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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2. 중산리-천왕봉-장터목-중산리

2003년 11월 16일(일)

버스는 예정보다 조금 늦게 지리산으로 향한다. 안영요금소를 빠져나간 버스는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인삼랜드휴게소에서 20여분간 정차하고 산청 다음 단성 나들목으로 빠져나가 20번 국도를 타고 중산리까지 이동한다. 차량이 많은 관계로 주차장 진입을 통제하는 국립공원 관리소 직원의 제재로 도중 하차하여 주차장까지 산길을 따라 10여분을 걸어서 이동한다.

우리나라 산악의 대표성과 상징성 그리고 역사성을 고루 갖춰 흔히 민족의 영산으로 불리는 지리산(智異山)은 산이 넓은 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두류(頭流), 방장(方丈), 지리(地理또는地利), 불복(不伏), 반역(反逆), 적구산(赤拘山)으로 불려온 산 이름에서 벌써 지리산의 속내와 아픔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지리산은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 내렸다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는데 간혹 남해바다에 이르기 전 잠시 멈추었다 해서 두류산(頭留山)으로 적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
'불복(不伏)'과 '반역(反逆)'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려는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찾아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반기를 들어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이유로 태조에 등극한 뒤에 지리산을 불복산, 반역산이라 하고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오늘 산행은 지난 여름에 올랐던 중산리코스이다. 

오를 때나 내려올 때나 급경사 코스로 초보자에게는 약간 힘든 코스지만 천왕봉에 오르는 가장 짧은 코스다. 11월 17일부터 12월 15일까지 산불예방 및 산의 휴식을 위해 지리산 출입을 통제한다고 한다. 매표소 직원이 5시까지는 하산해야 한다고 한다. 마음이 급해진다.

10시 30분 두류동주차장 매표소에서 시멘트 포장 도로를 따라 200여 미터 지나자 법계교가 나오고 법계교를 지나자 1976년 지리산으로 사라진 우천 허만수 추모비(山을 위해 태어난 山사람)가 있다. 이곳에서 자연학습원으로 난 오른쪽 도로가 아닌 왼쪽 산길이 천왕봉으로 향하는 등산로이다. 급경사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먼저 떠난 선두 산꾼들이 보이지 않아 빠른 걸음을 옮기자 한 분 한 분 보이기 시작한다.

10시 50분 칼바위에 다다른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 중턱의 큰 바위 밑에서 은거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장수에게 그 자를 찾아서 목을 베어 오라고 명한바 그 장수가 지리산을 헤매다 이곳에서 2km 떨어진 곳에 이르러 큰 바위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칼로 치니 바위는 갈라져서 홈바위가 되고 칼날을 부러져서 이곳까지 날아와 하늘을 찌를 듯 한 형상의 바위로 변하여 이름을 칼바위라 부른다는 전설이다. 

5분 정도 더 오르면 출렁다리가 보이고 다리를 건너면 갈림길이다. 왼쪽은 장터목산장으로 향하는 길이고 직진하면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아주 가파른 돌계단이다. 

통나무를 가로질러 만든 계단과 나무계단을 한 발 한 발 호흡에 맞춰 쉼 없이 오른다. 

11시 25분 산행을 시작한지 거의 한시간이 지날 즈음 망바위(해발 1068m)에 도착한다.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달래고 산행을 계속한다. 중간에 묘가 하나 있는데 일부 산꾼들은 이 묘를 '공자묘지'라고 부른다. 

11시 45분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다. 문창대이다. 법계사가 한 눈에 들어오고 사방이 모두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 천왕봉이 우뚝 솟아있고 정상을 오르는 등산객이 인형처럼 보인다. 

로터리 산장(대피소)에서는 많은 등산객들이 간식을 즐기면서 휴식을 취하고 문창샘에서는 수통에 물을 보충하고 정상 도전에 나선다. 
 
