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을 둘러매고 백두대간 한 조각을 맞추러 집을 나선다. 한계령은 잘 알려진 대로 양양과 인제를 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꾸불꾸불한 도로 중의 하나이다. 인제군 원통에서 한계령으로 오르는 도로 위쪽에 한계산성(寒溪山城)과 한계사지(寒溪寺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한계산성이 신라 말 마의태자에 얽힌 안타까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과, 한계사지가 내설악 백담사의 원조에 해당하는 사찰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3시 15분 한계령 휴게소에서 하차하여 곧바로 들머리로 들어선다. 산행은 한계령휴게소 뒤 설악루로 오르는 시멘트 계단을 오르면서 시작된다. 이름하여 108계단인데, 번뇌를 털어 내는 계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번뇌 덩어리인 것 같다. 이미 계단은 등산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고개 마루턱에 설악루(1973년 6월 준공-현재 보수 중이다)가 있고 오른쪽으로 도로 공사중 희생된 영혼들의 명복을 비는 위령비가 서 있다. 매표소 앞에는 인산인해를 이룬 등산객들이 줄지어 입장을 기다린다. 3시 50분 고무판이 깔린 나무계단을 올라선다. 한계령휴게소 0.5km 중청 7.2km 이정표가 보인다. 극심한 정체로 500m 진행하는데 35분이 소요된다. 4시 30분 한계령 휴게소 1km 이정표를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서북릉 삼거리에 올라선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귀떼기청봉(1.6km) 거쳐 대승령(6.7km)으로, 오른쪽 길을 따르면 끝청(4.2km)을 거쳐 대청봉(6km)에 올라선다. 등뒤로 거칠게 솟구친 귀떼기청봉이 눈길을 끈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진행한다. 약간 정체가 풀리는가 싶더니 이내 더욱 심하게 정체된다. 정상 등산로를 버리고 왼쪽 산비탈을 치고 오른 덕분에 빨리 진행은 했지만 일행들과 헤어져 줄곧 외로운 산행이 된다. 7시 15분 한계령 4.1km 중청 3.6km 이정표가 서 있는 안부에 도착한다. 오른쪽으로 너덜지대가 산 아래로 흘러내리고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아침식사중이다. 정체가 조금씩 풀리고 진행속도가 빨라진다. 7시 40분 중청대피소 2.6km 이정표가 서 있는 안부를 지나고 30분 정도 진행하여 중청대피소 1.6km 이정표가 서 있는 끝청(해발 1604m)에 도착한다. 오색과 중청 갈림 지점으로 설악산 전체를 감상하기 최적의 장소이다. 산 아래를 안개로 채우고 설악의 봉우리들을 하늘 높이 들어올리고 있다. 대자연이 마치 하얀 휘장을 두른 것처럼 신비롭다. 바람이 많이 분다. 방풍용 재킷을 꺼내 입고 간식을 먹으며 10분간 휴식을 취한다. 8시 45분 중청을 돌아 끝청갈림길(해발1600m)에 도착한다. 왼쪽은 소청봉(0.4km)으로, 오른쪽은 대청봉(0.6km)으로 가는 길이다. 소청으로 가는 길은 한꺼번에 몰려든 산행 인파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곧바로 중청대피소를 지나 대청봉으로 오른다. 20분간의 오름길. 숨이 턱에 찰 무렵 발끝조차 안보일 정도로 짙은 안개를 뚫고 대청봉 왼쪽 날개에 선다. 우리나라 척추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중심에 있는 설악산의 대청봉(1708m) 주변은 운해에 갇혀 안타깝게도 깨어날 줄을 모르고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려는 등산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조선 시대 정조 때 성해응(1760-1839)은 자신이 지은 지리서‘동국명산기’에서‘멀리서 보면 청색으로 보였기 때문에 청봉으로 불렀다’고 대청봉의 유래를 설명한다. 또‘대청봉은‘봉정(鳳頂)산의 끝’으로도 불렸는데 국내 사찰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봉정암의 이름도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소개한다. 9시 15분 정상을 뒤로하고 오던 길로 내려선다. 오른쪽 죽음의 계곡 출입금지 안내판 뒤로 보이는 대간길로 들어선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 가끔 등산로가 희미하지만 대간꾼들의 표지리본이 길을 안내한다. 낙엽 쌓인 산길을 혼자 걸으며 가을을 만끽한다. 다행히 조금씩 운해가 걷히면서 설악은 멎진 모습을 드러낸다. 대청에서 중청과 소청으로 그 후의 가파르고 긴 내리막. 대각선으로 내리꽂는 철계단의 마침점에 희운각이 있다. 줄지어 철계단을 내려서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 시간 정도 내려서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한다. 