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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5. 상신구곡

2004년 11월 14일 (일)

대충산사 회원들과 귀연산우회 회원들이 함께 어울려 용산(상신)구곡과 갑사구곡을 찾아 산행을 떠난다.


7시 55분 유성파출소 앞에서 상신리행 21번 버스(요금 1인당 1200원)에 오른다. 이른 아침 시간 이어서인지 일반 손님은 한 명도 없고 버스는 산악회 전세버스가 되었다. 아파트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노은을 가로질러 30분 정도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 상신리 종점에 도착한다. 버스 종점 옆 구룡사지에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지주(유형문화재 제94호)가 있다.



당간은 절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다는 뜻을 가진 당이라는 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를 말한다. 현재 당간은 없고 지주만 남아있다. 지금은 당간지주만이 외롭게 서서 당시의 영광과 번성함을 흔적으로나마 알려주고 있지만, 구룡사(九龍寺)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걸쳐 번성하였으며, 사역(寺域)의 규모에 있어서 계룡산 최대의 사원으로 꼽힌다. 구룡사는 그 광대한 규모에 비하면 사찰에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고, 폐사된 지도 오래됐기 때문에 번성의 배경이나 폐사의 이유 등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1980년대 말 공주대 박물관의 발굴작업에 의하여 폐사 시기는 고려말 조선초로 추정되고 있다. 구룡사가 있는 계룡산의 골짜기는‘용산구곡(龍山九曲)’으로 불리며 이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금잔디고개와 맞닿는다.


8시 40분 오늘 탐사 산행의 대장을 맡은 느낌표님의 용산(상신)구곡에 대한 유래와 의미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용의 탄생에서 승천까지 용의 일생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마을길을 따라  1곡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구곡정 가든 앞에 상신리 유래비가 있고 그 오른쪽으로 보이는 선돌에는 음식점 플랭카드가 매어져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상신리에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상신리(上莘里)는 신소(莘沼)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신소는 길고 굽은 큰못이라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용둠벙을 뜻한다.




취음 권중면 선생이 한일 합방의 비보를 듣고 관직을 버리고 상신리에 은거하면서 서당을 차려 제자를 양성하다 83세에 죽었다. 그는 상신리 계곡에 9곡을 선정하여 이를 바위에 새겼으니 바로 용산구곡(龍山九曲)이다. 권중면 선생이 이곳에 살면서 명명한 용산구곡은 상신리 계곡이 <용과 함께 신이 숨쉬는 곳> 이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취음 권중면 선생은 <단(丹)>의 저자이자 우리나라 단학의 대가인 봉우(鳳宇) 권태훈 씨의 부친이다. 마을입구에 세워져 마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솟대(일명 오리대)와 목장승 그리고 봉우 권태훈선생의 공덕비가 서 있다.




장승과 솟대는 40대 이후 세대들에게는 애틋한 고향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문화상징물 중의 하나이다. 솟대는 장대와 새로 구성되어 있다. 장대 끝에 매달린 새는 비를 몰고 온다고 믿었던 만큼 새는 물에서 사는 오리의 모습에 가깝게 표현되어 있다. 장대나 돌기둥을 천상과 소통될 만큼 높다랗게 세운 다음 그 위에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올려놓은 솟대는, 장대 끝에 매달린 새가 훨훨 날아 하늘 끝 절대자에게 농부의 간절한 바램을 실어 날라 비도 내리고 햇볕 좋게 내리쬐어 일년 농사 대풍작이 된다는 농부의 믿음을 담은 농경 문화의 산물이다.


계곡에는 신성한 지역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줄을 쳐 놓은 소도가 보이고 그 아래 둥그런 바위가 상신구곡의 1곡 심용문이다.



용산구곡(龍山九曲)이 가로로 음각 되어 있고 그 옆에 1곡 심용문(尋龍門)이라고 세로로 음각 되어 있다. 거대한 용이 알에서 깨어나 서서히 승천할 준비를 시작하는 곳이다.



계곡으로 내려가 한 발 한 발 용의 물길을 찾아 올라간다. 곳곳에 여러 한자가 음각 되어 있다. 매표소 전방 약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시멘트 보가 있고 샘 옆의 반들반들한 바위 위에 2곡 음용담(陰龍潭) 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완전한 용으로 태어나기 위해 준비하는 곳이다.



