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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42. 삼봉산

산행일시 : 2009년 2월 8일(일)

산행코스 : 백장암-투구봉-삼봉산-등구재-백운산-금대산-금대암-마천중학교


귀연산꾼과 어울려 지리산 최고의 전망대로 통하는 경남 함양의 삼봉산을 찾아 나선다. 대전-통영고속도로를 달려 함양분기점에서 88올림픽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가다 지리산 나들목으로 빠져나간다. 바로 남원시 인월이다.


백장암은 인월에서 실상사 방향 60번 국도를 따라 산내로 들어가다 보면 실상사 못 미쳐 백장암 가는 산길이 나온다.

 




시멘트 포장길을 걷다 숲속으로 들어서 솔바람길을 따라가면 백장암에 다다른다. 도로에서 20분 소요.





산길을 오르다 보니 홀연 넓은 평지가 나타났다. 그곳에 도무지 절 같지 않은 절이 서 있었다. 육중한 대웅전과 선명한 단청을 연상했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경내는 고요했고, 꽃들만이 웃고 있었다. 1200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는 석탑에는 시간이 멈춰서 고여 있는 듯했다. 불사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인간이 들어서야 비로소 절집이 되는, 그런 편한 모습으로 고찰은 서 있었고 그 안에 스님이 있었다.

- 김택근 ‘사람의 길’ 중에서-

 

백장암(百丈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인 실상사(實相寺) 소속 암자이다. 828년(신라 흥덕왕 3) 홍척(洪陟)이 실상사를 창건하면서 함께 세워, 실상사가 사세를 크게 떨칠 때에는 참선 도량으로 유명하였다.


백장(百丈)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평상심이 도이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 8세기경에 살았던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인 백장대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백장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백장청규를 만들고 실천한 승려이다.


본 절인 실상사가 평지에 자리 잡은 것과는 달리 백장암은 수청산(772m) 중턱에 있어 제법 그윽한 산사의 정취를 선사한다. 현재는 법당과 칠성각, 산신각 등이 있는 작은 암자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실상사의 모든 승려가 이곳에 들어와 화를 피하기도 했다고 한다.







광명전은 1910년에 지어진 것으로 목조 맞배지붕 건물이다. 특히 귀중한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는데, 국보 제10호인 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 보물 제40호 실상사백장암석등, 보물 제420호 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가 대표적이다.


높이 5미터,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삼층석탑의 1층 몸돌에는 사천왕과 인왕상 혹은 신장상으로 보이는 조각이 각 면에 2구씩 조각되어 있다. 남쪽의 증장천왕 서쪽의 광목천왕 북쪽의 다문천왕 조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탑을 든 다문천왕 옆에 특이하게 깃발을 든 동자승이 서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2층의 몸돌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조각되어 있는데 각 면에 두 명의 천인이 각각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탑이 보여주는 가장 특징적인 모습이다.


3층 몸돌에도 비천상이 새겨져 있는데 휘날리는 천의(天衣)자락이 하늘을 오르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인에게 빗물이 떨어지고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탑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늘을 향하는 천인의 표정은 무겁지 않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계속 오르막길이다.

 

 




삼형제봉을 지나 10분 정도 오르면 조망이 훌륭한 바위 전망대가 있다. 운무가 휘감은 지리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20여분 더 오르면 범바위에 다다른다. 범바위에 오르자 작은고리봉, 만복대, 큰고리봉, 바래봉, 덕두산이 펼쳐진다.











서룡산 방향으로 향한다. 서진암삼거리에 서있는 이정표에는 서룡산까지 0.5km로 표시되어 있으나 실제는 2분 거리다. 작년 가을 모 산악회에서 세운 커다란 정상표지석이 반긴다. 

 


서룡산에서 투구봉까지는 약 20분 거리다. 투구봉에 올라서자 북쪽으로 오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왕산 필봉산이 보이고 황매산 너머 하늘금으로 매화산과 가야산이 하늘금을 이루고 있다.







투구봉이라는 이름은 고려 말 우왕6년(1380) 이성계 장군이 황산벌 싸움의 전초지로 삼았으며, 무신란 때는 반군이 호남으로 넘어가는 것을 저지했던 전투장이었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팔령재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 점심식사를 위해 등로 한 쪽에 자리를 잡는다. 금세 진수성찬이다. 산에서 먹는 점심은 산 아래 어떤 산해진미도 흉내 낼 수 없는 꿀맛이다.


삼봉산 아래에 누군가 지친 나그네들의 다리쉼을 위해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후식으로 먹은 커피향이 입안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삼봉산 정상에 닿는다. 왼쪽으로 오도령에서 오르는 길이 보인다. 오도령(悟道領)은 서산 대사의 제자인 인오 조사가 이 고개를 오르내리며 득도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삼봉산(三峰山)은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의 높이는 1187m이다. 경남 함양군 함양읍, 마천면과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도계를 이룬다.

지리산 전망대답게 천왕봉을 중심으로 동쪽엔 하봉∼웅석봉을 주축으로 한 동부능선이, 서쪽으론 반야봉∼만복대로 이어진 서북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자세히 보면 천왕봉 사태난 흔적까지 확인할 수 있다.


 


하산은 금대암(5.95㎞) 방향으로 진행한다. 완만한 경사의 낙엽길이 30분 반복되다 이후 25분 정도는 아예 쏟아지는 급경사 낙엽길이 이어진다.