점심식사와 휴식을 취하는 등산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휴식을 취하면서 느긋하게 일행을 기다린다. 한 시간쯤 후에 그리매님을 선두로 죽음의 계곡을 내려오는 일행을 만난다. 대청봉에서 40분 넘게 나를 기다리며 걱정했다는 플러스님의 원성을 들으며 숲 속 한 쪽에 자리를 잡는다. 가슴 조이며 죽음의 계곡을 내려온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한 병에 칠천 원이나 하는 막걸리를 한 잔씩 반주로 곁들이고 점심식사를 한다. 11시 55분 점심식사가 끝나고 단체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예정보다 시간이 너무 늦어져 공룡능선은 다음 구간에 타기로 하고 오늘은 단풍산행을 즐기기로 한다. 12시 정각 무너미고개정상(해발 1020m)에 올라선다. 갈림길이다. 오른쪽은 천불동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왼쪽이 공룡능선으로 향하는 대간길이다. 왼쪽으로 들어서 10분 정도 진행하여 신선봉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왼쪽 가야동계곡으로 내려선다. 설악산 주능선인 공룡릉과 용아릉 사이에 깊이 파인 골짜기로, 장엄한 기암절벽이 솟구친 가운데 너른 암반과 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야동계곡은 희운각대피소 부근 계곡에서 구곡담 합수지점인 수렴동대피소 앞까지 표고차가 300-400m 밖에 안 될 정도로 완경사로 이어진 계곡이다. 지금은 휴식년이어서 출입금지 구간이다. 물 마른 너덜계곡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내려간다. 붉디붉게 타오르는 가을 산. 기암괴석 층층이 에워싼 봉우리마다 단풍이 유혹한다. 여심은 나이하고 무관한 모양이다. 포즈를 잡고 사진 촬영을 하란다. 12시 35분 걸음을 멈추고 물가에서 10분간 휴식을 취한다. 골짜기가 넓고 가을 햇살 같은 돌단풍이 바위틈마다 노을처럼 피어나 가을 계곡의 정취를 한껏 느낀다. 천불동이나 구곡담처럼 인공시설물이 없고 설악을 안다는 이들만 찾아들기 때문에 인적이 드물어 호젓한 산행을 즐긴다. 30분 정도 더 내려서고 차가운 계곡 물에 족탕을 하며 휴식을 취한다. 대간을 하면서 이렇게 여유로운 산행은 처음이라며 모두들 즐거워한다. 13시 30분 갈림길을 만난다. 왼쪽은 봉정암(1.5km)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오세암(2.5km) 가는 길이다. 커다란 바위에 노점 카페를 차려놓고 산행에 지친 나그네들에게 대금 연주를 들려준다. 당귀차(이천원) 한 잔씩 마시고 가슴을 후벼파는 대금연주(칠갑산외 1곡)를 감상하며 모두들 넋을 잃는다. 단풍 터널 오름길을 숨가쁘게 치고 오른다. 15분간의 가파른 오름길 끝에 안부에 닿으면 봉정암 1.8km 오세암 2.2km 이정표가 반긴다. 잠시 숨을 돌리고 곧바로 가파른 내림길을 5분간 내려선 다음 완만한 오름길을 이어간다. 길은 매우 가파른 오르막길로 바뀌고 턱밑까지 차 오르는 숨을 토해내며 6분 정도 치고 오른다. 평탄한 길을 잠깐 걷고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온산이 물감을 뿌려놓은 듯 갖가지 색채로 채색되어 눈을 즐겁게 한다. 발그레한 얼굴, 수줍음이 눈부시다. 설악의 단풍은 언제나 가슴이 찡하다. 가을철 최고의 미색이다. 그 고운 자태를 보러 해마다 10월이면 등산객과 관광객이 인산인해다. 14시 20분 오세암 1.1km 이정표를 지나고 잠깐 잠깐씩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을 반복한다. 14시 40분 멀리 오세암의 파란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오고 독경소리가 온 산에 울려 퍼진다. 10분 후 오세암에 도착한다. 새빨간 단풍을 주인공으로 하여 노란색과 갈색을 띠는 활엽수와 사철 푸른 소나무가 조연이 되어 골짜기를 뒤덮는다. 여기에 파란 하늘과 웅장한 암봉들은 훌륭한 무대장치로서 그 역할을 다한다. 1643년(인조 21) 설정(雪淨)이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름을 바꾼 데 따른 전설이 전하고 있다. 설정이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암자에서 키웠는데, 어느 날 월동 준비를 하기 위해 혼자 양양까지 다녀와야 했다. 그 동안 혼자 있을 4세된 어린 조카를 위하여 며칠 동안 먹을 밥을 지어놓고, 조카에게 밥을 먹고 난 뒤 법당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에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면 잘 보살펴줄 거라고 일러주고 암자를 떠났다. 그러나 설정은 밤새 내린 폭설로 이듬해 눈이 녹을 때까지 암자로 갈 수 없게 되었다. 눈이 녹자마자 암자로 달려간 설정은 법당에서 목탁을 치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 조카를 보게 되었다. 