의 달콤한 휴식을 끝내고 오르막길을 계속 치고 오른다.
세 번째 헬기장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암릉길을 타고 오르니 백운상 정상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2시 15분. 백운산에 도착한다.
커다란 암봉에는 "백운산상봉"이라 적힌 표지석이 있고 막힌 데 없이 사방으로 전망이 트이면서 시원한 조망을 선사한다. 맑은 날에는 조망이 뛰어나 지리산 주릉을 볼 수 있지만 오늘은 뿌연 날씨 탓에 지리산을 볼 수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대신 멀리 억불봉이 또 다른 모습으로 보이고 억불봉까지 이어지는 능선 초록이 아름답다.
매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그 아래 갈미봉에서 쫓비산으로 이어지는 지나온 능선이 참으로 많이도 걸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백운산은 봉황, 돼지, 여우의 세가지 신령한 기운을 간직한 영산 이란다. 봉황의 정기는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자 초계 최씨 시조 최산두(崔山斗.1483-?)가 받았고, 여우의 정기는 몽고의 지배를 받던 고려조 때 월애라는 처녀가 받았다. 나머지 돼지의 정기만은 아직 받은 이가 없다고 한다. 선두로 치고 나간 신샘님과 장총님은 벌써 신선대 위에서 손짓한다.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암릉을 타고 안부로 내려서자 편안함님이 배낭에서 꺼내 놓은 수박화채에 모두들 환호성을 지른다. 이 무거운 것을 이곳까지 가지고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덕분에 모두들 1200m가 넘는 백운산 정상에서 시원한 수박화채를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갖는다.
2시 40분. 신선대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몇 개의 조그만 암릉을 지나 10분 정도 진행하자 신선대 이정표(↑한재 2.2km,↓정상 0.5km,←진틀 3.2km)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커다란 바위 암봉으로 표지리본이 보인다.
신선대로 오르는 길이다. 철계단을 올라서니 우리나라의 수많은 같은 이름의 백운산 중에서도 대표격인 이 백운산의 당당하고 웅장한 산세며 풍모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을 신선대라고 명칭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서둘러 신선대를 떠난다. 갈림길에서 한재 이정표를 따라 진행한다.
3시 20분. 헬기장을 지나고 3분 후 다시 헬기장을 지나면서 지루한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곤두박질 치듯 내려가자 장송 군락 아래로 한재 표지판과 이정표(표고860m, 백운산2.7km, 다압하천 8km)가 보인다.
3시 40분. 한재(860m)에 도착한다. 고도가 높고 북향으로 되어 있어 추위가 심하다 하여 추운 고개란 뜻에서 한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왼쪽 논실마을까지는 2.3km 이 구간은 서울대학교에서 학술 연구를 위해 산림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차량통행이 통제된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터벅터벅 내려간다.
16시 정각. 송어장 주차장에 도착하면서 산행은 완료된다. 시원한 계곡물에 땀과 먼지를 털어 내고 뒤풀이를 위해 외망포구로 향한다. 바다횟집에서 저녁식사를 겸한 뒤풀이를 마치고 대전으로 향한다.
솔솔님이 아들(명석고 2학년 양호)의 장학퀴즈 월장원을 기념하여 한턱 쏜 캔 맥주와 장총님이 사서 돌린 아이스크림까지 호남정맥 2구간 산행은 다음 구간을 기약하며 넉넉하고 여유로운 추억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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