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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자료

안나푸르나에서 만난 석유문명

안나푸르나에서 만난 석유문명

 

  얼마 전 네팔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갔다 왔습니다. 물론 비행기를 탔습니다. 비행기는 이산화탄소를 엄청나게 많이 배출하는, 지구온난화의 주범 가운데 하나입니다. 현대 산업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산업국가의 모든 사람들은 엄밀히 말하면 지구온난화의 공범자들입니다. 지구온난화는 모든 생물종을 멸종으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내게 할 만큼 바로 코앞에 닥친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인류는 자신들의 손으로 지구 기후를 변화시키고 그럼으로써 자살하는 최초의 종이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혜초처럼 걸어서 또는 영국의 억척 아줌마 앤 모스토처럼 자전거로 가는 유람은 감히 엄두도 못 내고 말았습니다. 기후변화의 공범자가 되는 것을 무릅쓰고라도 기어이 눈이 살고 있는 곳, 히말라야를 보고 싶다는 열망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입니다. 라다크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오래된 미래'로 알려진 히말라야 마을의 생태농업 실상을 직접 보고 싶은 지식욕이 양심의 눈을 잠깐 감으라고 워낙 강하게 사주 교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관광산업은 전 세계 1년 관광인구가 연간 8억 명을 넘는 엄청나게 비대해진 산업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절반 정도가 교통에 소비될 정도입니다. 인류라는 생물종은 날개도 없으면서 어림잡아 300만 명은 늘 공중을 날고 있습니다. 대략 수만 대에 달하는 각종 비행기가 언제나 동시에 공중에 떠있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입니다. 참 대단한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이런 대규모 하늘길 관광과 바닷길 관광을 가능케 한 것은 물론 석유입니다. 20세기 초 석유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했을 때 석유는 처음에는 등불을 밝히는 등유(燈油)만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등유가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등유를 제외하고 항공유를 비롯해 다른 기름은 처음에는 그냥 강과 바다, 땅에 마구 내다 버렸습니다.

 

  석유 이전에 등불 원료는 고래 기름이었습니다. 유럽의 밤을 밝히기 위해 엄청난 고래가 수난을 당했습니다. 포경선 이야기가 소설을 비롯해서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마도 석유가 없었다면 고래는 지금 씨도 안 남았을 것입니다. 이런 등유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록펠러 같은 석유업자들은 거대한 중국 대륙에 공짜로 석유램프를 뿌리기까지 했습니다. 그 공짜 등 이름이 '아시아의 빛'입니다. 실제 이 공짜 등은 대성공을 거두어 이후 중국 사람들은 등유 없이는 밤을 지낼 수 없게 되었고 록펠러는 큰돈을 벌었습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현대문명은 값싼 석유가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서구의 자본주의 산업문명은 정확히 말하면 석유문명입니다. 서구 자본주의 산업화를 압축해서 달성했다고 자랑하는 한국사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와 우리의 생활 대부분이 석유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먹는 음식물의 90% 이상이 석유입니다. 씨앗에서부터 땅을 갈고 농약을 치고 비료를 뿌리고 가을걷이를 하고 저장하고 운반하고 가공하는 이 모든 농사일에 석유가 들어가기 때문에, 실상은 우리 몸도 석유로 살쪄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히말라야에서도 저는 석유문명의 위력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해발 4130미터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비닐 태우는 냄새를 맡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안나푸르나 남봉우리와 안나푸르나 1봉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 빙하가 훨씬 뒤로 물러나 버리고 만 기후변화의 생생한 현장을 보려고 막 숙소를 나섰을 때였습니다. 어디서 매캐하고도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숨을 턱 막히게 했습니다. 마른 잎이나 나무를 태우는 고소한 자연의 냄새가 아니었습니다.

