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찌개 백반으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두 대의 승용차에 분승하여 국도를 타고 금산으로 향한다. 635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수리넘어재를 넘어가는 진악산 휴게소에 도착한다. 13시 50분 일행을 내려놓고 차량 한대를 하산 지점인 반대쪽 보덕사 주차장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떠난다. 진악산 휴게소는 조그만 간이 매점이고 휴게소 앞 주차장에는 진악산 종합안내도와 진악로(進樂路)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있다.
두 개의 목장승 뒤로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는 가스통이 나무에 매어져 있고 금산시내가 한 눈에 조망된다. 정상에 닿을 때까지 이 조망은 계속된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른다. 특이하게 시를 적어 놓은 예쁜 목비가 군데군데 세워져 있어 운치도 있고 산행이 즐겁다. 숨이 거치러지고 이마에는 조금씩 땀이 흐른다. 능선 양쪽으로 조망이 뛰어나고, 왼쪽 아래로 시커먼 차양막을 씌운 삼밭이 많이 보인다. 119 긴급 구조를 위한 통신 시설을 지나면 곧바로 진악산 정상에 도착한다. 넓은 터를 이룬 정상부는 삼각형 모양을 한 헬기장이 있다. 가장자리에 금산산악회에서 세운 표지석이 놓여 있고, 표지석 뒤엔 안용산씨의 '진악산' 이라는 시가 음각 되어 있다. 해발 732.3m다. 진악산은 해발 737m의 높이로 충남에서 4번째 높은 산으로 주릉에 펼쳐지는 기암괴봉의 경관이 아름다우며 금산 쪽으로 깎아지른 높은 낭떠러지가 아찔하다. 남쪽으로는 전북 진안의 운장산과 구봉산이 다정스럽고, 운장산에서 대둔산으로 이어지는 금남정맥이 장엄하다. 대둔산과 천등산, 홀로 우뚝 솟아오른 충남 제일의 고봉 서대산이 보이고 색을 달리하면서 주름잡힌 산줄기들이 첩첩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펼쳐진다. 삐죽 삐죽 솟은 봉우리들은 웅장하다는 느낌보다 아기자기한 느낌을 갖게 한다. 아치목교를 건너오면 1,1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천연기념물 365호 보석사 은행나무가 눈길을 끈다. 1084년에 심었다는 거목으로 높이 48m, 둘레 16.5m으로 1982년에 천연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은 끝이 난다.
20여분이 지나 차량을 이동시키고 돌아온 일행과 합류하여 도로를 건너 들머리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1-2분 정도 오르면 평탄한 산책로가 이어진다. 여유로운 발걸음을 10여분 옮기면 진계리에서 오르는 길과 만난다. 금산군수가 세운 '금산 인삼과 진악산' 이라는 팻말이 서있다. 이곳 진악산은 1500년 전 백제 시대에 효성이 지극한 강처사가 노모의 병치료를 위하여 관음봉 관음굴에서 기도하던 중 산신령의 현몽으로 인삼의 씨앗을 얻어 처음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금산 인삼의 발생지라고 한다.
10여분 오르면 전망대에 도착한다. 대둔산과 천등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서대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조망된다. 정상 왼쪽으로 빈대바위가 보인다. 바위의 모습이 빈대 한 마리가 붙어있는 모양과 흡사해서 붙어진 이름으로 이곳에서 보아야 그 모습이 보인다.
잠시 숨을 돌리고 계속 10여분 정도 오르면 빈대 바위에 도착한다. 산 아래에 금산 시내가 손에 잡힐 듯 하고 사방으로 조망이 시원하다. 빈대바위에 올라섰다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안전산행을 돕기 위한 밧줄 가드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10여분 능선을 타고 정상을 향해 진행하면 원효암에서 오르는 길과 만난다. 원효암 650m 정상 160m 이정표가 보인다.
정상 표지석을 배경으로 단체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수많은 표지기들이 형형색색으로 나부끼는 산불 감시초소 앞에 자리를 잡고 간식을 나누며 휴식을 취한다.
15분 정도 휴식을 끝내고 실제 정상으로 향한다. 능선 왼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며 산 아래에 조그만 저수지가 보인다. 빠른 걸음으로 20여분을 걸으면 실제 정상인 737봉에 다다른다. 쉴만한 넓은 터가 있다. 운장산과 구봉산이 더욱 가깝게 다가서고 왼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바위 치마를 두른 적상산 과 그 뒤로 덕유산이 눈에 들어온다.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10여분 동안 휴식을 취하면서 숨을 고르고 하산길로 접어든다.
가파른 내림길에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3-4분 정도 조심스럽게 내려서서 5분 정도 진행하면 묘지가 길을 가로막는다. 5분 정도 진행하면 도구통 바위가 눈길을 끈다. 도구통이란 절구통의 방언인데 바위 모양이 절구통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구통바위 옆으로 청마 유치환의 '바위' 라는 시가 액자 속에 적혀 있다. 또 그 앞에는 금산군청이 세운 '금산 인삼과 진악산' 이라는 팻말이 서있다.
낙엽 쌓인 가파른 내리막길을 지그재그로 내려서면 등로 옆에 잘 가꾸어진 묘 1기가 보인다. 그리 좁지도 않고 넓지도 않은 길은 걷기에 더없이 좋다. 16시 30분 영천암에 도착한다. 보석사에 속한 암자로 보석사와 함께 신라때 조구화상이 지은 것으로 전하며 경내에는 무량수각과 칠성각의 두 건물만 있고 무량수각 뒤쪽에는 굴속에서 흐르는 영천약수가 있다.
인기척은 없고 다만 숨쉬지 않을 자유를 얻은 처마에 매달린 물고기 한 마리가 바람을 타고 파란 하늘을 유영한다. 무념무상의 소리를 파문으로 남기며….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길은 떠남과 돌아감을 열고, 흐름이 보이지 않는 시간은 탄생과 죽음을 연다. 돌아가는 것. 그 어느 것도 피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잎 떨어진 감나무에는 아직 붉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영천 약수로 목을 축이고 길을 따라 조금 내려서서 육각정자가 보이고 목장승 두 개가 웃으며 반긴다. 조금 지나서 샘물바위가 나타난다. 휴양림 산책로에는 삼림욕대와 나무의자가 곳곳에 놓여 있다.
목교를 건너 보석사로 들어선다. 보석사(寶石寺)는 라는 이름은 절 앞산 중턱에서 금을 캐내어 불상을 주조 하였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신라 헌강왕 원년에 조구대사가 창건하여 천년을 이어오며 넉넉한 품으로 중생을 기다려온 보석사는 규모는 작은 절이지만 이 절이 지닌 역사적인 무게만은 결코 만만치 않다. 조선시대 임진년 8월(1592)의 금산벌 싸움에서 중봉 조헌선생과 함께 싸우다 순국하신 기허당 영규대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했고 그 인연으로 보석사내의 의선각에 영규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종루 아래를 지나면 왼쪽으로 5기의 부도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으며 전나무길을 따라 내려서면 오른편에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모아 왜병과 싸운 의병승장 영규대사의 뜻을 기리는 의병승장비가 서 있다.
17시 정각 단청이 없는 맞배지붕 양식의 일주문을 빠져 나온다. 여느 절 집의 화려한 비단단청 일주문과 달리 보석사 일주문은 아무런 색의 장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