어찌된 연유인지 까닭을 물으니 조카는 관세음보살이 때마다 찾아와 밥도 주고 재워 주고 같이 놀아 주었다고 하였다. 그때 흰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관음봉에서 내려와 조카의 머리를 만지며 성불(成佛)의 기별을 주고는 새로 변하여 날아갔다. 이에 감동한 설정은 어린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암자를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정자에서 10분 정도 휴식을 취하고 평탄한길을 따라 5분간 진행한다. 가파른 내림길을 5분 정도 내려서면 샘터가 보인다. 물 한 바가지 떠서 갈증을 달래고 길을 재촉한다. 15시 40분 갈림길을 만난다. 왼쪽은 수렴동 대피소을 거쳐 봉정암(7.2km)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영시암 거쳐 백담대피소(3.5km)로 가는 길이다. 긴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곧바로 영시암에 닿는다. 중창불사가 한창 진행중이고 조그만 샘터가 눈길을 끈다. 이곳부터는 왼쪽으로 수렴동 계곡을 끼고 평탄한 산책로가 이어진다. 조용한 숲 속 산책로를 따라서 빠른 걸음을 옮긴다. 왼쪽 계곡에 속살을 다 드러낸 바위, 홍엽의 색깔을 가득 담은 계류, 그리고 숲 속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까지 가을 산이 보여줄 수 있는 온갖 화려함이 담겨 있다. 16시 10분 철계단을 건너면 백담사 1.8km 이정표가 보이고 30분 정도 진행하면 백담대피소에 닿는다. 아름다운 외관과는 달리 주변은 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대피소를 지나면 왼쪽 계곡에 오색의 화려한 빛깔을 띤 단풍이 거울처럼 맑은 옥류에 반사돼 눈이 황홀하다. 렌즈를 들이대보지만 디카에 담기에는 무리인 듯 하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 계절. 깊어진 하늘이 내려앉아 한결 맑고 차가워진 계곡 물마저 붉게 물들이며 떠내려가는 단풍 한 잎, 또 한 잎. 바라보는 이의 얼굴에도 단풍 같은 가을이 물든다.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16시 50분 백담사에 들어선다. 전두환씨의 유배지로 유명해진 백담사는 동학란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만해 한용운(1879-1944)이 숨어 지내다 1905년 출가하여 불도를 닦고 《님의 침묵》을 집필한 곳이다. 백담사는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년) 자장율사가 한계사란 이름으로 개창한 사찰로,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화재를 당하자 그를 막아보자는 뜻에서 백담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사찰 이름을 바꾼 주지가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를 세어보라 하여 확인해 보았더니 꼭 100개 이었다고 한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령각, 화엄실, 법화실, 정문, 요사채 등이 있으며, 뜰에는 삼층석탑 1기가 있고 옛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17시 정각 휭하니 백담사를 둘러보고 곧바로 용대리 주차장으로 향한다. 용대리 주차장까지는 7.1km로 빠른 걸음으로 1시간 조금 넘게 소요된다. 수렴동계곡은 백담사를 기점으로 이름이 백담계곡으로 바뀐다. 18시 정각 용대리 셔틀버스 승강장을 통과하고 10분 정도 더 걸어 내려와 용대리 주차장에 도착한다. 버스에 오르면서 산행은 마침표를 찍는다.
23시가 막 지나면서 대간꾼들을 태운 버스는 경부고속도로 대전요금소로 진입하면서 언제나처럼 차내에 불이 꺼지고 모두들 잠을 청한다. 버스는 전조등 불빛으로 어두움을 밀어내며 거침없이 질주한다. 남이분기점에서 중부고속도로로 갈아타고 호법분기점에서 다시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탄다. 0시 30분 문막휴게소에서 15분간 정차하고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탄다. 1시 20분 경부-중부-영동-중앙 고속도로를 질주한 버스는 홍천요금소를 빠져나와 삼거리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44번 국도를 타고 속초방향으로 향한다. 2시 25분 관광민예단지 휴게소 주차장에 도착한다. 주차장은 관광버스로 그리고 휴게소는 단풍산행을 나온 인파로 넘쳐난다. 차안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30분간의 아침식사와 산행준비를 끝내고 한계령을 향해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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