 

  냄새의 진원지는 롯지 바로 옆 쓰레기 웅덩이였습니다. 거기서 각종의 포장비닐 쓰레기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오는 도로 주변이 온통 비닐 쓰레기로 뒤덮여 있는 광경과 더불어 착잡한 마음을 가누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베이스캠프까지 올라오는 도중에 만난 많은 네팔인 짐꾼들이 엄청난 무게의 생필품들을, 음료수와 술과 과자와 가스통을 비롯해 각종의 상품들과 비닐로 포장된 쌀과 채소 등등을 배낭이나 포대에 담아 끈을 이마에 매는 독특한 네팔 방식으로 날마다 나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수고와 석유문명 덕택에 밥을 먹고 베이스캠프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이 수고이지 실제로는 노동착취였습니다. 사실 석유문명이란 무자비한 자연자원 착취일 뿐만 아니라 또한 늘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비정한 노동착취를 통해 살찐 피의 문명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석유가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조만간 석유생산이 정점에 도달하는 피크오일(Peak Oil)이 눈앞에 닥치면 우리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강요당하게 될 것입니다. 현대 석유문명의 근간이 뒤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입니다.

 

  어글리 코리언

 

  네팔은 온 산이 다락 논이었습니다. 깎아지른 산비탈에 순전히 사람 힘으로만 다락 논을 만든 그 지혜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다락 논을 보면서 솔직히 북한이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한반도의 2/3 넓이에 2,700만 인구는, 특히 거의 대부분의 땅이 산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과잉인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석유를 투입하지 않는 농업을 통해 식량자급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북한처럼 해마다 홍수 피해가 되풀이되고 있고 일정하게 생태문제도 심각하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락논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이 네팔에 온 한국인들이었습니다. 네팔에 와서 트레킹을 즐긴 관광객들은 처음에는 물론 서구인들이었습니다. 그 뒤 일본인들이 오기 시작했고, 그리고 최근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옵니다.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순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관광이란 본디 20세기 들어와 석유의 소비를 촉진하고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한 새로운 자본주의 상품이었습니다. 때문에 처음에는 서구인들이 값싼 교통요금으로 동남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곳곳을 들락거리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일본과 한국이, 그리고 요즘에는 중국이 뒤를 잇고 있는 것은 당연한 순서입니다.

 

  문제는 네팔에서도 한국인들의 행태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동남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섹스관광이니 골프관광이니 한심하고도 추악한 작태는 네팔에서도 당연히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자존심 강한 네팔인들을 마구 비하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일부 기독교 광신자들은 산 속으로 들어가 네팔 마을의 전통 종교시설을 도끼로 부수고는 웃으면서 승리자처럼 기념사진을 찍는, 정말 기도 안 차는 무식한 일까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만난 어느 한국인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오르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물 값이 비싸진다고 밑에서 잔뜩 물을 사서는 포터에게 지고가게 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자랑삼아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물 값이 비싸진다고 해봐야 몇 백 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포터에게 지울 수 있는 짐의 무게도 엄연히 네팔 법에 30킬로그램까지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네팔의 1인당 GDP는 250 달러 정도입니다. 2만 달러에 가까운 한국과 견주면 정말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산업문명에 완전히 동화되기 이전인 1970년대 이전의 한국 농촌처럼 네팔의 시골에는 농촌공동체의 '우정과 환대'가 남아 있었습니다. 낯선 이방인에게 '나마스떼' 하며 손을 모으는 수많은 네팔 사람들의 표정은 살벌한 경쟁에 눈이 멀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잠재된 범죄자로 보는 한국인들의 얼굴 표정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평화의 얼굴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공동체인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추악한 한국인들'에 더해 하나 더 눈길을 끄는 것이 다름 아닌 한국 산악인들이었습니다. 6박 7일의 트레킹 여정에서 머문 숙소의 식당에는 어김없이 한국인들이 남긴 이름과 사진들이 즐비했습니다. 그 중에는 무슨 대학연합원정대니 어느 기업 원정대니 하는 '원정대'들의 사진과 안내전단 등이 눈에 띄는 장소마다 걸려 있었습니다. 원정대라니, 여기 신령스러운 안나푸르나까지 와서 칭기즈 칸이나 알렉산더처럼 산을 '정복'한다는 그 말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습니다.

