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두대간 조각맞추기

17. 매요리-봉화산-중재

백두대간 조각 맞추기를 위해 배낭을 꾸린다. 눈앞에 보이는 삶을 지배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다시 새로운 짐을 진다. 山은 삶에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대진고속도로를 힘차게 달린 산악회 버스는 9시 15분 장수톨게이트를 빠져나가 13번과 16번 국도를 타고 가다 다시 19번 국도로 갈아타고 진행한다. 번암면 소재지를 지난다. 9시 45분 대룬삼거리에서 왼쪽 농로를 타고 유정리방면으로 향한다.


10시 정각 매요마을 회관 앞에서 하차하여 간단하게 산행 준비를 하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들머리로 이동한다. 매요리는 임진왜란 때 사명당이 지어주었다는 마을 이름. 대간길은 마을을 반쪽으로 가른다. 왼쪽으로 매요교회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폐교된 학교가 흉물로 방치되어 있다. 아스팔트 포장도로(19번 국도)를 따라 5-6분 정도 진행하자 ‘여원재 10.3km 복성이재 9.6km’라고 적힌 이정표가 서 있는 유치삼거리(해발 420m)에 닿는다. 왼쪽은 번암을 지나 장수로 가는 19번 국도이고 오른쪽은 인월·함양으로 향하는 24번 국도가 갈리는 지점에 목공소(유정리목공예특산단지-신흥공예사)가 있다. 대간은 공예사를 좌측에 끼고 돌아 공예사 우측 뒤 묘지 쪽으로 접어들어 능선을 오른다. 표지리본이 많이 매달려 있다. 누군가 가지치기를 하여 진행하기 좋게 길을 열어 놓았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쯤 지나자 돌탑이 반긴다.


완만한 내리막길을 따라 2-3분 내려서자 잘 정비된 김해 허씨 묘가 보인다. 묘를 가로질러 호젓한 소나무 숲 속으로 들어서자 부드러운 오솔길이 나타난다. 10시 45분 사치재(해발 500m)에 도착하자 '여원재 12.9km 복성이재 4.8km' 라고 적힌 이정표가 서 있고 88고속도로로가 길을 가로막는다. 오른쪽으로 100여m 떨어진 지점에 안전한 지하통로가 있지만 대부분의 대간꾼들은 가드레일을 넘어 고속도로를 가로지른다.


697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가쁜 숨을 토해내며 10분 정도 오르면 헬기장에 닿는다. 사방으로 막힘 없는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물 한 모금으로 거치러진 호흡을 달래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헬기장을 내려서자 1994년과 1995년 연이어 발생한 산불로 나무들이 모두 타죽었다. 검게 그을린 나무들이 인간을 원망하며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길옆에 핀 야생화가 힘겹게 새 생명을 키워 봄을 알린다.

 

왼쪽으로 멀리 뾰족 솟아오른 봉우리가 눈길을 끌고 오른쪽 산 아래에 지리산휴게소와 그곳에 우뚝 선 88고속도로 준공탑이 눈에 들어온다.

 

이 코스의 위안거리는 오로지 억새뿐이다. 억새밭이 펼쳐지는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여유로운 발걸음을 옮긴다. 복성이재를 향하는 대간 길은 참으로 순하다. 흔히 종주자들은 이번 구간을 가장 볼 것 없고 지루한 구간으로 친다고 한다. 그러나 활짝 핀 진달래가 미소지으며 나그네를 반긴다.


사치재에서 50분 정도 지나 새맥이재에 닿는다. 예전에 우마차가 다녔다는 비포장 산길을 따라 이곳까지 승용차가 올라온다. 5분 정도 진행하면 지나온 새맥이재로 연결되는 임도와 만나고 곧바로 표지리본이 많이 붙은 왼쪽 산길로 들어선다. 새맥이재에서 복성이재로 가는 길은 온통 철쭉 밭이다. 오르내리면서 철쭉 가지가 배낭 끈을 잡아챈다. 멀리 산허리를 자른 고속도로가 보이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오이로 갈증과 허기를 속인다.


12시 20분 눈앞에 아막성터가 보인다. 이곳은 삼국시대 당시 백제와 신라가 맞붙었던 격전지다. 백제에서는 아막성으로, 신라에서는 모산성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은 무너져 내린 돌덩이들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오고가며 무엇인가를 기원하면서 쌓아 올린 돌탑들만이 나그네를 반긴다. 성터를 지나 20분 뒤 복성이재(해발 550m)에 도착한다.


복성이재는 장수군 번암면과 남원시 아영면의 경계로 지방도로가 지나간다. 이곳이 바로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제비가 물어준 박씨로 부자가 됐다는 고대소설 ‘흥부전’의 배경이 되는 전북 남원시 아영면 성리의 상성마을이다. 도로를 건너자 '사치재 4.8km 중치 12.1km'라고 적힌 이정표가 서 있다.