삼봉산과 백운산 사이의 등구재 왼쪽은 함양 창원마을, 오른쪽은 남원 산내면 방향이다. 즉 전남과 경남을 잇는 고갯마루로 옛날 함양 남원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다. 작년 가을 지리산길을 걸으면서 넘던 추억이 새롭다.


‘등구’라는 지명은 ‘거북이 기어 올라가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등구 마천 큰애기는 곶감 깎기로 다 나가고, 효성 가성 큰애기는 산수 따러 다 나간다’라는 민요가 구전될 만큼 감나무가 많고 곶감이 달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청게님과 칸님은 산내면 방향으로 하산하고, 일행은 길 건너 숲으로 오른다.



낙엽송과 잣나무 조림지역이라 등로는 푹신푹신하다. 꾸준한 오르막길이라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무성한 잣나무 조림지를 지나면 곧 백운산. 백운산 정상까지 35분쯤 걸린다.



반쪽짜리 무덤 때문에 백운산 정상 표지석이 구석 한쪽으로 물러나 있다.







백운산에서 금대산은 지척으로 30분 걸린다. 바위가 많은 금대산에 다가설수록 등산로는 삼봉산 구간과 달리 시야가 탁 트이며 조망이 시원하다. "천천히 걸어도 빠르게 닿아버리는 목적지는 싫다"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은 어느 누구도 트집 잡을 수 없는 진리이다.


햇살을 고스란히 받은 전망 좋은 바위에 올라서면 마천 일대와 걸어온 오도재에서 삼봉산 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빨려 들어온다.







조금 더 진행하여 바위에 올라서니 멀리서 보던 산불감시초소가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금대산이다.







해발 847m의 금대산은 함양군 마천면의 ‘작은’ 봉우리이지만 조망이 뛰어나다. 지리산 천왕봉을 비롯한 경상도 쪽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어 그 모습이 장관이다. 삼정산(1242m) 능선에는 가파른 비탈을 따라 계단식 다랑논이 조성되어 있다. 




△지나온 삼봉산



△금대산


하산은 금대암 쪽으로 하며 정상에서 금대암까지 20분이면 충분하다. 나한전 아래 3층석탑이 있다. 탑의 높이는 2.5m밖에 되지 않아 장난감처럼 앙증맞은 느낌이 든다.



절 마당가에 서자 금대산 정상에서 보았던 장관이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다. 지리산의 긴 능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 하봉 - 중봉 - 천왕봉 - 제석봉 - 연하봉 - 촛대봉 - 영신봉 - 칠선봉 - 덕평봉 - 벽소령 - 형제봉 등 지리산 능선이 차례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순간 가슴 밑바닥 어디에 숨어 있었던지 그리움 한 덩어리가 불끈 붉은 해처럼 솟아오른다.


▲금대산 정상에서 본 지리산 주능선. 너무나 가까워 사태난 흔적까지 확인된다. 가운데 제일 높은 봉우리가 천왕봉이며 주능선 앞 우측 봉우리가 창암산이다.

 

금대암(金臺菴)

‘금대’라는 암자 이름이 독특하다. 불가에서 금이란 부처, 대는 부처가 앉는 자리를 상징한다.


금대암은 신라 태종 무열왕 3년(656)에 행호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1489년, 김일손이 지리산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 <유두두록>에는 이곳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김일손은 정여창과 함께 금대암에 잠시 들렀는데 당시 이 절에는 20여 명의 승려가 수도에 정진하고 있었다 한다.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 크기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보통의 법당과는 달리 앞쪽에 툇마루 1칸이 덧대어 있다.

 

대웅전 안에는 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툇마루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작고 용 머리가 정교하게 새겨진 동종이 걸려 있다.





'금대선원(金臺禪院)'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이 건물은 예전 법당으로 쓰던 건물이다. 지금의 마당 한 가운데쯤에 있었다가 대웅전을 새로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물러나 앉게 되었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인생이 있어서 나는 금대암에서도 여러 인생을 만날 수 있었다. 늘 고양이와 티격거리는 공양주 보살은 곧잘 소주를 마시곤 발그레한 얼굴로 아들 보고 싶다는 타령도 하고 법당에 들어가 마구 종을 치기도 했다. 중학교만 마치고 절에 들어온 행자는 무전여행 경험담을 들려주고, 언덕 너머 있는 다른 암자에 데려가기도 했다. 저승 풍경인 듯 고요하던 그 암자의 스님 방엔 성경이 놓여 있었는데 , 마당에 외롭게 피어 있던 상상초가 지금도 기억난다. - 강석경, <내 마음에 남은 절>에서

 


마당 아래로는 꽤 너르고 푸른 대숲이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에 커다란 전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전나무는 사시사철 잎이 푸른 상록침엽수다. 수령은 500여 년 정도로 추정되는 이 전나무는 우리나라 전나무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다고 한다. 전나무는 보통 25m 내외로 자란다는데, 금대암의 전나무는 키가 무려 40m에 이르러 그 기품이 고고하다.


본래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었으나 1998년 무렵에 낙뢰로 한 그루는 부러져 없어졌다 하니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금대암에서 마천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산길은 단풍 곱게 물드는 가을 날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그려내는 길이다.

 




산행은 마천중학교 앞에서 끝이 나고 산용님이 준비한 뒤풀이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 졸음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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