 

  누가 무엇을 정복했을까

 

  네팔 포카라에 있는 산악박물관에 가면 산악 정복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그려놓은 표가 있었습니다. 해발 8천 미터 이상의 산 이름과 높이, 그 산을 정복한 연도, 국적, 사람 등등을 1950년 6월 3일 프랑스의 모리스 에르조그가 정복한 안나푸르나 1봉부터 연도순으로 알기 쉽게 도표로 작성해 놓은 것입니다. 저는 그 앞에 서서 '정복'이 아닌 광기와 서구 제국주의 산업문명의 그늘을 보았습니다. 네팔의 산악박물관에 그 유명한 진화론 그림, 네발로 땅을 기는 원숭이에서부터 차츰차츰 일어서서 드디어는 현재의 백인으로 이어지는, 명백한 오류인 그 그림을 전시해놓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등반의 역사는 서구의 진보와 진화에 대한 확신과 동정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구의 근대를 이식하고 모방하려는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20세기 이래 모든 나라의 근대화 물결을 네팔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실제 산을 오른 원주민들에 대해 조금 언급해둔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초모룽마가 식민지 인도의 측량국장에 지나지 않았던 영국인 에베레스트로 여전히 표기된 것을 보고는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영국인 에드먼드 힐러리의 고백 덕택에 1953년 5월 29일 초모룽마의 정복자 이름에 셀파였던 텐진 노르가이 이름이 올라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편했습니다. 마차푸차레처럼 인간이 올라가지 않는 산이 있었다면, 그래서 그냥 산을 산으로 내버려두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산악인들 가운데는 군대가 조직한 원정대 대장직을 미련 없이 내팽개친 산악인도 있었고 이런 정복과 군대식 원정대 편성을 거부하고 산을 사랑하고 등반 자체를 즐겼던 산악인들도 많았습니다.

 

  영국의 등반가 머메리(Albert Frederick Mummery)는 가이드를 앞세워 가장 쉬운 길을 택해 정상을 정복하면 된다는 이른바 기존의 등정주의와 달리 절벽과 첨봉 등을 택해 더 어렵고 다양한 길(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을 개척하는 등로주의라는 머메리즘을 제창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 뒤에는 메스너(Reinhold Messner)가 무산소, 단독, 연속 등정 등 3대 신 과제를 들고 나와 그 자신이 1978년 초모룽마와 낭가파르바트를 오르고 극한등반이라는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세븐 서밋', 곧 7대륙 최고봉 등반 등등 자꾸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 위한 과제들이 출현해서 산악인들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머메리즘이나 극한등반이나 세븐서밋이나 모두 정복주의의 변종일 뿐입니다.

 

  이와는 달리 수많은 볼트를 박아대며 요세미테 거벽을 처음 '정복'했고 이후에도 엄청난 볼트를 거머리처럼 집어넣은 워렌 하딩에 반대하면서 등반윤리 논쟁을 일으키고 자유 등반을 주창했던 로열 로빈스 같은 산악인들도 있습니다. 그는 워렌 하딩이 박아놓은 볼트를, 자연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등반의 즐거움을 빼앗는다며 제거해가며 요세미테 거벽을 오르기도 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였던 레슬리 스티븐은 산 앞에서 인간의 왜소함과 삶의 덧없음을 실감하고 산을 숭배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출현하여 사회자인 레터맨이 이제 세븐 서미트를 다 정복했으니 다음은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자 "산을 정복하다니요.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단지 잠시 동안 그 산의 일부가 되었던 것뿐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 재프 태빈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단의 산악인들로 취급받고 이런 정신과 영혼은 소수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서구에서 수입된 한국 국가주의 알피니즘

 

  일찍이 퇴계 이황은 산을 오르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동양에서 산은 하늘과 가까이 하늘의 소리를 듣는 신령스런 곳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단군 환웅은 천지인 삼부를 가지고 백두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은 태산에 올라 하늘과 땅에 고하는 봉선(封禪)의식을 실시하여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였습니다.

 

  이처럼 동양의 농업사회는 대체로 산을 정복하기보다는 신성시하고 경배해야 하는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네팔인들이 마차푸차레에 대해 지금도 갖고 있는 생각처럼 말입니다. 때문에 한국의 산에는 모두 산신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 산신들 모두 명예퇴직당한 채 갈 곳이 없어 포클레인과 개발귀신에 사로잡혀 죽은 무수한 사람들과 함께 구천을 맴돌고 있지만 말입니다.

