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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14. 음지백판골


산행일시 : 2007년 6월 10일(일)

 

지난 달 설악의 공룡능선을 타며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수많은 암봉들의 모습에 넋을 잃었던 기억이 채 마르기전 다시 설악의 품에 안기러 길을 떠난다.


토왕골, 음지백판골, 선바위골, 아니오니골, 잦은바위골, 상투바위골, 독주골, 옥수골, 음지골, 곰골 ….

원타이정님의 산행기에서 난생 처음 보고 언젠가는 한 번씩 찾아가고픈 설악산 계곡들의 이름이다.

 

작년에 토왕골에 다녀온 후 설악산 계곡 산행 기회를 엿보는데 이번에도 원타이정님이 안내하고 귀연의 산꾼들과 함께한다.


주목 및 각종수림으로 이루어진 숲은 원시림의 보고로 일컬어지며 우리나라 100대 절경으로 손꼽힌다는 그 곳. 음지백판골!


자정. 빈자리 하나 없이 귀연 식구들을 가득 태우고 대전톨게이트로 들어선 32인승 우등버스는 경부-중부-영동고속도로를 차례로 갈아타면서 1시간 30분을 질주하여 문막휴게소에서 10여분 정차한다. 다시 1시간을 질주하여 홍천톨게이트로 빠져나가 44번 국도를 따라 1시간을 진행하여 진부령과 미시령이 갈리는 갈림길에 위치한 내설악광장 휴게소에 정차한다.


귀연산우회 회장 칸님이 준비한 떡과 우유로 시장기를 달래고 산행들머리로 이동한다.  미시령을 넘는 56번 지방도로를 따라 5km 정도 가면 도로 오른쪽에 도적폭포모텔 팻말이 보인다.


지금은 미시령이 터널로 뚫렸지만 그 옛날에는 영동과 영서를 오가는 교통요지로, 도적골은 피할 수 없는 길목이었으며 도적떼의 단골 출몰지역으로도 악명 높았다. 도적들에게 재물을 빼앗긴 나그네들이 도적소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4시 50분. 어느새 어두움이 물러나고 새날이 열리고 있다. 하늘에 걸린 그믐달이 새벽을 여는 나그네들에게 정겨운 인사를 건넨다. 도로가에 보이는 도적폭포 모텔 팻말에서 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20여m쯤 이동하여 계곡으로 내려간다. 아무 표식도 없다.


아는 사람만이 이따금씩 찾는 골짜기여서 인적이 없음은 물론, 길도 희미하고 표지리본도 거의 없다.


마음 따뜻하고 정겨운 사람들과 함께 맞이하는 아침은 평화롭고 활기가 넘친다. 정신적 압박에서 벗어나 얻는 안위와 쉼의 시간이다. 벅차오르는 행복감에 젖는다.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숲 속의 아침 공기는 욕심에 찌든 일상을 정화시킨다.


음지백판골은 계곡을 따라가야 그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산길이 계곡을 건너다니며 이어지지만 끝가지 등로를 무시하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간다.


들머리에서 약 30분 지나 눈앞에 펼쳐지는 첫 번째 와폭은 전주곡에 불과하다. 이후 암반사이로 무수한 와폭들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수정 같은 맑은 물이 골짜기마다 소를 이루고 폭포를 이룬다. 눈이 시원하도록 진한 녹색의 신록 사이로 이어지는 계곡의 풍광이 더욱더 걸음을 여유롭게 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 약 10m 높이의 직폭에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져 내리는 폭포수는 가슴까지 시원하게 적신다. 직폭을 지나서도 여전히 작은 폭포들의 연속이다. 계곡이 더욱 협곡으로 변하고 굽이굽이 돌 때마다 폭포들이 색다른 풍경으로 다가서며 전혀 지루한 줄 모르게 한다. 이미 마음의 시간은 정지한 지 오래다.

<세월따라님 제공>
 

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었다가 계속 계곡을 따라 오른다.

8시 30분. 해발 약 930m 지점에 이르면 또 하나의 폭포를 만나게 된다. 시끄러운 물소리를 따라 길 왼쪽으로 30여m를 내려서자 절벽 좌우로 흐르는 쌍폭포가 장관이다. 지리산의 이끼폭포를 연상시키는 이 폭포는 몇 가닥의 물줄기가 층을 이루어 흐르는데, 이제껏 올라오면서 본 폭포 중에서 가장 화려하다. 이 폭포의 이름은 ‘주렴폭포’다

멋진 폭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폭포 옆 바위틈에 홀로 핀 큰앵초의 자태는 들꽃의 품위를 넘어 청초하고 우아하다.