11시 50분 법계사에 도착한다. 정상에 오르지 않는 사람들은 이곳이 오늘 산행의 목표지점이다.
자연석 위에 반듯이 세워진 3층 석탑(보물473호)은 인공 석탑으로 보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자연이 빚어낸 돌탑으로 여겨진다. 석탑과 석탑을 받치는 바위는 이끼로 뒤덮여 마치 태초부터 함께 빚어진 것처럼 보인다. 바위 높이 3.6m, 탑 높이 2.5m의 비교적 크지 않고 간결한 탑이지만 풍기는 인상은 신비스럽고 강력하기까지 하다. 삼층석탑 이외에는 다른 사찰의 그것들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으나 산신각과 칠성각이 좀 특이하다.

박문수 어머니가 법계사에서 주목껍질을 벗겨서 즙을 짜서 밥을 지어먹고 즙으로 목욕을 하면서 천일기도를 올렸는데 정성이 지극해 부처의 어머니인 문수보살이 아들을 하나 주겠다 해 자식을 얻어 키운 아들이 바로 박문수라고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문수란 이름도 문수보살을 의미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쇠하고 일본이 흥하면 법계사가 쇠한다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왜놈들이 법계사를 자주 침범했다 한다.

법계사에서 천왕봉까지 2km 구간은 경사가 매우 급하고 보통 산행에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2분 정도 오르자 전망 좋은 바위가 나오고 이곳에서 잠시 먼 산 바라보며 조급한 마음으로 허둥대고 때로는 악을 쓰며 오늘 이 순간이 마지막인 듯 절박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나를 돌아본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서 내 등을 밀어주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며 2달 전에 오를 때와는 달리 마음은 한결 여유롭다. 평탄한 길이다. 길은 끝나기 위해서 있고, 길은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있다. 평탄한 길이 끝나고 또 오르막길이다. 12시 일행들이 점심식사를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아 함께 식사하자고 부른다. 배가 부르면 오르기가 힘들어서 사양하고 발걸음을 정상을 향해 옮긴다.

30분을 오르자 개선문(해발 1700m)이 보인다. 하산해서 안 사실이지만 어느 초보 산꾼은 정상에 오르면서 개선문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처럼 생겼을 것으로 상상했나보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0.8km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나무 계단을 오르면 가문비나무 군락지 사이사이로 고사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정상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쉼터에서 간식으로 허기를 속이면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다른 사람들이 힘들게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12시 50분 천왕샘(해발 1850m)이 보인다. 천왕봉 밑의 옹달샘, 바위틈에서 흐르는 물이 고여 있는 곳. 누군가 이곳 샘물 맛이 물 맛이라기 보다는 이슬 맛이라고 한다. 한바가지 떠서 마신다. 목줄기를 타고 시원스럽게 내려간다. 곧바로 이어지는 나무계단과 철계단을 힘들게 한 발 한 발 오른다. 그래도 정상이 코앞에 보여 발걸음을 한층 가볍게 한다. 

13시 5분 드디어 천왕봉 정상에 선다.
천왕봉 꼭대기의 표지석 앞면에는 '지리산 천왕봉'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1915m라고 쓰여 있으며 뒷면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쓰여 있다. 처음 이 비를 세우면서 '영남인의 기상'이라고 새겼는데 이것을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영남인'을 '한국인'으로 고쳤다고 한다. 많은 산의 정상을 올라 보지만 지리산 천왕봉에서는 그 느낌이 남다르다. 앞으로 한달 동안 문닫힘이 아쉬운지 모든 것을 허락하듯 멀리 남해바다가 보인다. 

남명 선생이 일찍이 "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로 지리산 영봉의 장엄함을 찬탄했듯 그 위용은 아직도 변함 없다. 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돌뿐인 정상 천왕봉은 수많은 봉우리를 거느리며 한반도 남쪽의 뿌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래서 정수리인 천왕봉은 하계(下界)에 있는 땅에게 하늘이다. 이러한 천왕봉에 전설이 전한다.