 

  한국의 알피니즘은 서구 근대화와 함께 수입된 서구문명 목록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복이라는 서구 제국주의 산업문명의 사유방식과 서구 석유문명의 혜택에서 성장한, 선진사회와 진보사회에로의 진입을 입증하는 일종의 허가증이었습니다. 1977년 초모랑마를 정복한 최초의 한국 산악인이었던 고상돈 이래 한국에서도 한국 최초, 세계 최초를 따내기 위한 국가주의의 정복시대가 본격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최초 3극점 7대륙 최고봉 정복, 한국 여성 최초 7대륙 최고봉 정복 등등 지금도 여전히 최초 정복을 위한 도전과 경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안나푸르나에서 만난 한 산악인으로부터 초모룽마에는 전문 상업원정대가 상주하면서 돈만 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심지어 100살 할아버지라도 업어서라도 초모룽마 정상 정복을 시켜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얼마 전 신문기사에는 해발 5,300미터의 초모룽마 베이스캠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 상업원정대들, 어드벤처 컨설턴트, 마운틴 매드니스, 아이엠지 등등이 초모룽마 정상까지 로프를 깔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오마이뉴스, 「돈만 내세요, 에베레스트에 올려드립니다」, 2007.5.20) 이들은 초모룽마 등정에 산소 포함 6만 달러, 초오유봉은 1만 8천 달러, 거셔블롬Ⅱ는 1만 8천 5백 달러를 받는다고 합니다. 상업원정대는 샤워용 텐트도 갖추고 있고 부엌에는 온수 보일러도 있었습니다. 초모룽마 정상으로 올라가는 캠프2에는 좌변식 화장실도 있다고 합니다. 해발 6천 미터가 넘는 곳에 말입니다.

 

  물론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산악인의 정복에는 늘 돈과 명예가 전리품으로 따랐습니다. 산악인은 무상의 정복자(리오넬 테레이의 책 제목)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른바 선진 산업국가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복 장사를 할 정도로 알피니즘이 극성을 부리는구나 싶었습니다.

 

  포카라의 산악박물관 전시장 마지막 부분에는 히말라야 산에서 수거해 놓은 각종의 등산장비, 자일, 산소통, 가스통 등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2001년부터 3년간 일본의 산악인 노구치 겐이 주도한 '에베레스트 청소원정대'의 결과물들이었습니다.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말라야에는 산악인들이 버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엄청난 쓰레기들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그 많은 쓰레기들을 남기면서 아직도 정복할 무엇이 남아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사실 웬만한 원정대 하나 조직하는 데는 수억대의 비용이 들어갑니다. 때문에 부유한 나라 사람들이 아니면 이런 원정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한국의 수많은 원정대들도 한국이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이라는 밑바탕이 있기에 비로소 조직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대부분의 원정대는 현지 셀파들의 도움이 없다면 정상 정복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텐진 노르가이가 최초 등정자로 이름이 오른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도대체 누가 무엇을 정복했는지 이제는 다시 생각해 볼 시점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산악인들이여 이제는 생태적 전환의 산악문화를!

 

  오늘날 한국은 서구인들이 놀랄 정도로 서구 산업화를 훌륭하게 달성했습니다. 한국은 이제 발전도상국이 아니라 경제대국이며 한국인들은 경제성장의 열매인 풍요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중입니다. 1961년 한 해 1천명에 지나지 않던 출국자수가 2006년에는 1천 1백 6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들이 쓴 관광 지출액만 해도 자그마치 138억 달러나 됩니다. 동남아 구석구석 한국관광객이 휩쓸고 다니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풍요의 다른 한편은 끔찍하기만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지칭되는 빈곤자살자가, 순전히 가난 때문에 자식을 아파트 밖으로 내던지고 자신도 몸을 던지거나 극단의 경우에는 분신이라는 끔찍한 일까지 저지르고 있는 사람이 날마다 3명 이상이나 됩니다. 300만 명이 넘는 신용불량자 수, 100만에 이르는 단전단수 가구 수, 최대 6백만~7백만 명으로 추산하는 빈곤계층 등등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 극단으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지표는 너무나 많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은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살벌한 투쟁이 일상화된 사막 사회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거기다 북한은 수백만으로 추정되는 끔찍한 아사자가 발생했고 해마다 기아와 홍수가 되풀이되는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는 중입니다. 음식물 쓰레기만 하루 1만 3천 톤, 1년이면 15조원으로 이것만 그대로 북한에 지원해도 북한의 굶주림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데도, 거기다 다이어트 열풍까지 불고 있음에도 한국에서는 왜 북한에 퍼주기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으로까지 삭막한 마음을 지녔는지 한숨이 절로 나올 때가 많습니다.