<청산님 제공>
 


사실상 여기서 계곡이 끝이 나고 오른쪽 바깥으로 빠져나가 가파른 오르막으로 올라서면 골짜기가 넓어지면서 경사도 완만해진다. 고도 1000m가 넘는데 수정같이 맑은 물줄기가 계속된다. 새소리도 산 아래에서 듣는 것보다 훨씬 낭랑하다.


약초꾼들이나 이따금씩 다니던 이 길은, 아름드리 주목과 융단같이 두터운 이끼 등으로 원시의 설악산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거목이 밀집한 지역이 나타난다. 지름 약 2m, 높이 약 30m 되는 남한 최대의 신갈나무 거목을 비롯해 피나무, 주목, 등 수백 그루가 집단 서식하고 있다.


엄청난 크기의 거목 뒷모습은 텅 비어 있고 곳곳에 벼락 맞아 까맣게 그을린 거목에서는 안타까움이 느껴지고, 수백 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거목에서는 무상함이 전해진다.


자연은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자연을 자연답게 하는 것이다.


황철남봉이 바로 코앞에 우뚝 솟아 있다. 백두대간상의 황철봉과 옥수골로 이어지는 능선 갈림길에서 먼저 도착하여 곰취 채취에 시간가는 줄 모르던 일행과 조우하여 휴식을 취한다.


오른쪽으로 능선을 따라 보이는 희미한 길이 옥수골로 향하는 길이다. 능선에는 맷돼지들이 파헤쳐 놓은 흔적들이 엄청나다. 흙이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11시. 점심식사를 위해 넓은 공터에서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펼친다. 청산님의 고추절임과 청계님 의 열무김치로 나선생님이 준비해 온 윤기 흐르는 찰밥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다. 한쪽에서는 지글지글 오리로스 굽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네스타시님이 끓이는 산중의 떡국은 별미다. 소주 대여섯 병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고 문님의 잣술 두 병까지 바닥을 드러내고서 점심식사는 끝이 난다. 


일찍 점심식사를 마치고 곰취를 채취하기 위하여 흩어졌던 일행들이 손에는 곰취를 한보따리씩 들고 얼굴에는 미소를 가득 담고 돌아온다. 


만병초가 눈길을 잡아끈다. 모든 병을 낫게 해준다고 해서 만병초라 이름 지어졌다. '초'자가 붙어 있으나 풀이 아니고 모든 병을 낫게 해주는 것도 물론 아니다. 잎은 만병엽(萬病葉)이라 하여 콩팥이 나쁜 경우나 류머티즘에 먹으면 효과가 있고 이뇨에도 쓰인다. 그늘진 곳, 특히 공기 중에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라고 추위에 잘 견딘다. 주로 고산지대의 숲속에서 자라며 강원도 북쪽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다.


985.6m봉에 이르기까지의 소요시간은 약 1시간 30분. 이 봉 위에서 갈라지는 두 갈래 길 중 왼쪽으로 들어서야 옥수골로 내려설 수 있는데 길을 놓치고 말았다.


누군가 그랬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오지여행의 시작이라고...


능선을 따라 진행하다 오른쪽 선바위골 건너 선바위가 코앞에 보이는 지점에서 문님을 따라 일부는 왼쪽 옥수골로 치고 내려서고 나머지는 계속 능선을 타고 진행한다. 아름드리 적송이 여러 그루 서 있는 곳을 지나 안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산으로님 배낭에는 겨우살이를 비롯하여 곰취와 더덕으로 가득하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겨우살이는 "성질이 평하고 맛은 쓰고 달며 독이 없다. 힘줄, 뼈, 혈맥, 피부를 충실하게 하며 수염과 눈썹을 자라게 한다. 요통, 옹종과 쇠붙이에 다친 것을 낫게 한다. 임신 중에 하혈하는 것을 멎게 하며 안태시키고 몸 푼 뒤에 있는 병과 봉루를 낫게 한다."


조그만 봉을 올라서 왼쪽으로 돌아 가파른 산비탈을 치고 내려선다. 얼마쯤 내려서자 용대3리로 이어지는 옥수골과 만난다. 큼직한 바윗덩이들이 널려 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경치가 좋은 계곡 오른쪽으로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설악산 특유의 암반과 와폭이 어우러진 계곡에는 멋진 풍광이 펼쳐져 있다.

갑자기 물소리가 커지고 높이 10m쯤 되는 폭포가 자태를 드러낸다. 조금 더 내려서서 깨끗한 암반 위를 흐르는 계곡 물에 탁족을 하고 나니 마을로 내려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곰취에 싸먹은 오리로스는 뒤풀이의 시간을 마냥 즐겁게 한다.

곰이 먹고 향에 취했다고 해서 ‘곰취’ 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날로 쌈을 싸서 먹으면 그 향긋한 맛이 좋다.  여린 곰취에 구운 오리로스를 얹고 쌈장과 마늘, 양파를 곁들여 싸서 먹는 그 맛은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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