묘지 왼쪽 옆 숲 속에서 자리를 잡고 약밥과 토마토주스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오른쪽으로 집재마을이 평화롭게 자리하고 왼쪽은 목장이다. 하나 둘 도착하는 일행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목장 울타리를 따라 완만한 오르막길을 천천히 오른다.


20분쯤 지나 봉우리에서 왼쪽 철조망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버리고 오른쪽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철쭉군락지이다. 철쭉군락은 남원시 아영면과 장수군 번암면을 가로지르는 치재에서 백두대간 동쪽능선을 타고 올라가 첫 번째 봉우리에서부터 약 500m 구간에 걸쳐 등산로 좌우 산비탈을 비집고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이 구간은 말 그대로 철쭉 밭이다. 사방 팔방을 둘러보아도 철쭉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조금 있으면 꽃불을 당길 것이다.

 

20여분 지나 흥선장씨묘 옆 소나무 그늘에서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달래고 오르막길을 5분 정도 더 오르자 무명봉에 도착하고 곧바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14시 5분 봉화산 정상이 보이는 봉우리를 내려서 나무 그늘 아래에서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하고 부드러운 능선길을 이어간다.


억새밭 완만한 오르막길을 천천히 20분 정도 오르면 봉화산 정상(해발 920m)에 도착한다. 전북 남원시와 장수군, 경남 함양군의 경계에 솟은 봉화산은 이름 그대로 예전에는 봉수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봉화산 정상에 서면 멀리 지리산이 아직도 시야에 들어오고 사방으로 막힘 없는 조망이 전개되어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북으로는 전북의 오지, 일명 ‘무진장’장수군의 깊은 산골 지지계곡 골짜기 좌우로 장수의 진산 장안산(해발 1,237m)과 무령고개, 그리고 경남 함양과의 경계인 백두대간 백운산(해발 1,279m)의 웅장한 산줄기가 눈앞에 딱하니 버티고 서있다. 정상에는 삼각점(함양23)이 박혀있고 스테인리스 안내판에는 누군가 매직으로 봉화산이라 써 놓았다. 지루하고 완만한 능선길이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몸만으로 살 수 있는 삶은 정직하다. 배낭의 어깨끈을 조이고 걸음을 재촉한다. 사람이 사는 마을도 첩첩산중에서는 자연의 냄새와 기운을 베어 문다.


봉화산을 떠난 지 약 1시간이 지난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7-8분 내려서고 다시 완만한 내리막길을 3-4분 내려서면 광대치에 도착한다. 광대치는 함양 대상동에서 장수 광대동으로 넘어가는 재다.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것 같다. 곧바로 가파른 오르막길을 턱밑까지 차 오르는 숨을 토해내며 5분 오르고 물 한 모금으로 잠시 호흡을 고른 다음, 다시 한 번 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5분 정도 오른다.


16시 정각. 목장으로 생각되는 곳에 새로 설치된 철조망이 길을 막아선다. 철조망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진행한다. 월경산[980.4m]을 오른쪽으로 두고 비껴서 지나친다. 길게 밧줄이 매어진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5분 정도 내려선다.
16시 45분 오늘 산행의 종점인 중치(해발 650m)에 도착하니 ‘영취산 8.2km’라고 적힌 이정표가 반긴다.


중재에는 비포장도로가 나 있고 언덕배기에는 커다란 서낭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갈림길이다. 오른쪽은 함양군 운산리 중기마을로 하산하는 길이다.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임도를 따라 지지리로 향한다. 1분 정도 진행한 후 임도를 버리고 표지리본이 안내하는 왼쪽 길로 들어선다. 인적이 드문 탓에 길이 희미하다. 백운산에서 발원해 무령고개에서 흘러온 계류와 만나 번암 방향으로 굽이치다가 동화호로 들어가는 물길이 지지계곡이다. 지지(知止). ‘그칠 줄을 안다’는 뜻. 사람들의 발길 닿지 않은 계곡은 저 홀로 고요하다.


17시 정각. 계곡에서 세수와 탁족을 하며 7시간 동안의 산행 먼지를 털어 내고 산행을 마무리한다. 산은 어떻게 걸어왔느냐에 따라 수많은 갈래의 다른 길들을 낳고 있다. 하물며 같은 시간에 그 길을 함께 걸은 일행들끼리도 저마다 다른 산길을 넘었을 것이다. 지지∼번암간 도로 확포장 공사중이다. 오는 2006년까지 이곳 7km의 비포장 길을 확포장한다고 한다. 표층 보조기층 동상방지층 노상 노체 등이 차례로 쓰인 표지판이 줄을 잇는다. 그 표지판들은 앞으로의 길의 변화를 알려주는 예고편 같다.


비포장 도로를 따라 버스가 정차된 곳으로 이동한다. 버스에 배낭을 벗어놓고 계곡을 흘러내리는 시원한 계곡 물을 물병에 받아 갈증을 달래고, 산악회 여자 총무가 건네는 컵라면을 사양하고 대신 남은 간식으로 허기를 달랜다. 19시 정각. 김대장과 후미가 도착하고 버스는 서둘러 대전으로 향한다.

'백두대간 조각맞추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