 

  한국의 산악문화 또한 석유가 만들어낸 산업화와 풍요의 산물임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들만의 알피니즘'으로 무장한 산악문화가 성장했던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산을 정복한다는, 이른바 근대 서구 알피니즘과 국가주의의 뿌리 깊은 유산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산악인들은 '원정대'를 조직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고 베이스캠프에서는 정복을 위한 '작전회의'를 엽니다. 산에 등반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여전합니다. 산림청에서는 아예 백두대간을 국가등산로로 지정하는 계획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말이 백두대간 종주 등산로를 체계 있게 보호하고 관리한다는 것이지 사실은 몇 명 산악장비 전문 대기업과 이른바 전문 산악인 가이드들의 돈벌이 수단을 제공하는 어이없는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산악인들은 이 같은 맹목의 서구 알피니즘 추종 행위를 더 이상 계속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계속 조직되고 있는 이러저러한 무수한 원정대는 결국은 지구자원을 착취하고 제3세계 사람들을 착취하는 부도덕한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손자 손녀를 위해 석유 이후의 세계를 구상해야만 하는 우리에게는 생태적 전환의 길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산악문화도 이제는 생태적 전환을 모색해야만 합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국제 산악 원정 기록에서 일본인들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일본 시민사회단체와 뜻있는 산악인들의 노력으로 일본의 산악문화가 백팔십도 바뀌어 원정과 정복이 아니라 생태탐방, 생태 자연체험 위주로 탈바꿈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래 모험과 도전은 무리생활을 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오랜 본능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성년이 된 아이들을 홀로 산으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산 속에서 스스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면서 명상을 하고 자연을 배우는 성년식을 가졌습니다. 신라 화랑도에 잔영이 남아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부족공동체의 청소년들을 산으로 보내 심신을 수련하게 했습니다.

 

  산악문화는 이런 도전과 모험 정신을 살려 오늘날의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생태적 산악문화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합니다. 실제로 극단으로 양극화되고 사막화된 사회에서 정복과 개발과 성장과 풍요라는 석유문명을 비판하고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조화를 모색하면서 정복과 기록이 아닌 생태적 산악문화로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다양한 산악인들의 움직임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쓴 산행기와 등반 보고서들을 보면 대부분 정복의 알피니즘과 도전 모험의 정신이 혼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의 산악문화가 앞장서서 이런 혼재되어 있는 정복과 개발, 성장, 국가주의의 낡은 잔재를 과감하게 털어내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지구온난화를 걱정하고 해결책을 찾는, 자연의 무한한 신비를 섬기고 조화를 이루는 생태적 전환의 산악문화가 절실한 때입니다.

 

  어떻게 보면 생태적 전환의 시작은 산악문화로부터 비롯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극단으로 양극화되고 사막화된 사회를 극복하는 길은 우선 무엇보다도 사람들 사이에서 경제성장과 개발, 발전에 대한 성찰의 기운이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찰의 기운은 산을 오르는 산악문화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산악문화의 전환은 생태적 전환의 출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원정대가 아니라 생태 탐방대, 방문단, 참관단으로서 위대한 산과 그 산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공동체들을 '우정과 환대'로서 서로 방문하는 자연체험, 문화체험, 문화교류의 산악문화는 그러므로 우리 사회 생태적 전환의 주요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침략과 정복으로 점철된 서구 제국주의의 석유문명은 이제 근본에서부터 붕괴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가 아니더라도 피크오일 이후에 한국경제에 닥칠 충격은 아마도 쓰나미와도 같을 것입니다. 미국과 유럽, 중국 등은 그나마 석유를 생산하는 나라들입니다. 석유 전문가들은 전 세계 산업국가 가운데 석유생산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 가장 영향을 크게 받을 나라는 한국이라고 주저 없이 지적합니다.

 

  이제 더 이상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자연과 하나 되어 자연을 보호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산악문화를 가꾸어야 할 때입니다. 산악인들이 앞장서서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사막화를 해결하기 위한 성찰의 문화를 산악문화에서부터 제기한다면 우리 사회의 생태적 전환은 그만큼 앞당겨질 수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이 글은 <사람과 산> 에 실린 글을 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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