곧바로 매표소를 지난다. 자연보호를 겸한 산행으로 모두들 쓰레기봉투를 한 장씩 받아든다. 덕분에 금잔디고개에서 관리공단 직원이 단속하는 출입금지 구역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구곡을 찾기 위해서 등산로를 버리고 계속해서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심마니들이 산삼을 찾는 심정으로 3곡을 찾는다. 등로 오른쪽에 임시 가옥이 있는데 잠사란다. 앞서가던 누군가가 암반 위에 새겨진 3곡 와룡강(臥龍岡)이라는 글자를 찾아내고 소리를 지른다. 용이 누어있는 곳으로 용이 상신계곡에 들어서 움직일 채비를 하는 곳이다. 용은 태어나면 백일 동안 물 속에 잠겨 있다가 움직이는 터전을 마련한다고 한다. 이곳이 그 터전을 살피는 곳이다.



3곡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바위와 아름다운 둠벙이 있다. 4곡 유용대(遊龍坮)이다. 용이 가장 편안한 세월을 보내는 곳이다.



둠벙 앞쪽으로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신기하다. 암반에는 취음선생이 쓴 “居然我泉石”(거연아천석; 한가롭게 내 자연을 즐기다). "江山風月閒者主人"(강산과 풍월은 한가한 사람이 주인; 경치가 좋은 산수에서 욕심 없이 즐겁게 살고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는 글귀가 음각 되어 있다.





단체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조금 더 오르면 5곡 황룡암이다. 바위에는 "湖西第一山水" 암반 바닥에는 "弓山乙水 太極岩"이라는 글을 비롯하여 많이 글들이 새겨져 있고 등산로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둥그렇고 커다란 바위에 5곡 황용암(黃龍岩)이라는 글이 희미하게 보인다. 용이 구름 위로 올려다보며 승천할 계시를 기다리는 곳이다. 용은 백년을 땅에서 살다가 하늘의 부름을 받고 승천한다고 한다.





황룡암을 출발해 약 10여분 계곡을 따라 오르니 작은 폭포와 어우러진 2개의 작은 소(沼)가 나온다. 6곡 현룡소이다.



6곡과 현(見)자는 뚜렷한데 흘림체의 용(龍)자는 희미하고 마지막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용이 차츰 영산의 정기를 받아 승천할 채비를 하면서 계곡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용의 거처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금 더 오르면 무속인 들이 기도하기 위해 지어놓은 움막터 옆에 7곡 운용택(雲龍澤)이 자리한다. 칠곡 글자와 운용택 글자가 다른 바위에 새겨져 있다. 용이 승천하면서 타고 갈 구름을 바라보면서 때를 기다리는 곳이다.




칠곡을 지나면서 계곡 폭이 좁아지고 물길도 많이 줄어든다. 계곡 가운데 둥그런 모습의 바위전면에 제8곡 비룡추(飛龍楸)가 보인다. 어느 문헌에는 비룡폭이라고 소개되기도 한다. 단단하지 않는 바위에 새겨진 글자는 마모가 심해 아주 희미하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찾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다. 백년동안 수도한 끝에 승천하는 용을 사람들이 보고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소리치면 이내 땅에 떨어져 다시는 하늘로 못 오르고 이무기가 되어 평생을 살아야한다. 그래서 이 비룡추는 용산구곡으로 들어온 용의 시험대가 되는 곳이다.



드디어 구곡의 마지막인 신룡연(神龍淵)에 도착한다. 절벽 바위 밑으로 소가 형성되어 있고 절벽바위 위에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용산구곡으로 들어온 용이 승천하면서 남긴 흔적의 모습이다. 구룡조천(九龍朝天) 먹구름이 몰려오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용은 신비롭고 거대한 몸부림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격정의 순간이 지나면 찬란한 햇살이 내려 비치고 고요함과 적막감이 조그마한 소에 담긴다. 이렇게 용산구곡(상신구곡)은 막을 내린다.





9곡에서 간식 먹으며 20분간 휴식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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