천왕봉에는 천녀(天女)가 내려와 살고 있었는데 엄천사의 법우화상이 그와 결혼하여 딸 여덟을 낳았다. 이 딸 여덟을 모두 무당으로 길러 조선 팔도에 보내 우리나라의 신앙과 무속을 다스리게 했다. 그 천녀가 죽은 뒤 천왕봉 밑에 할미당(성모사)을 세워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마칠 때쯤 다른 일행들이 올라온다.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세찬 바람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등 떠밀려 하산을 서두른다. 시계를 보니 13시 25분이다. 산에 오를 때는 등산화 끈을 좀 느슨하게 매고 내려갈 때는 조이도록 매는 것이 좋다고 한다.


제석봉으로 길을 잡고 가파른 돌길을 조심조심 10여분 내려서자 통천문(通天門)으로 들어간다. 신선들까지도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통천문을 통하여 하늘로 오르고 그 하늘은 천왕봉이다. 통천문(해발 1811m)을 통해서 천왕봉을 지나 왔지만, 그 문은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문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곳곳에서 눈과 얼음이 보인다. 2-3일전에 눈이 내렸다고 한다. 내림길이 수월해진다. 

하늘로 통하는 통천문을 지나 제석봉으로 향한 지 25분 후 제석봉에 도착한다. 살아서 백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지리산 최대의 주목이 고사한 지대. 쓸쓸하고 황량한 광경이다. 벌목꾼들이 증거 인멸을 위해서 불을 질렀다고도 하고,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하여 주목 군락지대에 토벌군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 아픈 역사가 스며있는 곳이다. 

14시 5분 장터목산장에 도착한다. 제석봉과 연하봉 사이 능선 안부에 자리잡고 있다. 오른쪽으로 백무동 가는 길은 지난 여름에 내려간 길이다.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왼쪽 가파른 길을 따라 중산리로 하산한다. 대피소 바로 아래의 산희샘에서 수통에 물을 채우는 사이 다른 일행들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진다. 계곡 사이로 나무다리가 보인다. 명성교이다. 내림의 발걸음 을 잠시 멈추고 나무다리 위에서 물 흘러내림을 바라본다. 

다시 나무숲 길과 키 작은 조릿대 길을 걸어서 끝없이 흘러 내려가는 물줄기를 따라서 걷고 또 걷는다. 

계곡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조금 더 내려가자 또 나무다리가 보인다. 병기막터교이다. 잠시 길을 멈추고 간식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한다. 중산리까지 4.3km 표지판이 보인다. 가파르던 길은 경사도 완만해지고 돌계단 간격이 좁아지고 수월한 길로 바뀐다. 그러나 내림길은 지루하다.
14시 50분 힘차게 물줄기를 떨어뜨리는 유암폭포가 보인다. 아름다운 물보라에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눈동자 고정시켜 물 흘러내림을 바라본다. 

5분 정도를 걸어 내려가자 긴 나무다리가 물 없는 계곡을 가로질러 놓여 있다. 홈바위교이다. 

먼저 가던 일행들이 계곡물에 발을 담고 탁족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올라올 때 건넜던 것과는 다른 출렁다리를 만난다. 장난치며 출렁다리를 건너 조금 더 내려서자 아침에 건넜던 출렁다리가 보인다. 15시 35분 천왕봉과 중산리 갈림길에 도착한다. 20분간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서자 야영장 입구에 도착한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16시 정각 매표소 주차장에 도착하니 법계사에서 먼저 내려온 팀이 반갑게 맞아준다. 산길을 따라 버스가 주차해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산은 결코 정복되지 않는다. 다만 너그러이 받아 드릴뿐이다" 하는 말이 생각난다. 버스 안은 모두들 정상 정복에 뭔가 큰 일을 이뤄낸 성취감에 들뜬 분위기다.